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7)
하지만 아직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말끔히 생각을 지워 버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3황자님의 재능쯤 되면 무려 마탑의 주인께 직접 배우시는군요. 멋져요.”
“마탑주가 그리 성실한 인물은 아니지만……. 나쁠 건 없겠죠. 신전의 힘에 대항하는데 가장 좋은 건 마법이니까요.”
신전이란 단어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건 내 착각이 아닌 듯했다.
자연스레 나는 2주 전 있었던 신관 론도의 습격을 떠올렸다.
그 조무래기 악역은 그날 황태자가 달랑 들어서 데려갔었는데, 결과적으로 황실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쥐새끼처럼 그렇게 꼬리를 뺄 줄 알았으면…… 증거라도 조작해둘 걸 그랬네요.”
“……전하, 복도입니다.”
“기척 정도는 잘 느낀답니다, 영애.”
무려 황녀 납치 기도라는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신전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끝났다.
신전 측에서 론도가 이미 몇 년 전 파문된 신관임을 증빙하는 서류를 보내 왔기 때문이다.
신성을 향한 동경이 지나친 나머지 얼마 전 신전의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고도 증언했다.
결국 그 일은 파문 신관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단다.
신전은 자신들이 비록 파문 신관과는 무관하나,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히고, 신성력이 뛰어난 고위 신관을 황실에 파견해 항시 치료 능력을 쓸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황제는 이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날로 황성에서 신관을 모두 내쫓으려 했지만 결론적으로 잘 되진 않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폭군이었으나 상대는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신전이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신전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더 크던데.’
고위 신관은 잘린 다리와 팔도 붙이는 대단한 자들로, 그 수가 지극히 적어서 대륙의 각국에서 앞다퉈 모셔 가려고 하는 특급 VIP들이었다.
성내에 상주하는 신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인간 트로피나 다름없었고,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기에 대신들을 비롯한 귀족들이 은근히 신관 파견에 찬성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폭군이 괜히 폭군이라 불리는 게 아니어서, 듣기로는 신전과의 회담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잘 이용해 고위 신관 셋이 올 걸 하나로 줄였다나.
하나 온다는 고위 신관마저도 아기 황녀님을 해치지 못하도록 마탑주가 직접 제약 마법을 걸기로 하고서야 파견을 허했다.
더군다나 북쪽에서 경계를 지키던 대공까지 불러들이기까지 했다고.
‘북부 대공이라니.’
온다, 와. 남주의 향기, 남주의 촉……. 이 사람도 다음 소설 남주인 거 아냐?
아무튼 이런 이유로 2주간 황성의 경계는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파올로도 요즘 거의 매일 야근이었고, 부친인 백작도 황성에 들어가면 살 떨리는 기분이라고 푸념했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끼이익-
마침내 알현실 앞에 다다랐다. 큰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쳐다보며 걷다가 어느 한 자리에 멈춰 섰다. 이미 여섯 번이나 방문한 뒤라 이젠 지정된 위치를 찾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고개를 들라.”
눈을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폭군 황제의 모습과 그의 뒤로 펼쳐진 거대한 휘장이 보였다.
새하얀 장미 네 송이와 새빨간 장미 하나, 날개와 심장, 그리고 매까지. 모두 비센 제국의 문장을 구성하는 것들이었다.
“창공의 날개에 안식의 숨결을. 위대한 날개는…….”
“됐다.”
언제나처럼 혹한의 겨울같이 냉랭하고 위엄이 흘러넘치다 못해 무서운 태도였다. 나는 머쓱해진 입술을 닫고 얌전히 눈을 깔았다.
내가 도착한 이곳은 이따금 집무실을 겸하기도 해 소파를 비치해 두고 있었다. 앉으라는 말에 난 가까운 의자에 착석했다.
소파 상석에 앉은 폭군 황제가 황태자를 보고는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저도 인사드릴까요, 폐하?”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하는 표정이었다.
“온다는 얘기는 들었다. 한데 너는 여기 왜 온 거지?”
“저도 마침 유엘의 거처에 함께 있었습니다. 제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영애와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어요?”
“…….”
“오, 그것도 조그만 손을 이렇게 모으면서. 이렇게.”
황태자가 양손을 모아서 래빗의 흉내를 냈다. 그러더니 빙긋 웃었다.
“아, 아버지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시죠?”
황태자가 부드럽게 싱글싱글 웃었다.
내가 대신 사색이 됐다. 미친,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설마 지금 약 올린 거야?
“어이쿠, 아버지. 저런 걸 맞으면 아무리 저라도 머리통이 날아갈 겁니다.”
“애석한 일이군.”
나는 얼른 귀를 막았다. 쨍그랑,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 봤어, 도자기에 푸른 빛이 흘렀다고! 누가 도자기에 마나를 실어서 던지냐고!
그런데 던진 폭군도 가볍게 피한 황태자도 몹시 태연한 얼굴들이었다.
“나라에 황자가 셋이나 되니 하나 정도는 없어지더라도 문제없겠지.”
“하하하, 아버지 농담도.”
여러분, 그런 살벌한 대화는 제발 제가 없을 때 하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 부자간의 정겨운 대화도 좋지만 여기 있는 에스테 영애가 소외되는 것이 가슴 아프니 제가 뒤로 물러나 있겠습니다.”
“…….”
“아, 그리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시지.”
폭군은 대답 대신 도자기를 하나 더 집어던졌다. 분노가 가득했다.
“못난 놈, 세 치 혀를 조심하라 그리 말했거늘.”
그러니까 당신들 왜 싸우는 건데.
일단 내가 보기에 황태자가 필요 이상으로 부친 속을 긁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고.
나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 사태가 얼른 끝나길 빌었다.
“에스테 영애.”
“네, 폐하.”
마침내 평소의 냉랭한 표정으로 완전히 돌아온 폭군 황제가 드디어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평소처럼 보고만 하면 되는 건가 싶었는데, 다음 말이 들려오질 않았다.
“황녀는 잘 지내는가.”
한참이 지나고서야 황제가 평소처럼 질문을 던졌다.
“네, 폐하. 오늘도 아침과 점심을 거르지 않고 건강한 식단에 맞춰 잘 드셨고, 옷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으셨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여전한가.”
“네, 폐하. 여전히 육류 위주의 식단을 좋아하시고 채소는 거르지는 않으시지만 대체로 풀 같다고 약간의 거부감을 보이십니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편이었지.
래빗이 전생에 정복 전쟁을 나섰다가 보급 문제로 물자가 부족해지면, 고기 없이 끓인 희멀건한 죽을 먹거나 풀뿌리를 캐서 먹기도 했단다. 하도 지겹게 먹어서 꼴도 보기 싫다나.
“편식이라.”
“……그, 주방에 야채를 더 올리라 전할까요?”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
폭군은 더없이 단호한 표정이었다.
이외에도 폭군은 래빗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대개 래빗의 호불호를 묻는 것이었다.
정말 이런 것까지 묻나 싶은 질문까지 황제는 다양한 것을 물었다.
“보고는 여기까지 하지.”
“예, 폐하.”
[퀘스트(서브) - ‘폭군의 기분을 풀어 보자!’의 조건을 달성했어요! (810)]
퀘스트 때문에 몇 차례 접하며 느낀 거지만,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때조차도 황제에게서는 상당한 압력이 느껴졌다.
래빗은 이를 두고 강자가 아무리 숨겨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기운이라 표현했다.
내가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운을 예전보다 더 예민하게 잡아내게 되기도 했고.
‘이건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 때문인가?’
생존에 관한 눈치를 올려주다 보니, 황제를 가장 처음 알현했을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이 시간에 영애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를 묻기 위함이다.”
“네, 폐하.”
아. 그제야 난 깨달았다.
오늘따라 이 방에 기사가 꽤 많다는 걸.
‘왜?’
평소에 기사가 둘 정도 있거나 아예 없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게다가 다들 출정을 앞두고 있거나 죄인을 호송할 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표정이 살벌했다.
……불안한데.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최근 주변에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나?”
“수상한, 사람 말씀입니까? 그, 제 기억에는 없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최근 2주 치 기억을 싹 뒤져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황태자가 있었다면 이상한 사람쯤은 쉽사리 눈치를 챘겠지만 아무리 그라도 래빗의 처소에 온종일 있다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수상한 사람이 있었으면 나보다는 래빗이 더 잘 알았을 텐데?’
“그, 암살자 같은 이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보다는 황녀님이 더 잘 아셨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 보지 못했나?”
“그런 자들도 저보다는 황녀님이 더 잘…….”
그러자 폭군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냉정한 얼굴에 ‘도대체 넌 세 살인 내 딸보다 잘하는 게 뭐냐.’는 표정이 보인 것도 같다.
아니,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 우리 래빗이 너무 유능하고, 또 유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