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2)
로판의 이 환상적인 재미를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가운뎃손가락이나 받아라!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항상 책상 앞에 앉아 핸드폰을 붙잡고 소설을 읽고 있었다.
어디 보자, 뭘 보고 있지?
아,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이다. 이거 재밌지.
“야, 너 괜찮아?”
“응? 뭐가?”
“아니, 선착순 예매에 성공한 마카롱 뺏겼다며?”
어느새 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함께 로판을 읽곤 했던 친한 친구다.
“뭐, 우리 오빠 새끼가 뺏어가는 게 하루 이틀인가.”
“야, 그래도 짜증 나겠다.”
“괜찮아, 곧 오빠 한정판 게임기가 감쪽같이 사라질 거니까.”
이 정도면 우리 집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부모님의 바람은 덜 똑똑해도 모나지 않은 자식이었고, 그래서 오빠나 나를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다만 그 오빠란 놈이 여동생을 똥으로 보며 심심하면 발 냄새 맡아보라며 발로 툭툭치고 불 끄기 셔틀이나 시키는 모지리여서 매번 싸우지만.
애들이 그럴 수 있지, 정도로 치부하는. 적당한 화목함.
“아, 근데 그거 재밌어?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난 안 본 건데.”
“난 재밌는 거만 보지. 당연한 거 아냐. 이거 나오자마자 완전 확 떴던데? 너도 봐.”
“난 육아물은 좀 별로…….”
“왜?”
“별로야. 내용도 똑같고.”
이 친구가 또 취향을 개무시하네.
취향은 존중하는 거지 거기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내밀면 못 씁니다, 예?
“맨날 비슷비슷해. 나도 몇 개 보긴 했거든? 여주는 왜 맨날 엄마가 없어?”
“야, 그럼 나는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서 보겠냐? 세상에 이런 오빠가 어딨어? 그리고 엄마 나오는 육아물도 있거든? 추천해 줘?”
“크게 보자고요. 그런 소설이 다양합니까? 많아요?”
뭐야. 재밌으면 그만이지.
“됐다. 보기 싫으면 말아라.”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구라고, 같이 로판을 읽는 덕친이자 내가 지각을 면하려 뛰어오느라 밥도 못 먹고 나타나면 사탕 한쪽이라도 나눠 주는 친구였다.
“재밌으면 그만이지.”
……라고, 아기 황녀님이 납치당하는 장면을 보던 내가 말했다.
그 소설에 빙의할 줄 모르고, 한 치 앞도 못 보던 어느 열혈 독자의 독백입니다.
‘……하지만 뭐, 래빗한테도 있었으면 좋았겠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보듬어 줄 언니 같은 거.’
우리 오빠나, 이 책 속의 오빠들은 섬세함이 좀 떨어지니까, 아기 황녀님에겐 언니가 있어도 좋았겠다고.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더 신났겠다. 나는 자매를 가지고 싶었어.
“됼아와!”
그때 어디선가 귀여운 래빗이 뿅 나타나 말했다. 음, 래빗이 여기 어떻게 나타났지? 난 분명 생각만 했는데.
“됼아와!”
아, 설마 여기 꿈인가? 그런가 보다.
“됼아오라고!”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 * *
눈을 뜨자 환한 빛이 시야로 쏟아졌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자, 곧 눈앞에 조그만 그림자가 졌다.
“롤린!”
나는 익숙하고도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아직도 롤린이에요? 제대로 부를 수 있으면서, 너무해.”
“애칭이다!”
“흐음, 그런 이야기를 울면서 하세요? 울보시네.”
가슴 위에 조그마한 머리가 얹혔다.
이윽고 아기 황녀님이 내 위로 엎어졌지만, 그리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니, 어쩐지 몸이 굉장히 가벼운 것 같기도 했다. 흠, 착각인가?
“……울보라니, 날 그로케 부룰 수 있눈 건 너뿐일 고다.”
“앗, 영광이네요.”
나는 정신을 조금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날이 무척이나 맑았다. 그나저나 얼마나 잔 걸까?
뭐가 됐든 그리 시간이 오래 지나지는 않았겠지. 기껏해야 하루 정도 아니겠어? 산뜻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축하합니다!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를 달성했습니다! (달성도 100%) ]
[세계가 원작에 맞춰집니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오릅니다! ( ๑˃̶ ꇴ ˂̶)♪⁺ 현재 건강 수치: (정산 중)]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귓가에서 팡파르가 정신없이 울렸다.
눈을 찡그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지만 그 와중에도 똑똑히 보았다.
뭐야? 달성? 얼떨떨한 기분과 함께 기쁨이 차올랐다.
나 살아남았구나!
그리고 잘된 거구나! 래빗이랑 황제랑!
아니,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 그건 차차 알아보고 일단은 지금을 마음껏 만끽하자!
나 살았다! 살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창이 바뀌며 낯선 창이 떠올랐다.
[빙의자 님은 엔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과 함께.
‘이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 가슴에서 고개를 휙 든 래빗 때문이었다.
“이뎬 아푸지 않운 거냐?”
“네? 네.”
난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몸이 너무 가벼운데요?”
그러고는 보란 듯이 팔을 붕붕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어라, 진짜로 가볍네. 납치되기 전의 상태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와, 제가 푹 자긴 했나 보네요. 얼마나 잤어요? 하루? 이틀?”
아무리 잠이 보약이라지만 잠만으로는 이렇게까지 회복되진 않을 것 같은데. 건강 수치가 돌아와서인가?
하긴 메인 퀘스트를 깼으니 엄청나게 오르긴 했을 거다, 후후.
내가 살아남았다고.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에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네? 뭐라구요?”
“2주라고 해따. 너눈 2주 동안이나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
“말도 안 돼!”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 때문에 래빗이 으앗, 비명을 지르며 내 몸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우리 황녀님이 누구던가.
순식간에 균형을 잡더니 멋지게 착지했다.
‘2주라니, 퀘스트 남은 기간이 15일이었을 텐데 그럼 하루 남기고 달성한 거야?’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와, 천만다행이다.
“아니,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요? 진짜? 정말? 거짓말 안 하고요?”
“내가 네 건강울 두고 왜 고짓말울 해!”
“으앙, 우리 부모님은, 오빠는, 파올로는요? 어떡해, 빨리 집에 가야……!”
내가 당장 침대를 박차고 나설 것처럼 보였는지 래빗이 내 어깨를 살살 밀었다. 괜찮다는 듯이 조그만 손으로 토닥이면서.
“괜차나, 백쟉에게는 이미 말해 둬따. 네 몸 상태눈 정상우로 돌아왔댜고.”
“아, 정말요?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과 파올로가 매일 같이 들렀었다고 래빗이 추가로 설명했다.
날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의사들과 마법사들이 상주 중인 황성에서 재우며 수시로 상태를 확인하는 편이 나았고, 부모님도 그러길 바라셨다고 했다.
그래도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얼른 돌아가서 안심시켜 드려야겠다.
“그리고 일찍 눈을 떴더라도 으움…… 너한테눈 요기 있눈 게 제일 나았울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되묻자, 래빗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을 피했다. 곧 알게 될 거라나?
이럴 때의 래빗은 아무리 찔러 봐도 답을 주지 않을 것이므로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럼 황녀님, 저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부모님을 봬야 할 것 같아요.”
“몸운 정말로 괜찮운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좋아요. 저도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걸요. 와, 예전에 황실에서 치료 마법을 한 번 받았을 때보다도 상태가 더 좋아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아주 솜씨 좋은 마법사님이 치료해 주셨나 봐요. 혹시 어느 분이세요? 저도 따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나다.”
“네? 죄송해요, 잘 안 들렸어요.”
“나랴고.”
난 눈을 끔뻑였다. 래빗이 치료했다고? 하지만…….
“하지만 황녀님은…….”
“신성한 힘을 사용해따. 넌 내가 처움이자 마지막으로 치료한 사람이댜!”
“…….”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래빗이 그 힘을 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와닿았으니까.
“감사해요.”
그저 살짝 목이 메는 걸 숨기지 않으며 감사의 말을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빙의자 님은 엔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 ˙ ꒳ ˙ )◜.*✧]
눈앞에 다시 한 번 똑같은 창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요정의 창을 보는 대신 래빗에게 집중했다.
나를 향한 시선. 걱정과 염려, 그리고 신뢰로 가득한 얼굴.
몹시도 맑은 날씨에 래빗의 머리 위로 햇살이 뚝뚝 떨어졌고, 그 덕에 아기 황녀님의 얼굴이 더욱 또렷이 보였다.
……황제 폐하와는 잘 이야기하신 건가요?
굳이 묻지 않아도 나는 답을 알 수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나를 반겨 주었던 메인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그 답이었으니까.
래빗은 어쩐 일인지 나를 한참을 빤히 보다가, 방긋 웃었다.
이젠 완연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퀘스트 보상 중에 래빗의 이상증세와 관련한 주요한 단서가 있었지만, 나에겐 더 이상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래빗은 래빗일 뿐이니까.
아이의 조그만 입술이 벌어지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린.”
“네.”
“넌, ‘엠버넷’이 환섕한 사람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