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3)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일 생각은 없다고 했는데, 기억 못 하십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이 거짓말쟁이 육아물 오빠야. 고개 갸웃하지도 말고! 연기인 거 다 알고 있거든?
[헉, 지혈이 필요해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47]
나는 그제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내려다봤다.
“에고고, 아프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곧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흐음, 무식하게도 잡았네요, 영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저는 검을 쥐어 보지 못한 연약한 영애입니다, 전하.”
“정말 가녀린 영애라면 보통은 그렇게 말을 하지 않죠.”
황태자가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감으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지혈은 대충이나마 해 두었지만 저택에 도착해서 치료를 제대로 받으세요, 영애.”
“……치료요?”
드디어 집으로 가는 건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들어 올렸다.
“외람되지만, 제가 의심스럽다면서 어찌 이 상황에도 정중하게 말을 높이셨나요?”
“아, 말이라도 높이지 않으면 당장 사람을 죽이곤 해서 말입니다.”
……예?
“사람이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대를 존중해야겠다는 의지를 매번 다지게 되더군요.”
하아,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참 멀고도 험하게 느껴지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집에서 치료라니, 큰일 났다. 부모님이고 하녀들이고 난리가 나겠는데.
[퀘스트 ‘뭐야, 돌려줘요, 내 목숨!’의 보상으로 ‘‘주인공(아기 황녀)’과 관련한 새로운 영혼에 대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위 아이템은 빙의자 님이 원하실 때 주어집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주연 ‘황태자’가 빙의자 님에게 약간의 호감을 가져요! ٩(。•ω•。)و]
황태자의 호감이라.
하지만 일전의 2황자 때처럼 ‘나만의 로판’ 어쩌고 하는 메시지는 안 뜨네?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2)’가 종료되었습니다!]
[지연되었던 상태 이상 [멀미]에 돌입합니다! ※남은 시간: 04:59]
“윽.”
어느새 각성제 스킬이 끝났다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손수건이 감긴 손과 함께 황태자의 여유로운 얼굴이 보였다.
‘5분 남았어.’
그래, 다친 건 다친 거고, 메인 퀘스트는 깨야지.
호감도도 오른 김에 이 사람이 래빗과 가까워질 수 있게 뭐든 대화를 해 보자.
“전하. 마차는 이대로 저희 저택에 가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왜, 또 다른 숲으로 데려갈까 걱정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걱정이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말문을 연 건 아니지만요. 속으로 푹 한숨을 쉰 난 눈을 깜빡였다.
“참, 갑작스럽지만 제안 하나 드려도 될까요?”
“듣겠습니다.”
“전하께 래빗 황녀님이랑 친해질 방법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황태자의 미소 위로 의심과 의아함이 스쳤다.
“신기하군요. 영애를 죽이려 했던 자를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저는 황녀님께서 가족들과 더 가까워지시길 바랍니다. 비록 제겐 오늘과 같은 행동을 하셨으나, 이 또한 황녀님을 향한 애정이라 느꼈는데…… 불편하실까요?”
그의 침묵에서 여전히 의심이 느껴졌다. 지금은 한 발 물러날 때인가?
“싫으시면 말…….”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여유롭던 남자의 말투가 미묘하게 빨라졌다. 그래, 너도 의심은 가지만 거절하기는 싫지?
멀미가 오기 전에 대화를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오늘 절 죽이시진 않았지만 전하께선 여전히 제가 의심스러우실 테죠.”
“그렇지요?”
뭐, 무려 목숨까지 걸린 퀘스트를 해결하는 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화나진 않았다. 모두 이해범위 내였으니까.
난 손으로 툭툭 내 가슴께를 두드렸다.
“그럼 앞으로 옆에서 감시하세요. 저택까지 감시해도 좋아요.”
“제가 그렇게 한가해 보였습니까?”
“물론 제국 그 누구보다 나라를 생각하시느라 바쁘시겠으나, 그것들이 혹 황녀님보다 중요한가요?”
“전혀요.”
대답 한번 시원하시네.
“그럼 황녀님의 거처에 오시는 건 어떨까요?”
황태자의 얼굴로 갈등이 스쳤다.
표정을 숨기는 게 익숙해 보였건만 내 눈에 보일 정도면 어지간히 동요했다는 소리.
“……좋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나는 놀란 기색을 속으로 꾹 눌러 삼켰다.
“더는 외면만 할 때가 아니니.”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의 두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영애가 대체 어떻게 내 여동생을 꼬셨나 궁금하기도 한 참이니, 좋은 기회라 생각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신관의 습격이 있었으니, 오랜만에 호위 기사 노릇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외람된 질문인데 호위 기사를 해 보셨나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호위를 한 적이 있지요.”
보통 육아물들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가 일찍 죽는다. 이 소설도 그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내 옆얼굴로 뚫어질 듯한 시선이 와 닿았지만 외면한 채로 한참을 창문을 응시했다.
그립고 그리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 * *
“으욱…….”
마차에서 내려오자마자 거의 쓰러질 뻔했다.
다행히 나를 잡아 주는 손길 덕분에 차가운 바닥에 나뒹구는 꼴만은 면했다.
“그러게 토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황실, 의, 마차에 토할 수는, 우우욱!”
“괜찮아요. 개들이 많이 토합니다.”
개? 무슨 개?
“술 마신 개들 말이죠.”
아, 그 개……. 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마차 문을 잡은 채 욱욱 바닥에 대고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헛구역질인 건지 나오는 건 없었다. 다행히 이 세계가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지켜줄 모양이다.
이건 상태 이상 ‘멀미’의 후유증이었다. 하필 마차 안에서 시작됐는데, 진짜 딱 죽는 줄 알았다.
아픈 것과는 좀 달랐다. 미치도록 어지럽고 땅이 울렁거리다 나를 향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황태자가 ‘지금까지 잘만 있다가 왜 이제 와 멀미를?’ 하고 쳐다보는 얼굴이 참 볼 만했다.
처음엔 당황하더니 곧 익숙해져서는 구토를 독려하기도 했다. 내려서는 인간적인 측은함이라도 들었는지 마차에서 내리는 걸 잡아 주기도 했는데.
정말이지 사람을 향한 최소한 도의 그 이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다.
“그래서 이건 언제까지 이어지는 건가요?”
“그건, 욱, 우웁, 저도 잘…….”
상태 이상 ‘멀미’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문제는 사라지고 나서도 후유증이 남아 있단 점이었지.
으윽, 각성제 스킬 좀 다시 켜 줘. 쿨타임 좀 줄여 달라고…….
“흐음, 영애, 내가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 시간은 금이에요. 그냥 토해도 특별히 봐 드릴게요.”
“……맘, 대로 되면 좋겠네요…….”
“음, 이러고 있는 것도 시간 낭비인데 그냥 사람을 부르면…….”
“아, 안 돼요! 우욱!”
이 상태로 집으로 들어갔다간 분명 꼼짝없이 사흘은 집에 갇혀 있게 될 거다.
“뭐 하는 거지, 지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렸다. 심호흡 때문에 조금 가라앉은 상태였다.
밤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선 내 취향의 남자가 보였다.
……2황자가 왜 우리 집 앞에 서 있지?
“어라, 라이칸.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형님.”
2황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았다.
“업무를 보러 가신다던 형님이 대체 왜 이 시간에 에스테 영애와 함께 이곳에 계신 겁니까?”
“데려다주고 있었지.”
“그걸 물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 2황자가 한곳을 빤히 보는 것 같은데 아직 어지러워서 뭘 보는 건지 명확히 모르겠다.
웩. 나는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하고 나도 모르게 툭 고개를 떨궜다.
다음 순간, 손목에 차가운 무언가 닿았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내 몸을 부축했다.
“이 영애는 지금 상태가 왜 이럽니까?”
“멀미라는구나.”
“멀미면 고개를 아래로 향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흐음, 겪어 봤어야 말이지.”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마로 단단한 것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 부드럽긴 한데 좀 딱딱해서 살짝 불편한데.
나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2황자가 나를 부대 자루 마냥 달랑 들어 올린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나름 로맨틱한 소위 ‘공주님 안기’였는데 안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뭐 씹은 표정이어서야 로맨틱은 무슨, 낭만 따위 다 죽었다.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이런, 에스테 양은 아직 멀미 후유증이 낫지 않았을 텐데. 그러다 네게 토해도 난 모른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 영애와 친하셨습니까?”
“오늘부터라고 해 둘까.”
황태자의 입술은 끊임없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으나, 그의 눈은 열정이 사라진 연극배우처럼 식어 있었다.
“죽이려다 말았거든.”
황태자는 2황자가 있다고 해서 굳이 내숭 떨 생각은 없었는지 본색을 드러냈다.
“아까 미처 묻지 못했는데, 영애는 내 여동생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습니까?”
내 귀에는 ‘우리 유엘한테 수작 부리는 이유가 대체 뭐냐.’로 들리는데.
“아니면 나를 유엘의 곁에 둠으로써 얻는 것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