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5화 (15/281)

◈1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9)

나는 손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보았다.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반투명하게 비쳤다. 아마 엠버넷이란 기사의 손이겠지.

“정녕 엠버넷이도냐?”

“……네, 폐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호감도가 대폭 올랐어요! 호감도가 조정됩니다. ٩(๑>∀<๑)۶]

[세상에나!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20을 넘었습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이 빙의자 님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정확하게는 엠버넷이면서 그녀의 후손이라 생각해 주세요, 황녀님. 다 기억나진 않거든요.”

어렴풋하게 기사 ‘엠버넷’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완전하진 않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더니, 아기 황녀님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돼써.”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조그만 아기 황녀님이 내 목에 매달리듯이 안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데구루룩 굴리다가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음, 제 이름은 달린 에스테에요, 황녀님. 현재 이름이요.”

내 말에 대답한 건 아기 황녀님이 아니었다.

[‘주인공(아기 황녀)’이 빙의자 님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대폭 올랐어요.]

[축하해요! ‘주인공(아기 황녀)’이 빙의자 님을 신뢰합니다. ε=ε=(ง ˃̶͈̀ᗨ˂̶͈́)۶]

[혼신의 연기로 퀘스트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건강 수치가 대폭 오릅니다!]

* * *

“이제 쫌 진정이 되었누냐.”

그 말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니, 헛기침을 하려고 했으나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콜록콜—록!”

아기 황녀님이 나를 토닥거려 주었다. 문제는 너무 작은 손이라 도움이 안 되는…….

퍼억!

도움이 됐다! 아주 많이 됐다!

“아악!”

“오, 이제 쫌 괜춘한가!”

“아, 아프…… 아니, 네. 괜찮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아기 황녀님이 전생에 ‘소드 마스터’였단다. 검의 극의를 깨달은 대단한 사람.

그 무지막지한 힘이 이 어린 아기의 몸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개연성 똥망나는 소리인지!

이딴 상황을 만든 인간이 도대체 누구야? 아니, 요정이 그런 건가? 누구든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게 진짜 있는 소설이었으면 안 봤…… 지는 않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신선했다. 껄껄껄 웃는 육아물 주인공이라니. 거기다 겁나 센 소드마스터라니. 먼치킨이라니?

“돈 주고 사서 봤겠군.”

“모라고?”

“아뇨, 나쁜 놈들은 꽥 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기 황녀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예, 상황에 안 맞는 아무 소리 한 거 저도 알고 있어요.

“역쉬, 머리는 예전에 다친 곤가?”

“아뇨, 저 미치지 않았어요, 황녀님…….”

그러나 아기 황녀님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원작 소설에서는 타인을 너무 잘 믿는 순진한 아기님이었는데, 이쪽은 구르고 구르다 온 황제님이라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저 그런데, 황녀님.”

“모지?”

“황녀님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폐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내 말에 아기 황녀님은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던 표정을 지우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너눈 지금 너 스스로를 돌아봤울 때, 엠버넷잉게냐, 달달 오체수인게냐.”

“달달 아니고 달린이요, 황녀님.”

“어쨌둔!”

“음, 그건…… 달린 쪽이겠죠?”

처음으로 스킬을 써 봤다.

하지만 스킬 설명에 쓰여진 ‘레벨이 낮으면 불안정하다’라는 문구 때문인지, 내 안에서 느껴지는 엠버넷 씨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렴풋한 기억이라거나 그와 관련된 감정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정도랄까. 기억을 훔쳐봤을 땐 아주 생생했는데, 그런 느낌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근데 이 스킬, 레벨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 그때 되면 알겠지.

“저는 달린이에요. 달린 에스테. 지금 여기서 현생을 살아가니까요.”

빙의자인 나는 이 세계에서, 지구에서의 이름이 아닌 ‘달린 에스테’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황녀님은…….”

아기 황녀님 유엘 래빗 비센인가요? 아니면 전생의 로아타 황제인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음, 뭘 드셔서 그렇게 사랑스러우세요?”

“머?”

나는 꿇어앉은 채로 씩 웃었다. 이 질문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메인 퀘스트를 어떻게 깨느냐, 이거지.

“허어, 너눈 참…….”

아기 황녀님이 조그만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이 아기 황녀님 눈에 여전히 약간의 경계심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경계심을 더 키울 것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올랐어요!]

[‘주인공(아기 황녀)’의 현재 호감도 : 10]

‘어라, 마이너스에서 좀 더 올랐네?’

그러고 보니 호감도가 대폭 올랐다는 창을 두 번쯤 본 것 같았다.

내겐 잘된 일이었다. 조금 전의 우상향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른 호감도만큼 아기 황녀님 눈에서 경계심이 조금 더 사라진 게 보였다.

“그래서 너눈 나를 모라고 부를 고지?”

“……어, 그건 황녀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네 의견울 물어따.”

“음……. 폐하? 폐하가 좋으실까요?”

지금 저 모습은 누가 봐도 위엄 넘치는 아기, 아니 황제님 그 자체였다.

내가 어물어물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아기 황녀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전생의 일운 이미 모두 지나가찌. 그건 이제 의미가 없눈 고야.”

“아…….”

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저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아기님. 얼굴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시는데요.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아기 황녀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로니 네가 나룰 다시 찾아와도 의미가 없쪄.”

“어어…….”

이게 아닌데. 나는 당황했다. 어째 생각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분명 전생 얘기까지 나오면 좀 더 호감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의 반응은 꽤 냉랭했으니까.

문제는 아기 황녀님의 표정과 다르게 호감도가 쭉쭉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소폭 올랐어요! ღ˘‿˘ற꒱]

말은 차갑게 하지만 호감도는 솔직한데.

‘이거 긴장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내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요정의 창을 응시하는 동안 아기 황녀님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로케 말할 수는 있게찌. 엠버넷, 시간을 거술러 나타난 너를.”

조그만 손이 내 손 앞에 탁 놓였다. 그 손에 딸랑이가 들려 있어서 난 무심코 움찔했다. 저 딸랑이가 언제든 검기를 싣고 내 머리통을 향해서 날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공손한 몸짓을 보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난 곧장 허리를 바로 폈다.

“난 널…… 대굔하게 여긴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잘게 떨렸다.

내가 떤 게 아니었다. 내 안에 담긴 ‘엠버넷’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떨림이었다. 희미하지만 이 영혼이 전율하고 있었다.

혹시 감격해서 울고 있는 걸까?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내 가슴을 토닥거려 주었다. 거, 울지 마세요, 멋진 기사님.

“하지만 말햇둣이 이미 지나간 시간운 지나간 고.”

“저, 잠시만!”

“그롬 이번 생에 너룰 새로운 쑤하로 받아주마!”

“내치는 건 안 돼요!”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웅?”

“네에?”

내가 먼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나는 재빨리 움직였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한 것이다.

“영광입니다, 폐, 아니 황녀님!”

따까리라니, 아주 영광입니다!

수하라면 앞으로 주인공 옆에서 계속 얼쩡거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데다, 주인공 자신도 내게 협조적일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관계라니!

“쑤하라니가, 몰 조아하는 거냐? 이번 생애도 또 부려 먹히고 싶우냐? 앙?”

아기 황녀님은 찡그리며 성을 냈다.

“아니, 좋아서 좋다고 한 건데요…….”

“속도 없눈곤 이번 생애도 아주 똑같구나, 호구로 살지 말래찌! 어? 어누 날 손모가지 똑! 떨어진다고!”

아니 무서워요, 황녀님……. 내가 딴 데 충성한다는 것도 아닌데 험악하게 구실 필요는 없으시잖아요.

“헤헤, 하지만 이번 생에도 황녀님과 함께해서 좋은 걸 어떡해요.”

“…….”

“감사합니다.”

[‘주인공(아기 황녀)’ 호감도가 올랐어요! (๑˃̵ᴗ˂̵)و ♡]

[‘주인공(아기 황녀)’의 현재 호감도 : 16]

“……엠버넷 네놈운 그렇게 웃지 않았따.”

“아, 좀 경박해 보이나요? 이번 생엔 이렇게 태어나서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기 황녀님의 한숨을 보며 나는 활짝 웃었다. 됐구나.

그리고 허리를 들자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어?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그러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안타깝게도 노력이 무색하게, 고개를 들자 놀라서 찡그린 아기 황녀님의 얼굴이 보였다.

“달론!”

“하하, 달린이에요, 황녀님.”

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빙의 능력을 급작스럽게 쓴 것에 대한 후유증인 건가?’

조그만 손이 내 손을 흔들었다.

“모지, 너 징짜 어디가 아푼고냐?”

“아, 아니에요. 몸이 조금 약한 편이라 그런가 봐요.”

아기 황녀님이 잠시 내 몸과 밤하늘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 생은 아주 비리비리하게 태오낫꾸나.”

“하하하.”

하긴 내 몸이 좀 많이 가냘파 보이긴 하지. 그래도 잘만 움직이는데.

“그럼 저 앞으로 황녀님을 찾아가 뵈어도 되나요?”

“……구래.”

“매일 가도 돼요?”

“구래. 마, 맘대로 해라!”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기 황녀님이 짧은 팔로 힘겹게 팔짱을 끼더니, 씨익 웃었다. 어째 불길한 웃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말 잘 둗는 수하가 있소소 나뿔 것 없꾼! 궁 시뇨들은 너무 심심하던 찰라다!”

“예?”

“많은 거슬 할 수 있겠어!”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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