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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79화 (79/281)

◈7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3)

나는 멈칫했다.

커다란 돌이 머리 위로 떨어진 듯했다.

이건 물음이 아니었다. 물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확신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래빗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지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주 본 래빗의 눈동자는 결단코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변함없었다.

“네, 맞아요.”

그렇기에 진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결코 쉬이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어쩌다 묻게 된 거지? 설마 아직도 이 이야기에서 남은 퀘스트가 있었나?

그러나 요정의 창은 잠잠했다. 그저 ‘엔딩을 선택할 수 있다’는 창만 여전히 눈앞에 떠 있을 뿐.

……그렇다면 이건 요정의 농간이 아니다. 래빗이 스스로 알아낸 거겠지.

그렇다면야.

“저는 엠버넷 경이 아니에요, 황녀님.”

“…….”

“하지만 엠버넷 경의 기억을 가진 건 맞아요.”

그리고 그 기사님의 삶 전체를 알고 이해한 사람이기도 하다.

아, 그런데 잠깐, 엠버넷 씨는 어떻게 됐지? 사라졌을까?

허겁지겁 가슴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아주 희미하지만 반응이 돌아왔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온기, 엠버넷의 대답이었다.

날 향해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사라지지 않아서.’

난 용기를 얻고 고개를 들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드시겠죠, 이해해요. 제가 밉거나 배신감이 드셔도 이해…….”

“아니, 그론 곤 들지 않았어.”

래빗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시선은 정말이지 맑은 하늘처럼 투명해서, 배신감이나 미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지?

“네가 이 순간 거짓말을 했다묜 그때는 화가 나고, 배신감도 둘었겠지.”

“…….”

“달린, 무엇이둔 간에 네가 나룰 위해서 움직였던 곤 알아.”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분명 처음에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래빗을 움직이려 했으니까.

“죄송해요, 저를 위한 일이기도 했어요.”

“그 또한 괜찮댜, 말했우니까. 그리고 넌 결국 나룰 움직였지.”

래빗은 잠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었우면 평생 거처에서 아무것됴 하지 않았울 나룰 잘 안댜.”

한순간 래빗의 얼굴 위로 아이가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 일렁거렸다.

“뎡말로 그로케 살았울 거다. 난 결심한 곤 꼭 지키니까.”

알고 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영원히 멈췄을 이야기라는 것을.

그래서 래빗이 좋아질수록 책임감은 막중해졌고 동시에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네가 나룰 만둔 거다. 이번 생을 ‘래빗’으로 살아걀 수 있게.”

래빗의 눈이 다시 나를 향한다. 햇살을 담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이것이 진쨔 친구가 아니라면 무엇울 진짜 친구라 부르게써.”

“…….”

“우린 친구지?”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네, 친구예요……. 최고의 친구.”

활짝 웃는 래빗의 얼굴에 맑고 또 맑은 기쁨이 떠올랐다가 점차 사라졌다.

곧 래빗은 진지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은 투로 툭 물었다.

“그저 나눈 궁굼하댜. 너눈 무엇울 위해서 내 앞에 나타났어?”

[여기까지 애쓰신 빙의자 님께 치얼스! 빙의자 님은 마지막으로 엔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

[빙의자 님 덕분에 비틀린 세계가 원래의 궤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하지만 빙의자 님이(의) 선택으로 새로운 ‘엔딩’이 생겨났습니다.

지금부터는 빙의자 님의 선택입니다!]

[<선택하세요!>]

[1. 이 세계를 완벽하게 ‘원작’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아기 황녀)’은 전생의 기억을 잊고 원작과 같은 순수한 아기 황녀로 돌아갑니다.

이 세계에는 어떤 오류도 없습니다. 따라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2. 이대로 ‘주인공(아기 황녀)’이 환생을 기억한 채로 엔딩을 맞이합니다.

단, 2번 선택지는 ‘불완전한 결말’입니다. 빙의자 님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어지럽게 놓인 요정의 창 앞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래빗이 기억을 잊고 책 속 주인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나는 잠시 요정의 창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래빗이 차분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진정한 삶을 살아갈 내 아기 황녀님. 사랑스러운 조그만 친구.

“……저는 어느 날, 이상한 계시를 받았어요.”

하늘을 흘끗 보았다. 어떡하면 덜 수상하게 들리면서 한 번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

“신의 계시라고 이야기할까요? 제가 계시를 따르지 않으면 죽을 거래요.”

처음 보았던 건강 수치 1의 충격이 다시 떠오른다.

그땐 그냥 얼떨떨했는데 말이야. 건강 수치를 잘 아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수치였다. 넘어지기만 해도 사망했을 거란 소리니.

“죽어?”

“네. 본래라면 저는 죽을 운명인데, 계시를 지키면 살 거라네요? 그 계시가 바로 황녀님을 찾아가는 거였어요. 분명 시작은 계시에서 비롯되었지만…… 황녀님이 이렇게 사랑스러우시니 갈수록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고, 어느 순간부턴 제 의지로 황녀님의 곁에 남아 지키고 싶었어요.”

“…….”

“계시가 아니라도요.”

래빗은 한참 말이 없다가 조용하게 물었다.

“그, 계시눈 지켰어?”

“네, 지켰네요.”

“그럼 이졔 나한테눈 볼일이 없눈 고겠네?”

“그럴 리가요.”

나는 요정의 창을 바라보았다.

“저희의 우정은 이제부터 시작인 거잖아요?”

나는 환생을 기억하기에 아프고 상처받고 힘들었으나 결국엔 극복한 래빗의 삶을 존중한다.

그래서 이제 와 모두 잊는 건, 이날까지 용기 내어 살아 온 래빗을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선택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빙의자 님이 2번 선택지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빙의자 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디 만족한 선택이셨길! ❁ᴗ͈ ˬ ᴗ͈)⁾⁾⁾]

나는 래빗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씨익 크게 웃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 말에 래빗도 크게 웃었다.

“오냐, 앞으로도 너눈 내 수하야. 하나밖에 없눈.”

“아, 그러고 보니 그간 자는 동안 엉뚱한 꿈을 꿨어요.”

나는 바닥에 발을 디디며 작게 중얼거렸다. 래빗이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꿈? 반문하는 래빗의 말에 내 웃음이 깊어졌다.

“황녀님께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이요.”

그리고 제가, 그 언니가 되고 싶다는 꿈?

이어진 내 말에 래빗은 인상을 한껏 찡그리더니 볼을 부풀렸다.

“넌 뉴가 봐도 동생 같은 성격이니까 꿈됴 꾸지 마라.”

그 말에 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공 ‘유엘’의 호감도가 MAX를 달성합니다.]

[축하합니다! 빙의자 님에게 새로운 루트 ‘나만의 로판’을 개설할 권한이 주어집니다!]

[주인공 ‘유엘’을 당신의 첫 번째 ‘나만의 로판’ 루트의 ‘등장인물’로 초대하겠습니까?]

함께 웃는 사이 떠오른 요정의 창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요정의 창이 이어졌다.

[새로운 루트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첫 번째 인물이 추가됩니다!

이름: 유엘 래빗 비센

-역할: 주인공 ‘달린’의 동료, 위기를 함께한 소울메이트

-칭호: 과거의 초월자(레전드리), 검술의 천재(유니크), 전쟁의 명사(에픽)

-달린을 향한 호감도: MAX]

[앞으로 빙의자 님만의 멋지고 개성 있는 ‘나만의 로판’을 만들어 보세요! °˖✧◝(*´ ワ `*)◜✧˖°]

* * *

이후의 시간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장장 2주간 보지 못했던 가족들과 해후를 나눴고, 특히 엉엉 우는 아빠를 안아 드렸다.

아빠는 그 후로도 약 사흘 동안 나만 보면 눈물을 펑펑 쏟아내다 급기야 엄마에게 부채로 등짝을 맞고서 울음을 멈췄다.

파올로는 언제나처럼 시원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시울이 빨개져 있어서, 괜히 내 코가 시큰거렸다.

나 참, 별거 아니었는데 말이야. 훌쩍훌쩍.

황실과 래빗의 배려로 나는 한동안 집에 머물렀고 그 덕에 한참이나 보지 못했던 친구 리제도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흐흡, 네가, 흡, 흐끅 눈을 못, 뜬다고 해서…….”

“리제, 뚝, 그만 울어 응? 눈 부어서 아프겠다, 응?”

“네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문제는 그동안 리제가 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던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폭포수처럼 터트려 좀처럼 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기 바빴다.

지금도 손수건을 내밀었는데, 이걸로 벌써 세 장째였다.

“그럼 그럼, 나 아주 멀쩡해.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진 거 같아! 황실에서 정성을 다해 치료해주었다니까?”

“다행, 끕,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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