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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2화 (62/281)

◈6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6)

난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며 래빗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어차피 이래도 래빗은 다 듣겠지만 기분의 문제랄까.

내 반문에 황태자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이런 걱정을 듣다니, 참으로 신선합니다.”

황태자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영애는 매번 색다른 대답을 해서 신기하긴 한데, 가끔 어디까지 무례해질 수 있는지 참 궁금하게 만드는군요.”

“죄송합니다.”

깝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는 눈을 깜빡였다.

저 남자가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눈은 호시탐탐 날 내쫓을 기회를 찾고 있단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매의 눈은 여전히 발동 중인 모양이다.

“유모님.”

“아, 네. 아니, 말하게.”

나는 얼른 시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래빗은 내 옆에 딱 붙어서 시종을 지그시 응시했다. 볼을 부풀린 게 하얀 찹쌀떡 같아 귀여웠지만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저는 황제 폐하의 시종입니다. 폐하께서 유모님을 부르셨습니다.”

“아, 지금 바로?”

“예. 지금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이 시간에 갑자기 나를 부른다고? 타이밍이 매우 공교로웠다.

하필 조금 전에 황제를 만나 보는 게 어떻냐고 래빗에게 말한 참인데, 이렇게 불려 가다니. 왜 내가 보러 가게 된 거냐고.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왜 그…….”

“안 돼요, 황녀님!”

지금 ‘그놈’이라 하시려 했죠! 내가 화들짝 놀라 말리자 래빗이 입을 삐죽이며 그대로 닫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흐아, 안 그러시기로 저랑 약속했잖아요…….”

“……아랐우니까 그로케 울먹이묘 보지 마로라.”

래빗이 끙, 난감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시종을 보는 눈은 꽤 매서웠다.

“랄린을 왜 데려가려눈 고지?”

“그,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폐하의 뜻이기에 저도 그건 자, 잘, 모르겠습니다…….”

래빗의 시선을 받은 시종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눈도 못 뜨고 벌벌 떠는 모습이 어째 래빗 얼굴을 보면 죽이겠다는 협박이라도 받은 양 죽도 못 쓰는 사람 같았다.

“황녀님, 우선 다녀올게요.”

어쨌거나 이 황실 최고 권력자의 명이니까.

“엘엘. 엘엘.”

황태자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내가 잡고 있던 래빗의 팔을 교묘하게 빼냈다. 이 상황에 뭘 하는 거지?

눈을 마주치자 빙긋 그의 눈이 휘어졌다. 와, 꺼지라는 시선인데.

황태자가 바로 래빗을 향했다.

“엘엘, 오빠도 울면 그렇게 봐 줄 거야?”

“꺼뎌.”

“이런이런.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래빗은 그러거나 말거나 귀찮게 하는 황태자를 평소처럼 눕혀 버리는 대신 나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음, 우리 황녀님이 사지에 아들을 보내는 엄마처럼 날 보고 계시네.

나는 황제를 주기적으로 알현했다. 유모로서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의무지 혹시 폭군이 딸바보 초입에 들어선 것 아닐까?

‘어느 유모가 주에 세 번씩 무려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하냐고.’

뭐. 황제가 극심한 입덕부정기를 겪고 있는지, 아니면 위엄이 몸을 지배해서 티가 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겉보기로는 전혀 딸바보 아빠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여동생 한정 온몸으로 주접을 떠는 저기 저 황태자와 비교하면 말이다.

“엘엘, 걱정되면 오빠가 같이 다녀올게.”

“머?”

“난 우리 엘엘 말은 너무너무 잘 듣는 오빠잖아? 부탁 하나 들어주면 알현을 다녀오는 동안 그 어떤 위험에서든 저 영애를 지켜줄게. 어때?”

“……뷰탁이 몬데?”

나는 말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오빠라고 불러 줘.”

굳이 막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래빗의 표정이 마구 찌푸려졌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고 콧잔등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곧 딸랑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앗, 안 돼, 잠시만. 딱 한 번만 오빠라고 불러 주기!”

“기갹.”

“딱 한 번만 불러 주면 폐하가 설사 영애를 죽이려고 해도 막아 줄 건데?”

“…….”

아니, 황제가 갑자기 날 왜 죽여?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다가 바로 정정했다. 아, 지난 번에 죽을 뻔한 적 있었지?

이 미친 육아물 세상.

“후우, 후…… 좋댜……. 대신 반두시 지쿄야 할 거야. 반두시.”

“암암, 어느 공주님 부탁인데. 물론이지!”

황태자와 래빗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끝에, 내가 안전하게 돌아오고 난 뒤에야 원하는 호칭으로 불러 주기로 합의를 봤다.

래빗은 내가 사지에 뛰어드는 것도, 전쟁에 나서는 것도 아니라는 내 간절한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랄린운, 돌부리에 걸려소 무릎이 부서질 수 있눈 슈하다. 각별한 주의룰 요한다.”

“그러니까 황녀님, 제 무릎은 도자기가 아니라고 스무 번째 말씀 드리는데요…….”

“……우리 랄린?”

“이바, 듣고 잇나?”

“아, 당연하지. 엘엘!”

저기, 황녀님. 황녀님의 말씀이 황태자를 더 자극한 것 같은데요.

이러다 황태자 손에 한 번 더 으슥한 곳에 끌려갔다 올 것 같아요.

아무튼 건강한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건지, 아니면 갓 태어난 사슴을 대상으로 한 건지 모를 기나긴 주의 사항이 끝나고서야 나는 황태자와 함께 출발할 수 있었다.

“길은 알고 있으니 넌 폐하께 먼저 가 보도록. 나도 함께 찾아뵌다고 아뢰어라.”

“네, 전하.”

황태자는 나를 데리러 왔던 시종을 먼저 보냈다.

래빗의 거처에 인접한 다른 궁들은 모두 비워 두었기에 복도는 한산하다 못해 나와 황태자를 빼곤 텅 비어 있었다.

“영애는 폐하께서 무엇 때문에 영애를 부르셨는지 짐작합니까?”

“어,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래빗이 없는 탓에 위험한 분위기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황태자가 다시 물었다.

“내가 착각한 겁니까? 마치 뭐 때문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순간 몹시 찔렸지만 난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사실 황제가 부른다고 한다면 용건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

[퀘스트(서브) - ‘폭군의 기분을 풀어 보자!’

등장인물(주연) ‘폭군 황제’의 기분이 심상치 않습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을 보지 못해 불만이 잔뜩 쌓인 상태!

이런 불만을 해소해 주세요!

내용: 1. ‘폭군 황제’에게 ‘주인공(아기 황녀)’ 관한 보고 올리기 (710)

2. ‘주인공(아기 황녀)’이 수가공한 물건을 황제에게 전달

보상: 건강 수치 +4, ‘폭군 황제’를 향한 ‘주인공(아기 황녀)’의 호감도 소폭 증가

※본 퀘스트는 반복 진행 가능합니다.]

사실 원작대로라면 이미 래빗과 폭군은 가까워지다 못해 황제가 싸고돌아도 모자랄 시점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폭군이 입덕부정기인가.’

이렇게 생각한 건 비단 폭군이 황태자처럼 얼굴까지 바꿔 가며 주접을 떨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본래 원작대로라면 오빠들이 여동생을 위해 보석이나 의상으로 방을 한 다섯 칸쯤 꽉 채울 때, 황제는 성 한 채나 영지를 통째로 하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아직 래빗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황녀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뿐이었다.

황태자가 부드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부친도 참 솔직하지 못하시지. 좋다고 말씀하시면 될 걸, 부끄러움도 많이 타시고 겁도 많지 않겠습니까.”

……네? 잘못 들었습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어, 아뇨. 잠깐 날벌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이런 나도 한때 래빗에게 다신 보지 않겠단 말을 했었는데요.”

“사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황태자는 대답하는 대신 웃을 뿐이었다. 더 묻지 말란 얼굴에 나는 슬쩍 물러났다.

“나는 영애가 내 동생들을 어떻게 꼬셨을까 궁금합니다.”

동생‘들’? 래빗 하나가 아니라?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음에도 황태자는 책잡지 않았다. 의외의 곳에서 무신경한 인물이었다.

뭔가 ‘네가 뭘 하든 족칠 기회만 얻으면 되니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의미인 것 같지만.

“루이프가 자꾸 수업을 빠지고 유엘과 영애가 있는 곳에 오고 싶어 했습니다.”

“3황자님께서는 황녀님을 아주 좋아하시니까요.”

“그렇다기엔 그 아인 영애도 꽤 좋아하더군요.”

황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루이프야 그렇다 치고, 라이칸은 대체 어떻게 꼬여냈습니까?”

“네?”

꼬신 적 없는데요. 이렇게 딱 잘라 말하기엔 황태자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나만큼이나 의심이 많고 경계심 또한 강한 동생인데 말입니다.”

본인이 의심이 많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구나.

“음,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감히 2황자님과 말문을 트게 된 건 예전에 그분께 큰 실수를 했기 때문이에요…….”

“실수를 했는데 살려 뒀다? 잘 알겠습니다. 그 애가 좋아하는 취향이 영애 같은 사람이었던 거군요.”

“저, 얘기가 왜 그렇게 되나요? 일단 해명을 들어…….”

“그 애가 아름다운 것에 시선을 빼앗길 줄도 아는 녀석이었다니 놀랍습니다.”

저,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지? 그리고 그런 살벌한 눈으로 품평하듯 말하면 칭찬도 칭찬같이 안 들린다고.

“어쨌든 둘 다 한동안 유엘의 거처에 오기 힘들 겁니다. 영애로서는 편들어 줄 아군이 사라지는 셈인데, 아쉽습니까?”

“딱히 한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감히요. 그런데 두 분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라이칸은 날 대신해서 열심히 구르는 중입니다.”

아, 어쩐지. 엄청 바쁘다던 황태자가 매일같이 잘도 황녀 거처에 출근한다 싶었더니. 대타를 던져 주고 왔구나.

내가 황태자에게 래빗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 것 때문에 애꿎은 2황자가 구르는 중이라니 조금 미안해졌다.

황태자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루이프는 수업 중이죠. 사실 루이프는 수업이 더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마탑주에게 배우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요.”

마탑주. 어째 여기저기서 은근히 많이 듣게 되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맨 처음 골랐던 내 취향의 초상화 중에서도 있었지?

나는 슬쩍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주연들이 나타나면 반짝거리는 팔찌. 황태자가 곁에 있는 탓에 빛을 띠고 있었다.

“네가 고른 초상화에 마탑주님도 있고 공작님도 있어서 조금 놀랐어.”

어쩌면 마탑주는 높은 확률로 다른 소설의 남자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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