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4화 (64/281)

◈6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8)

“저, 감히 여쭙건대,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웬만하면 폭군 황제에게 질문 같은 걸 하진 않겠지만 경직된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내 안에서 직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게 만약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의 효과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난 죽기 싫다고.

“신전에서 침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저, 폐하. 그…….”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아마도 보좌처럼 보이는 이가 고개를 들었다가, 황제의 매서운 시선에 얼른 시선을 내렸다.

아마 보좌관은 황제를 향해 ‘영애에게 말하면 안 된다.’ 뭐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설마 나 지금 또 의심받고 있는 건가. 그치, 그런 거 같지?

따끔따끔한 시선이 이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아니, 나 진짜 속상하다고. 대체 언제까지 의심받아야 하는 건데.

난 그냥 생존만 하고 싶다고!

“그럼 지금은…….”

“증거가 없지. 연루된 이들은 싹 죽거나 자살했고, 배후로 지목되었던 귀족은 의문사했다.”

어쨌거나 래빗에게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관련자까지 싹 다 제거됐단 얘기다.

신전이라 밝힐 연결고리도 없어진 듯하고.

“하지만 관계자가 모두 죽었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 그래서 영애에게 물은 것이다.”

“아…….”

나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의심스러우시겠군요.”

그러자 황제를 제외한 주변의 몇몇 이들이 움찔했다.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짐의 측근들은 생각이 다른가 보더군.”

“…….”

황제가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이쪽을 보았다.

심해처럼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정말로 의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관심에 가까운 태연함이었다.

“짐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영애에게 혐의를 씌울 만한 물증은 물론 정황도 없지. 정녕 영애가 관계자라면 심문한 뒤 죽여 없애면 될 일.”

무감한 목소리가 귀에 푹 꽂혔다.

아니, 그런 협박성 발언은 그냥 생각만 하고 말로는 안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안 되겠지.

난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애의 협조가 필요하겠지. 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을 터.”

“……네, 이해했습니다.”

신전은 이 소설의 메인 악역인 만큼 론도라는 조무래기를 파견한 걸로 그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애초에 론도에 관한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였다.

‘거기다 황태자의 의심을 푸는 퀘스트로 연결됐고.’

황태자가 래빗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이유에도 분명 ‘신전’이 있었을 거다.

“제 결백함은 앞으로 직접 증명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폭군 황제는 아주 잠시지만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다는군.”

차가운 목소리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흐음, 말씀 끝나셨다면 한마디 얹어도 되겠습니까?”

소파에 흔들림이 느껴져서 옆쪽을 바라보니, 뒤로 물러나 있겠다던 황태자가 우아하게 착석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에스테 영애의 편을 드는 게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쪽은 결백할 겁니다, 폐하.”

“근거는?”

“제가 감시했습니다. 2주간 내내 이 영애의 24시간을.”

……스토킹했다는 말씀을 아주 당당히도 하시네요?

그러나 난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정 의심 가면 사람을 붙이라고 했던 건 나였다.

“제 그림자가 출퇴근은 물론 한시도 빼놓지 않고 감시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아니 유엘의 표현을 빌리자면 갓 태어난 사슴 같은 ‘병약한’ 영애더군요.”

그 말씀은 좀 빼주시면 안 될까요.

“황태자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보좌관이 다시 한번 발언을 시도했다. 황태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해 보게.”

“에스테 영애가 저택으로 돌아간 뒤 저택 내부에 있을 때조차 감시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오, 그럼 내 그림자들이 그 정도도 침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부하들이 들으면 울겠군.”

“…….”

남의 저택에 위장 잠입했다는 소리를 이렇게 듣고 싶진 않지만, 황제의 보좌관은 말꼬리를 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당연하게도 보좌관이 하고 싶은 말은 황태자에게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닌 나를 의심한다는 말일 거다.

“그대들이 신전을 경계하고 어떻게든 에스테 영애를 잡아 심문하여 진실을 밝히고 싶은 충정, 몹시도 이해한다. 한데, 그것이…….”

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를 향해 발톱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면 안 되지.”

저 분노가 향한 곳이 내가 아님에도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 털썩 쓰러졌다.

“내가 지금 에스테 영애는 아니라고 하지 않나.”

집채만 한 짐승이 바로 옆에서 털을 곤두세우고 달려드는 것 같은 살벌한 기운.

“끄읍…….”

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전까지 발언하던 보좌관의 뺨으로 핏줄기가 흘렀다.

황태자는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빙긋 웃었다.

“멍청하게도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보좌는 벌벌 떠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보좌관의 사과와 함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만.”

황제의 말에 소파 옆에서 느껴지던 살벌한 기운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분위기야 어쨌든 지금 황태자가 내 편을 들어 준 것만은 분명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죄송합니다, 폐하. 감히 폐하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려던 것은 아니지만, 유엘의 부탁이 있어서 말입니다.”

“…….”

“어떤 위험으로부터든 영애를 꼭 지켜 달라고 두 손 모아 부탁하는데, 오빠로서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선을 넘지 마라. 슈리안.”

“선이라, 어떤 선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황태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고는 슬쩍 시선을 옮겼다.

“아, 평생 유엘을 볼 생각 말라는 그 명령인가요? 신전이 무서워 딸을 의심하는 그 명령?”

한순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흡, 숨을 들이켰다. 황태자가 보좌관을 압박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압박감이었다.

“입조심하란 내 말이 우습더냐?”

“폐하의 말씀은 언제나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용기 또한 폐하의 가르침이셨지요.”

“…….”

“아, 저 또한 의심하고 있었으니,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과연 이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버지, 우린 가족이란 사실을 너무 망각한 게 아닙니까?”

쨍그랑.

미처 눈으로 보지도 못했다.

그저 툭툭 튄 도자기 가루가 내 손에 떨어지고서야 알았다. 황태자가 도자기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황태자가 일어나 고개를 털었다. 황제는 이는 보지도 않은 채 내 쪽을 응시했다.

“영애는 그만 가 봐도 좋다.”

“……예, 폐하.”

나는 잽싸게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 지옥에서 탈출시켜 주셔서.

분명 황태자가 이러는 이유가 곧 밝혀질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전에 새우등이 먼저 터질 것 같았다.

‘신전.’

그 단어를 되새기고 고개를 숙었다.

“아, 그, 외람되오나 폐하.”

돌아가기 직전 나는 머뭇거리며 슬쩍 돌아섰다.

황제와 막 핏줄기를 닦으며 다가가던 황태자를 비롯해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말하라.”

나는 피 흘리는 황태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황제를 쳐다봤다.

그리고 재빨리 드레스 자락을 뒤져 풍성한 치맛자락 사이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던 주머니 하나를 찾아, 주섬주섬 들어 올렸다.

난 눈치를 보며 복주머니처럼 생긴 주머니 입구를 벌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이것’을 황제를 향해 공손히 내밀었다.

내가 이걸 만들려고 얼마나 래빗에게 조르고 애원했던지. 지난날의 노력이 새록새록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엇이지?”

“꽃입니다.”

“꽃?”

황제 폐하의 잘생긴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음, 내가 봐도 좀 처참하게 생기긴 했지. 꽃이 아니라 빨간 종이 뭉치로 보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건 엄연한 꽃이란 말이지.

그것도.

“황녀님께서 직접 만드신 종이꽃입니다.”

나를 보는 폭군 황제의 눈에 살벌한 노기가 스쳤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걸 내게 자랑하겠다는 건가?”

“아, 아뇨, 아닙니다! 이건 황녀님께서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뭐?”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잔뜩 일그러져 있던 폭군 황제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짐이 헛소릴 들었나?”

“그으, 아닙니다……. 정말 황녀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종이꽃입니다.”

나는 살포시 걸어가 황제 앞 테이블에 꽃을 내려놓았다.

황제는 종이꽃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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