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7화 (87/281)

◈8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

그나저나 소소한 서브 퀘스트 하나 실패한다고 –20이라니 여전히 요정의 창은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퉤.

“그, 정말 황송한 말씀에 감사드리지만……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우선은 너무 갑작스럽고.”

일단 대공의 청을 받아들이는 퀘스트에 실패하더라도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니까.

‘결혼이 무슨 편의점에서 음료수 고르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내가 이런 청혼을 받게 된 건지 상황을 좀 더 살펴보고 싶었다.

육아물 때처럼 덜컥 떠안아서 얼렁뚱땅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말하지만 진짜 힘들었다고!

“무엇보다도 저는 몸이 약했고 또 언제 다시 나빠질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와 약혼하거나 혼약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상대에게도 실례니까요…….”

청초하게 고개를 툭 떨구며, 바닥을 응시했다.

통해라, 통해라. 아프다는데 어쩔 거야.

이대로 나가서 그냥 황실로 달려가자. 정말 미안하지만 리제에게도 돈 얘기를 해 보자고.

그다음에는 지젤 언니를 찾고……

아니, 근데 대공이 나한테 반한 거면 지젤을 찾아도 문제 아니야? 머릿속이 혼잡했다.

“…….”

하지만 대공은 너무 오래 대답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잠깐만 저게 뭐야.

“……안, 돼요?”

굵직한 선과 섬세한 선이 참 오묘하게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인상이었다.

저 하얀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만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게 감상평을 내뱉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 저 북부 대공이 펑펑 울고 있었다!

그것도 서럽게!

“…….”

잠깐만, 댁은 아무리 그래도 카리스마! 본새! 위엄! 뭐 이런 거의 상징이잖아. 속된 말로 나는 XX 나만의 길을 간다! 존나쎄! 아니었냐고!

굵직하게 떨어지는 눈물을 본 순간 마치 내 건강 수치가 떨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기요, 실시간으로 박살 나는 중인 북부 대공에 대한 내 환상 돌려 내!

래빗을 처음 보았던 때만큼이나 아득한 심정이 손아귀처럼 나를 잡아챘다.

첫 번째 이야기의 꼴을 보고서 각오는 했지만 이번 건 그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육아물에서 그랬듯 누군가는 나를 머나먼 세계로 도망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딩동! 주인공 찾기 성공! 인물 열람에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정보가 추가됐어요! ヾ(*´∀`*)ノ 지난 메인 퀘스트 보상으로 다음 소설 및 주인공 정보가 추가로 제공됩니다!]

[휴고 렉타스 체단

역할: 계약 결혼물 《대공님, 우리 계약해요》 주인공

호감도: 73

상태: 울보 대공님, 광증, ‘클리셰’에서 벗어난 상태, 매우 위험합니다!

특징: 본래는 냉정하고 차가우며 냉혹한 차가운 설산의 남자! 북부 대공!

하지만 저런, 남자주인공이 세계의 뒤틀림으로 눈물 많은 울보 대공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다 간헐적인 광증까지! 눈물과 광증이란 상반된 증세를 가지게 되었어요.

참고로 이 대공님의 ‘광증’은 자칫 영지를 멸망시킬 수도 있으니 취급에 주의해주세요!

※Tip. 중2병 말기 환자를 대하듯 다뤄 보자!]

저기요, 울보랑 광증이 한 카테고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글자입니까?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저기요! 대공인데 중2병 말기 환자라니요!!

첫 번째 이야기에서도 느꼈지만, 이 뒤틀린 이야기들 아무래도 보통 난이도가 아니다! 그리고 다 막장이야!

무엇보다 처음 보게 된 ‘광증’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로판에서 이따금 보았던 단어지만 조금 전 읽었던 걸로는 아무래도 의미가 심상치 않아 보였으니까.

그리고 영지 멸망이라니?

이번엔 뭐 배드 엔딩도 있단 소리 같은데. 이건 혹시 나는 살고 다른 사람들이 죽는 엔딩이야?

[헉, 세상에! 어떻게 아셨죠? 빙고! ∑(O_O;)]

아 놔…… 이 망할 세계. 망할 요정의 창!

“저, 대공님? 일단 울지 마시고…….”

일단 청혼이고 나발이고 눈앞에서 서럽게 우는 이 덩치만 큰 남자부터 해결하자.

“대공님, 울음을 그치시고 제게도 생각할 여유를 잠시만 주시는 것이…….”

“영애?”

고개를 들자 눈물에 젖어 더욱 색이 진해진 붉은 눈동자가 서글프게 일렁거렸다.

결백한 사람조차도 마주한 순간 내가 새끼강아지를 밟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지 않았나 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눈망울이었다.

젖은 속눈썹이 눈 밑에 콕 박힌 눈물점에 닿을 듯 살랑 움직였다.

“……안, 돼요?”

한층 더 서러워진 목소리는 눈물에 담뿍 젖어 자못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이 남자가 괜한 사람 홀리려 드네!

청혼이 장난이냐? 같은 말은 하지 못했다.

채권자란 상대의 신분, 그리고 또 한 번 굵은 눈물을 흘릴 것 같단 예감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몸이 좋지 않기도 하고, 또…… 저희 부모님께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시고, 지금 막 이야기 꺼내셨는데……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심이…….”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의 수하들과 가신들은 대공의 결정을 받아들이긴 한 건가?

“혹시…… 대공가에서 반대하진 않았나요?”

“기사들과 가신들은 모두 극도로 반대했지만, 내가 밀어붙여서 청혼하러 온 거예요…….”

어쩐지 아까 나를 미친 듯이 노려본다 했다. 그건 강렬하게 분노하는 낯이었던 거야?

“그, 저 대공가 쪽에서는 영지전까지 생각한다고 들었는데.”

“네, 그랬어요. 이미 선포도 했었는데…….”

“그럼 혹시 병력이……?”

“아, 수도에 있어요.”

……큰일 났다. 이미 선포한 것도 모자라 병력까지 끌고왔다고?

그러니까 이분의 말인즉, 최후통첩 기간이 끝나고도 시간을 더 준 게 아니라, 그저 압류와 영지전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데.

‘이걸 거절하면 설마 진짜 영지전이 일어나는 거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기요, 살벌한 진실에 애통하게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그쪽이 서럽게 눈물을 훔치나요?

내가 진짜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망한다고? 그건 안 되지!

[메인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꺄아! ( ๑˃̶ ꇴ ˂̶)♪⁺]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

이런 세상에! 두 번째 소설은 비틀어진 상태가 심각합니다.

여주인공은 일찍이 비혼을 선언하고 똑똑한 머리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남자주인공은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울보 대공님이자 광증을 앓는 채로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이 첫눈에 반하고 만 당신!

이 이야기를 바로잡아 봅시다!

※주, 이번 퀘스트에는 배드 엔딩이 있습니다. 울보 대공님의 취급에 주의하세요!

내용:

1)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을 원작과 같은 성격이 되도록 프로듀싱하세요!

2) 완전한 ‘북부 대공’이 된 남자주인공과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출하세요!

※선정 장면은 추후 공개됩니다!

기한: 30일 뒤

제한 조건:

-‘남자주인공(북부 대공)’과 계약 결혼 관계 맺기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호감도 100(+α) 달성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 40 이하

실패 시: 사망

보상: 건강 수치 +40, 다음 소설 힌트, ???, ???]

생각보다 먼저 입술이 움직였다.

“시, 시간을 주세요!”

“……시간요?”

“네!”

당장 수도에 병력이 들어왔단 걸 알게 된 순간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아니, 그 병력이 우리 집을 압류하다 못해 부숴 버린다잖아. 일단 집은 지켜야지!

거기다 메인 퀘스트까지 떠 버렸잖아!

이번 퀘스트도 절대 범상치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실패하면 사망’이라는 극악의 조건.

가장 큰 문제는 기한이었다. 30일이라니, 실화인가요?

‘우선은…….’

그래도 따져 보면 나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분께서 믿기지 않게도 내게 첫눈에 반하셨다고 하고, 기본 호감도 수치도 높았다.

저 호감도 100 뒤로 보이는 알파(α)가 거슬리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대공님. 대공님께서…… 처, 첫눈에 반해 주셨단 건 너무 감사드리고 또 그런 마음인데……,”

어우, 낯뜨거워. 이런 말을 어떻게 했대?

“결혼은 남녀 간의, 또 가문 간의 중대사인데 이렇게 저만 있는 자리에서 성급하게 답을 드리긴 어려운 문제 같아요.”

사실 난 황실로 찾아가 래빗의 친구로서 황제 찬스를 딱 한 번만 써먹으려 했다만.

돈을 구하는 데 성공해도 이 대공의 눈빛을 보건대……

‘그랬다간 돈은 필요 없다며 영지전을 할 것 같은 눈빛인데…….’

게다가 뭔지 몰라도 ‘광증’이 있다잖아. 그리고 퀘스트도 떠 버렸고…….

위기를 이렇게 극복해서 좋긴 한데, 이번 메인 퀘스트도 영 난해했다.

만약 원작 속 장면을 연출하고 나면 이 대공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얌전히 헤어지면 좋겠지만 상황이 뜻대로 잘 풀릴까?’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느꼈지만 중간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 이해해요…….”

낮지만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치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를 바라보던 얼굴에 꽃잎 같은 열기가 살랑거리다가 화아악 번졌다.

“그래도 좋으니까…… 청혼,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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