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0화 (60/281)

◈6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4)

“우욱…….”

대답하고 싶은데, 속이 울렁거린다고.

“나는 여전히 다치면서까지 내 여동생을 지켜야 할 이유가 그대에게 있는지 아직 의심스러워서 말입니다.”

“형님.”

“라이칸, 형님 말을 끊는 건 무슨 예법이지?”

끼어드려는 라이칸을 냉정하게 저지한 황태자가 이어서 말했다.

“영애가 진정 바라는 게 뭐죠?”

죽음의 위협 없이 좀 오래오래 편안히 살고 싶은 마음뿐인데요. 그러기 위해선 당신의 협조가 필요하고요…….

“후…… 제가 바라는 건 래빗 황녀님께서 가족들과 가까워지는 것 말곤 없어요.”

나는 겨우겨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픈 기억은 없는 쪽이 나았겠지만.”

쫓겨난 시녀들처럼 래빗을 괴롭히거나 험담을 하는 자들이 있었을 거다.

래빗은 모든 일을 스스로 잘 해결했지만, 사실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면 가장 좋았을 터다.

가족들마저 외면한 래빗에게 자신의 편은 없었을 테니까.

“저는 아파봤기에 외로움을 알아요. 물론 그건 래빗 황녀님이 느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겠지만, 그럼에도 황녀님을 이해하니까요.”

빙의자로서 전생자를 이해한다.

외로움, 막막함, 약간의 억울함.

특히나 나는 대뜸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 가며 원작에 가까워지도록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 것에 대한 억울함이 가장 컸다.

때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 퀘스트의 일부로써 진행해야 한다.

래빗이라고 이런 일들이 없었을까. 있겠지.

“흐음, 진실이로군요.”

“네?”

“영애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황태자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손을 펼쳤다. 손가락에 무언가 달랑 걸려 있었다.

보석 펜던트? 목걸이라기엔 줄이 짧은데.

저게 뭔데?

대답은 2황자가 했다.

“거짓을 판별하는 마법이 걸린 물건이다. 황족이라면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지.”

에엥?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게 있었어?

“그럼…… 황녀님도?”

“그 애에겐 없다.”

“맞아요, 우리 엘엘은 우리가 주는 건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황태자는 싱글 웃는 얼굴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 펜던트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마탑의 주인 ‘발데르’가 만들어 준 것이라고.

“참 이상하지요. 마탑주에게 직접 받아 온 물건인 만큼 고장 난 건 아닐 텐데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

……이쯤 되면 좀 믿어라, 믿어!

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2황자의 팔을 꾹 잡았다.

“뭐, 이렇게 된 이상 믿어 보겠습니다, 영애. 어차피 나나 라이칸을 속인 게 들통나거나, 당신으로 인해 우리 여동생이 티끌만큼이라도 다친다면 그대의 가문에 죄를 묻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쯤 되면 이쪽이 폭군 아닌가요? 저 눈 좀 봐, 나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눈인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쁘진 않다. 오히려 좋다. 유엘에게 이런 과보호 가족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육아물이니까.

다만 그게 지나쳐서 내 생명까지 위협하면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또 봅시다.”

황태자는 그대로 미련 없이 돌아갔다. 그가 머문 자리에서마저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세상에,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이 ‘히든 피스’를 찾았어요! ✧*.◟(๑>∀<๑)◞.*✧]

[※히든 피스 2. 예기치 못한 시련

달성 조건 - 주연인 ‘황실 사람’ 중 1명을 상대로 페널티가 ‘죽음’인 퀘스트를 성공할 것(2 / 2)

보상을 선택하세요!

1. 메인 퀘스트 - 황태자 호감도 +40 (※ 현재 호감도가 낮아 메인 퀘스트 조건인 90 이상 달성은 불가합니다)

2. 건강 수치 +15 증가 ]

난 미간을 슬쩍 찡그렸다. 멀미 후유증에 바로 읽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1번을 선택했다. 건강 수치야 다시 올리면 되지.

고개를 들자, 멀어지는 황태차의 마차가 보였다. 마차가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2황자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

“저, 2황자님. 마차가 가 버렸는데 어떻게 돌아가세요?”

“내가 뭘 타고 왔겠나?”

아, 생각해 보니 이 사람도 자기 마차를 타고 왔겠지?

“음, 네. 그렇네요, 하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준 건 감사한데 이제 좀 내려 주면 안 될까요. 둘만 남으니 뻘쭘해졌다.

이 남자의 마차가 어디에 있는 건지 몰라도 주변에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영애는 정말.”

“네?”

“아니, ……별일 없으면 됐다.”

“아, 네, 없었어요!”

너네 형이 으슥한 곳에서 날 죽여 매장하려 했던 것만 빼면 말이지?

“그래. 다행이군.”

2황자는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를 내려 주었다. 고맙긴 했지만 대체 왜 굳이 안아 든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인사를 올렸다.

“영애, 형님은 성격상 한시도 그 물건을 떼어 놓지 않으니 형님 앞에서는 거짓을 고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 아까 그 물건 말이군요. 그렇게 유용한가요?”

“나와 루이프의 것은 마탑의 다른 마법사가 만든 거지만 형님의 것만은 마탑주가 직접 만들었지. 갈취한 것에 가깝지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음? 좀 중요한 사실 같은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황태자에 대한 주의 사항은 나도 오늘 겪으며 뼈저리게 깨닫긴 했으니.

2황자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곧 손수건이 묶인 내 손을 발견하고는 찌푸렸다. 또 다쳤느냐는 질타였다.

“앞으로 영애는 이걸 지니고 있도록.”

“네? 이게 뭔가…… 황자님?”

2황자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는 그대로 휙 돌아섰다.

인사할 새도 없었다. 내가 본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멀리 멀어지는 2황자의 뒷모습뿐이었으니까.

손을 펴자, 자그만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이런 걸 왜?”

연한 하늘빛이 도는 펜던트였다. 신기하게도 투명하게 비치는 안쪽엔 붉은 장미가 보인다.

물속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꽃은, 아주 어여쁜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근데 이걸 어디에 쓰란 거지?’

고개를 돌리니 달빛 아래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흔들리는 하늘빛 머리카락이 꼭 달빛을 한 줌 베어 낸 것 같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잠시 빤히 보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문득 그가 홀로 말을 타고 달려 왔었다는 걸 깨달았다.

* * *

“2황자 전하랑 무슨 사이냐?”

콜록, 나는 차를 마시다 말고 거세게 기침했다.

“꺅, 아가씨!”

사레들린 나를 보고 놀란 베키가 문 앞에서 달려와서는 파올로를 삐죽 쳐다보았다.

“파올로 님, 아가씨는 차를 마시다 돌아가실 수도 있는 몸이라구요!”

“저, 베키, 사람이 콜록, 차를 마시다가, 켈록, 죽진 않…….”

“아가씨는 가능해요!”

여기에서도 날 갓 태어난 토끼로 보는구나. 익숙한 취급에 체념하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파올로는 사람 좋게 웃으며 베키에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 주의할게.”

베키는 여덟 살 때부터 이 저택에서 일한 하녀라 나도 파올로도 그녀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무례에 사과 드려요, 도련님. 그렇지만 조금만 주의해 주세요.”

“응응, 알지. 내가 잘못했네. 짚어 줘서 고마워. 하하.”

자리를 비켜 달라는 파올로의 말에 베키는 조금 불안한 표정을 했지만, 곧 인사를 올리고 문을 나섰다.

“그래서 뭔데. 2황자 전하랑은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는 무슨,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껴안고 있냐?”

“콜록!”

뭐야, 다 봤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오빠를 노려봤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어차피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아, 황태자가 나를 죽이려 했던 것만 빼놓고.

“허, 신관의 습격? 상황이 뭐 그렇게 공교롭게 됐다냐?”

“그치, 황태자 전하께서 의심할 만했어.”

파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의심이 풀렸다니 정말 다행인데…… 앞으로 너 좀 조심해야겠다.”

“조심이야 당연히 할 거지만, 뭔데? 뭐가 더 있는 얼굴인데?”

“음……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다 이야기해 줄게.”

“아니, 나 그런 예고장 같은 멘트 싫어해, 그냥 얘기해 줘.”

내가 작은 고구마도 못 견뎌서 베스트 댓글까지 먹어 본 독자라고, 빨리 내놔.

시선에 못 이긴 파올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황성 내에서도 신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본래 본궁 내 상주 신관이 따로 있거든? 최근 새에 그 숫자가 다섯에서 열다섯으로 늘었어.”

그건 좀 이상한데, 내가 중얼거리자 파올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늘의 습격으로 신전과 황실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은 틀림없으나, 사람 일이란 항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황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곳이니까. 암, 내 안위와 생명은 중요하지. 더 조심하자.

이렇게 말하는 파올로의 조언이 합당하다 여겨졌기에 나는 끄덕였다.

* * *

파올로가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약 2주 정도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메인 퀘스트의 남은 시간은 79일.

이 시간 동안 많은 일이라면 많은 일이, 또 동시에 작다면 작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이 중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이 래빗의 거처에 이전보다 사람이 더 늘었다는 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래빗은 몹시도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이와 별개로 새로 임명된 이 구역 시종장은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귀부인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엔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였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일 처리가 아주 깔끔했다.

래빗의 성향을 금세 파악해서 최소 인력을 최적화된 동선으로 배치하는 멋진 능력을 보여 주더라.

그럼에도 래빗의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원흉은 바로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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