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2)
“저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다고 하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병으로 인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건 알고 계실 테지요.”
“그래서?”
“사실 지금은 건강해졌지만 저는 여전히 시한부이고,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건강 수치가 0이 되면 죽지.
“제 아버지, 에스테 백작은 저를 살리기 위해 신전에 달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친은 절박한 심정에 전 재산을 거셨지요.”
“…….”
“그리고 끝끝내 거부당했습니다.”
내가 막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 세계가 대체 어떤 소설 안인지 몰라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동안 우연히 하녀들이 속닥거리는 걸 들었다.
“정말이지, 신전이 너무했어……. 전 재산을 들고 가서 빌었는데 백작님에게만 열어 주지 않았잖아.”
“아무래도 아가씨를 치료하다가 가세가 기울었으니까…….”
그때야 이 집안 사람들이 날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은 똑똑히 남아 있다. 그때까지 절망에 빠져 있던 내가, 그 말을 들은 뒤로 이곳에 적응해 좀 더 잘살아 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전환점일지도.
“아, 그런 사실이…… 있었죠?”
뭐야, 알고 있었냐! 나는 발끈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워낙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라……. 그래, 그랬었죠. 흐음.”
눈을 깜빡이는 황태자 표정이 정말로 잊고 있었다는 듯했으니까.
“……저희 에스테가가 온실을 수호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중앙에 걸맞은 가문이 아니라는 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닙니다.”
그렇게 답하면 우리 아빠는 뭐가 되냐.
“미리 말씀 드리건대 이 병은 신전도 못 고칩니다.”
“그런 병이…….”
“정말 제 아버지가 신관을 못 불렀을까요?”
하녀들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신전 앞에서 모욕적으로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후 파올로에게 직접 확인한 적이 있다.
그때 파올로의 대답은 이랬다. 그래도 신관 정도는 봤었다고.
“아버지는 못난 딸을 둔 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바치고도 병 하나 고치지 못한다는 험담이나 들으셨죠. 그래서 얼마 전까지 저는 생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여기가 어떤 소설인지 몰라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더라고.
“그러다 래빗 황녀님을 만나고서 저는 생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바라는 건 그분의 행복, 이것 말고는 없습니다.”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믿든가 말든가. 해명이니 논리니,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것 같은 인물 앞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황녀님이 왜 제게 마음을 여셨을까, 2황자님도 3황자님도 참 궁금해하시던데.”
나는 칼을 흘끗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황녀님 인생에 이토록 절박한 진심으로 다가간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요?”
그 많은 이들 중 오직 나만 가능했다는 건, 결국 래빗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던 것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뿐이었다는 소리 아니냐고.
내내 방치해 두었던 너희가 아니라.
황태자는 모욕을 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지금 제게 이러시는 걸 황녀님께서는 알고 계실까요?”
지나친 긴장으로 토기가 치밀었다. 황태자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제 두 번째로 뵈었지만 참 재밌는 분입니다, 전하.”
나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멋대로 방치한 주제에 이제 와 황녀님이 정말 위험해지니까 나서는 모습을 정녕 황녀님이 원하실까요?”
“이런, 건방진…….”
“네, 건방집니다. 당장 1분 뒤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말과 함께 목에 겨눠진 검을 확 잡았다.
아야야야! 미친! 잘못 잡았어! 날이 미치도록 예리했다. 하기야 황태자가 쓰는 검인데 당연하잖아.
바닥으로 뚝뚝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다 해야, 죽어서도 억울하진 않지 않겠습니까?”
“…….”
“죽여 보세요.”
“…….”
“죽이시라 했습니다.”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래빗을 지킬 때 입은 상처들은 하나도 안 아팠는데 이건 좀 아팠다.
[출혈이 깊습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º·(˚ ˃̣̣̥⌓˂̣̣̥ )‧º·˚ !! 현재 건강 수치: 39]
“저 달린 에스테, 생명을 걸고 단언컨대, 황태자 전하께서 절 죽이시면 평생 황녀님의 미소를 보시지 못할 겁니다.”
“고작?”
응, 고작. 나는 싱긋 웃었다.
“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겠지요.”
네겐 ‘고작’이 아니잖아?
“절 좋아하시는 황녀님께서는 결코 전하를 용서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왜 황태자가 래빗에게 다신 보지 말자는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다.
저 눈동자 속에 박힌 초조함.
“……재밌군요.”
시선이 교차했다.
“내 여동생은 고작 세 살입니다.”
“이미 그냥 세 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
“어린 시절에 새겨진 어떤 원한은 평생 가기도 하지요. 그것이 태어나 내내 외롭게 자라셨던 황녀님 인생의 첫 친구라면 어떨지.”
어째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던져 놓은 기분이 드는데. 이미 늦은 뒤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로판 고인물의 직감이 말했다.
지금 이 대응이, 증거 하나 없이 단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날 제거하고 보자는 여동생 미친놈에게는 딱이라고.
“그렇네요, 영애. 인정하겠습니다.”
황태자의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스몄다. 미약하지만 온기마저 살짝 느껴졌다.
“협박이 꽤 매서웠습니다. 아마 어린 시절 들었던 부친의 꾸지람 이후로 가장 무서운, 아니, 솔직히 더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고개를 드니 황태자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죽일 듯 노려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미친. 육아물 오빠들은 진짜 이렇게 눈이 돌아 있냐?
하지만 과거에 이 소설을 좋아하고 즐겨 읽은 건 다름 아닌 나였는걸.
이 세계는 정말 빙의자가 살기에 아주 좋지 않았다. 까딱하면 여동생에게 미쳐 버린 오빠에게 썰리는 배드 엔딩이 도사리고 있다니!
[이 거지↗ 같은↘ 세계에 버려지다니! 요정이 빙의자 님을 대신해서 외쳤어요! *(*´∀`*)☆]
시끄러워!
그랬다. 여긴 보통 사람이 버티기엔 너무 무서운 세상이었던 거다.
“아, 정말로 재밌었습니다. 영애.”
“…….”
“미리 해명하는데, 사실 나도 죽일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여동생이 생각 이상으로 영애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금 댁 눈에 아쉽다고 대놓고 쓰여 있거든?
거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를 상대로 질투까지 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빙의물 클리셰처럼 원작 남주에게 접근해서 원작 여주의 질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여동생이랑 좀 친하다는 이유로 육아물 오빠에게 받는 질투라니!
“내 여동생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니 말이에요. 그게 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리 내어 웃던 황태자의 눈이 순식간에 씁쓸하게 물들었다. 기묘한 눈이었다. 애정과 의심이 동시에 깃든 눈.
“하긴 그 앨 평생 보지 않으려 했던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합니다.”
평생? 나는 입을 달싹였다.
“아, 이상해 보입니까?”
내 시선을 알아차린 황태자가 낮게 웃었다. 동시에 목을 잠근 단추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풀고 느슨해지도록 옷깃을 헤쳤다.
“영애가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낮에 그 애에게 한 행동을 봤을 테니.”
분명 이해할 수는 없긴 했지.
[퀘스트(연계) - ‘뭐야, 돌려줘요, 내 목숨!’이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9 오릅니다! (❁◝(⁰▿⁰)◜❁)*✲゚* 현재 건강 수치: 48]
요란한 알림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애는 더 큰 사랑을 주기 위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본 적 있습니까?”
황태자는 칼끝에 다친 상처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서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서브 퀘스트(연계) - ‘황태자는 왜 신전에게 콩밥을 주고 싶을까!’
축하합니다! 무시무시한 황태자의 살해 협박에서 벗어난 당신!
당신은 황태자가 숨겨 온 진실을 알게 됩니다. 황태자는 아기 황녀님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동시에 의심합니다!
내용: ‘황태자(첫째 오빠)’가 왜 ‘주인공(아기 황녀)’을 의심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세요.
실패 시: 건강 수치 -7
기한: 3일
※본 퀘스트는 ‘엑스트라 악역의 계획을 저지하자!’, ‘뭐야, 돌려줘요, 내 목숨!’과 연계되는 퀘스트입니다! ]
“신전, 참 지긋지긋한 족속들이지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의심하게 할 만큼.”
황태자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이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듯했다.
대신 나를 보며 사무적인 투로 물었다.
“그만 돌아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