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10)
껄껄껄 웃지만 마시고 정확히 말씀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아연하게 아기 황녀님을 바라봤다.
……이런 분께 ‘아기다움’이 뭔지 가르쳐 드려야 한단 말이지.
“저어, 황녀님!”
나는 아기 황녀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동통한 팔짱은 금방 풀렸다.
“황녀님께서는 현재 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계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후움, 그로치?”
“제게 방금 현생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것또…… 그래찌?”
퀘스트 창에서 이 아기 황녀님이 전생을 기억하는 건 특별한 일이며 유의하라 했다.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주의를 기울여 나쁠 건 없겠지.
“멋지십니다!”
나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는 황녀님께서도 현생에 충실하시겠다는 말씀 아니신지요.”
“……어어, 움, 어? 그, 그로치?”
“네! 그러니 저도 황녀님께서 현생에 잘 적응하셔서 잘 사시도록! 이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보필할게요, 새로운 수하로서!”
“어어?”
“이번 생도 잘 부탁드려요!”
아니나 다를까, 아기 황녀님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소설의 황실 인물들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원작 속의 아기 황녀님은 순진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의 황녀님은 전생 황제로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상태 아니던가. 그럼 성격도 황제에 가깝지 않을까?
예상이 틀리진 않았는지 아기 황녀님이 끙,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 구래. 이본 생도 나눈, 나답께 살 것이다!”
음, 갈 길이 멀겠구먼.
“멋지십니다. 그럼 앞으로 어린 황녀님으로서 현생을 살아가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우웅? 도움?”
“예! 이 몸은 이미 백작 영애로서 스무 해를 넘게 살았으니, 뭐든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음, 구래, 뭐……. 하지만 필요가.”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래도 아예 거절하진 않았으니 옆에 붙어서 살살 꼬시면 어떻게든…… 되겠지.
‘됐어!’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나.”
듣기 좋으나 오싹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흔들리는 풀숲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2황자?’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2황자가 눈을 찡그렸다. 저쪽도 나를 알아본 거구먼.
“어째서 영애가 이런 곳에…….”
그 순간 2황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나와 아기 황녀님 쪽을 번갈아 보는가 싶더니, 곧 분노가 얼굴에 번졌다.
“설마 지금 내 여동생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 건가?”
예?
[주연 ‘2황자(둘째 오빠)’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д◔)]
[주연 ‘2황자(둘째 오빠)’의 현재 호감도 : -20]
“그, 어…….”
무슨 소리세요!
곧바로 반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나는 일단 진정하고 주변을 살폈다.
아기 황녀님의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우리 둘 다 나란히 흙바닥에 앉은 탓에 옷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밀쳐졌다가 일어나면 바로 이런 몰골이겠구나 싶었다.
난 아기 황녀님이 무어라 변명을 해 주길 바랐건만 이 아기님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저기요, 황녀님?
“이 사랑스, 후,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괴롭힐 구석이 어디 있다고……!”
이미 반쯤 여동생 바보의 모습을 보이는 2황자님께서 분노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이렇게 애틋하면서 호감도는 왜 그 모양인데!’
어쩐지 2황자 주변으로 파지지직 번개 같은 게 튀는 게 보였다.
아마 그 주위가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이는 저건, 조금 전 아기 황녀님이 보인 검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잠깐, 잠깐만!
‘이 육아물, 오빠들도 검술에 한 가닥 하는 인물들이었지?!’
2황자가 두 걸음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난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아기 황녀님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 때 조그만 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구만해라. 힘없눈 자를 핍박하다니, 그게 기사로서 올바른 행동이더냐.”
황녀님이 나를 감싸고 나섰다.
……그나저나 황녀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군요?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저런 말투로 가족을 대하는 걸 보니 기분이 생경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2황자도 얼굴을 찡그렸다.
“넌 여전히 말투가……. 하. 아니, 됐다.”
2황자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잘생긴 얼굴이 구겨졌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그럼 이것만 묻지. 에스테 영애가 널 괴롭힌 게 아니란 말이더냐?”
“그로타.”
“……그럼 됐다.”
2황자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사나운 낯이었다. 정말 까칠하고 너무 귀엽다. 생각해 보니, 이 소설도 저 오빠의 까칠함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던 것 같은데.
때 아닌 감상에 빠져 있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렸다. 2황자님이 왜인지 나를 다시 노려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괴롭힌 게 아니면 왜 이 영애와 함께 여기 있었던 거지?”
“저, 황자 전하.”
“영애에게 묻지 않았다.”
나는 살벌한 시선에 찔끔해서 찌그러졌다. 이런 앙칼진 하늘색 고양이 같으니, 퉤.
“부황께서 내리신 기사는 어찌했지?”
“따돌렸따!”
“그건 자랑이 아니다.”
“……자랑을 하라구 물은 것이 아니란 마린가?”
“……그러라고 물었겠나?”
남매간의 것이라기엔 다소 핀트가 엇나간 대화였다. 나도 어느새 요정처럼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부황께서 붙이신 기사도 떼놓고 이 영애와 여기서 무얼 한 거지? 두 사람이 무슨 관계라고? 아주 친한 친구라도 되나?”
이건 분명 반어법이었다. 지금 니가 정신머리가 있냐, 하는 의미일 터.
그리고 내가 짧게나마 지켜본 이 아기 황녀님은 이런 질문에 우아하게 대답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직설적으로…….
“새로 둔 쑤…….”
“으아아, 황녀님!”
나는 얼른 아기 황녀님 앞에 무릎 꿇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황녀님, 황녀님. 현생! 현생!”
“모야?”
“앞으론 현생을 사신다면서요. 눈높이를 조금만 낮춰 주세요, 네?”
아기 황녀님과 나는 공식적으로 여기서 처음 만난 사이다. 그런데 아기 황녀님이 수하라 선언하면, 황제나 황자는 당연히 엄청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어린아이의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만, 줄곧 이런 말투와 행동을 구사해 온 황녀가 하는 말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더 컸다.
“저랑, 저랑 즐겁게 노셨던 거잖아요, 그죠?”
2황자님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조심스레 말하자, 아기 황녀님이 볼을 부풀렸다.
앗, 귀여워. 황녀님도 무의식중에는 이런 행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로타.”
이 아기 황녀님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나이답게 행동하지 않았던 듯했다.
다행히도 아기 황녀님이 선선히 내게 맞춰 주었다.
“나눈 놀이 상대가 피료하다. 이 용애가 나룰 재밌게 해 조쏘. 계속 함께 놀고 싶운데?”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제법 아기다운 말투로 나와 놀고 싶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이런 순간에도 짝다리를 짚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허락하지 않우면 가만있지 않게따. 알아소 판단하도록.”
어째서인지 협박도 추가됐지만.
“놀이?”
2황자의 잘생긴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뭐, 그래. 네겐 적당한 상대가 없었지. 필요하다면 적당한 놀이 친구를…….”
“이 용애가 좋다고 했다.”
“저 영애와는 나이 차가 너무 크지 않나?”
“내 정신족 연령을 고료하면 딱이다.”
“고료가 아니라 고려겠지. 그런데 지금 그 말은 에스테 영애가 정신 연령이 낮다는 건가, 아니면 네 정신 연령이 높다는 얘길 하려는 거냐?”
“둘 다다!”
……예? 나는 입을 벌렸다.
‘어째서 왜 나를 욕하시는 거지요?’
아기 황녀님은 당당했다.
“이 뇽애는 머리가 조금 아푼 것 같지만 착해따. 나는 함께 놀고 싶어!”
저 믿음직스러운 시선, 나만 믿으라는 얼굴임이 틀림없었다. 좋은 일인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냐, 좋게 생각하자. 좋은 게 좋은 거지.
“에스테 영애가 정신적인 부분에서 불편함을 겪고 있단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연령이 꽤 맞았나 보군.”
잠시 중얼거리던 2황자는 곧 고개를 들어 나를 향했다.
“우선 이쪽과 이야기를 나눠 볼 테니, 넌 그만 돌아가도록.”
“실다면?”
“부황께서 이리로 오실 거다.”
말 끝나기 무섭게 아기 황녀님이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졌다. 저기요, 황녀님?
“궁으로 도라가면 되게찌? 부르기만 해 바. 널 저주할 거다!”
“저주해도 좋으니 내 그림자 기사와 함께 가도록.”
“실타고 말해따.”
“정 그렇다면 부황을 소환할까?”
팽팽한 대립 속에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놀랍게도 아기 황녀님이 먼저 물러났다. 그것도 몹시 화난 표정으로.
“……대려와라.”
황녀님의 명이 떨어지자 어둠 속에서 기사 하나가 휙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