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0화 (80/281)

◈8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4)

리제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다 말고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흠, 세상에, 코가 그만……. 실수를 했네.”

방금 소리가 엄청났는데.

항상 우아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던 리제였기에 의외기는 했다.

하지만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리제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 모습마저 예뻤다.

“……어디서 영약, 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싶었어.”

“응?”

“우리 집, 돈 많아. 달린.”

아, 그거야 알지.

리제의 집안인 트리샤 후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는 나도 익히 알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것과 상관 없이, 리제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널 위해서라면, 흡, 그 돈 전부 써도 안 아까워.”

“응응, 정말 고마워 리제, 마음만으로도 기뻐.”

나한테 이렇게 좋은 친구가 둘이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빙의자 인생 성공했다.

‘로판 빙의 후 친구들 만나고 나의 성공시대 시작됐다~’

난 지구에서 대히트했던 CM송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리제에게 재롱을 떨었다.

다행히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리제가 점차 웃음을 되찾았다.

리제가 완전히 웃음을 되찾고 난 뒤에야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리제가 막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리제를 내 방에 들이는데 파올로 그놈이 한참을 근처에서 서성거렸지?

‘평소답지 않게 말이야.’

흐응, 나는 자꾸 근질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딱 붙이고 눈웃음을 지었다.

들뜬 기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리제에게 미끼를 던졌다.

“근데, 리제. 네가 온다고 하니까 우리 오빠가 갑자기 내 방 주변을 서성거리더라?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응? 으응?”

허어, 이것 봐라? 어깨의 떨림이 예사롭지 않은데?

나는 울어서 발개진 뺨 위로 새롭게 홍조를 띄우는 리제의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아니, 그건 음, 네가 저택에 없는 동안 내가 방문했을 때마다 파올로 경, 아니, 에, 에스테 경께서 반겨 주셔서…….”

“응, 그건 미안해. 한동안 바빠서……. 어라 근데, 언제부터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거야?”

“어어?”

리제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흐음, ‘그런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리제가 귀여우니까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파올로, 조만간 연애하는 거 아닌가 몰라. 우리 리제가 아까운데?’

마침 베키가 차를 내왔기에 우리의 대화는 적절한 타이밍에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해서 아일라 양의 온실에서 그런 일이 있었거든.”

“아 응, 그랬어?”

“음, 달린? 혹시 이 얘기 재미없어?”

“어어?”

리제가 이야기 하다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 조금 전 얘기했던 아일라 양의 사촌이 테로스 백작님이신데, 전에 네가 골랐던 여덟 점의 초상화 중에 한 분이시거든. 그래서 난 네가 관심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아아 그거! 아냐 아냐, 관심 많아. 아일라 양과 사촌인 줄은 몰랐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내내 하루가 1년처럼 느껴지다 보니, 하녀들의 도움으로 초상화를 모았던 것이 한참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긴 다음 주인공을 찾아야 하니까 주의 깊게 들을 필요는 있겠어.’

라이칸 그 남자가 내 취향의 외모였듯이, 다음 소설 남자주인공도 내 취향으로 생겼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니, 거의 100퍼센트지.

“내가 요즘 계속 황성으로 출근했었잖아. 요즘 사교계 소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 뭐야. 그래서 잠시 멍해졌나 봐, 미안해 리제.”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그간 바빴다며? 파올로 경에게 잘 들었어.”

리제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금 어두운 얼굴을 했다. 왜 그러지?

“저 달린, 그럼 혹시 너…… 이 소식도 듣지 못했겠네? 체단 대공가와 레스터풀 백작가 이야기도.”

차례로 등장한 이름은 모두 생소했지만 난 ‘대공’이란 한 마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대공? 대고옹?

그 로판 삼대장 직업이자 빠지면 아주 섭섭한 그 직업 말입니까?

얼른 들려주시죠, 얼른!

“뭔데? 뭐야 뭐야?”

“아, 파올로 경에게 듣긴 했지만…… 아직 기억이 조금 불안정하댔지? 그게 말이야, 레스터풀 백작가의 영애가 네 사촌이잖아, 달린?”

“아, 응응.”

파올로 자식, 언제 이런 짓을 했대. 잘했어.

사실 아무리 봐도 파올로가 리제와의 대화에 나를 소재로 써먹은 것 같지만 이번만은 봐 주기로 했다.

“그게…… 레스터풀 백작 영애, 그, 너도 잘 아는 네 사촌 언니인 지젤 양이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고 지적이며 품위 있는 숙녀로 유명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레스터풀 백작가 자체도 제국에서 명망이 높은 대백작 가문이고.”

리제에게 미안하지만 혹시 스킵 버튼은 없나요? 아니면 ‘3줄 요약’이 듣고 싶어요.

“이렇다 보니 체단 대공가에서 레스터풀가와 약혼을 맺었잖아? 그런데 음…… 지금 지젤 양이…….”

“지젤 양, 아니, 우리 사촌 언니가 왜?”

“도망쳤대.”

“아, 도망…… 응?”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제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냥 도망이 아니야. 도망이 아니라 실종이라고 할까? 좀 특이해. 음, 아무튼 쪽지를 하나 남기고서 사라졌는데, 그 쪽지의 내용이 지금 엄청난 화제야.”

“왜? 어떤 내용인데?”

“본인은 비혼주의래.”

“응?”

잠깐만, 스톱 스톱!

이건 제가 아는 로판 중 그 어떤 소설의 클리셰로도 등장한 적 없는 내용인데요?

나는 혀를 깨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아니, 어떤 로판에 비혼주의가 나와? 아, ‘여주판’까지 범위를 넓히면 충분히 나올 수도 있긴 하지만.

근데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감이 와, 감이 온다고.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귀족들 사이에서 정략혼은 흔한 일이고, 이미 가문 간에 많은 것이 오간 상황인가 봐. 정확히는 레스터풀 쪽에서 대공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기로 한 상황인데…… 대공가 쪽에서 이제 와 모든 지원을 중단한다고 선언했으니.”

“어…… 그렇구나. 큰일이네?”

“아주 큰일이지.”

리제가 심각한 얼굴로 잠시 문 쪽을 보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 에스테 가문은 레스터풀과 공동 사업을 진행하고 있잖아.”

“엥?”

진짜?

“거기다 그, 남은 사업이 이거 하나뿐인 걸로 아는데……. 레스터풀 백작님이 투자를 받아 이것저것 많은 일을 진행하는 중이라 들었거든. 근데…….”

“대공가에서 돌려달라고 했구나.”

결혼을 담보로 투자를 지원받았는데, 당사자인 신부는 비혼 선언을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발대발한 대공가 쪽에서 모든 지원을 고스란히 회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분노로 레스터풀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선언했단다.

잠깐, 가루? 설마 그 가루에 우리 집도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저, 리제…….”

“…….”

나는 리제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우리 집에도 심상치 않은 영향이 있을 거란 걸 말이다.

“……네 표정을 보니까 달린 네겐 아무런 말씀 안 하신 거구나.”

“응…….”

부모님이 전혀 티를 내지 않으셔서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두 분은 평상시와 똑같았는데……. 사실 그 속은 말도 아닌 상태셨다는 거잖아.

끄응, 아무리 퀘스트에 바빴다지만 완전 불효네, 이거. 유교 걸 정신이 운다, 울어.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레스터풀 백작님이 전력을 다해 지젤 양을 찾고 계시니까.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이야기가 잘 되면 좋겠어.”

“으응…….”

어째 감이지만,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런데 뭐랄까, ‘지젤’이란 이름이 상당히 낯이 익은데.’

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라면 99% 확률로 로판에서 본 이름이다.

리제의 얘기를 들을수록 뭔가 슬슬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 잠깐. 알겠다. 즐겨 읽었던 소설 중에 있었어, 그 이름.

있었다고…….

“하, 계약결혼물…….”

“응? 뭐라구 달린?”

“아니야.”

일단 하나를 떠올리니, 그에 따른 내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둥실 떠올랐다. 심지어 제목마저 떠올랐다.

[세상에! 빙의자 님께서 스스로 두 번째 소설에 대한 단서를 찾았어요! 요정은 놀랐어요!]

끄응, 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 제목도 떠오른 것 같다.

북부 대공이랑 엄청 똑똑한 언니가 하나 나오는 소설이었나?

[세계에 대한 정보가 일부 해금됩니다!]

[두 번째 소설 《대공님, 우리 계약해요》

#계약결혼 #선결혼후연애 #현명여주 #차분여주 #계약이 끝나면 우린 남남 #하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 #집착남 #냉정남 #내 아내에겐 따뜻하겠지

빙의자 님의 평점: ★★★★☆]

[독자 한줄평: 여주를 똑똑하다는 설정으로 잡은 작품은 작가 역량이 미치지 못해서 악역들이 지나치게 멍청하게 나오거나 유치한데 이 소설은 이런 것 없이 여주가 정말 똑똑해서 좋았습니다. 흔해 빠진 계약 결혼물은 아닙니다. 이건 진짜 소장각]

[독자 한줄평: 두뇌만렙 책사 여주와 냉정섹시대공 남주님의 알콩달콩 계약결혼물입니다. 말이 계약결혼이지 얘네 연애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억해 언니...? 나 언니의 76544567번째 하녀였잖아... 구경만 하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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