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
그렇게 말한 뒤 나를 쳐다본 순간 그의 얼굴에 조명처럼 환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 순간 이 방의 모든 빛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남자의 얼굴은 눈길을 강압적으로 잡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영애를 본 순간 이 세상에 모든 색이 사라지고, 영애에게만 색이 남았어요. 이런 게, 사, 사랑하는 거구나 싶어서…….”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그의 신형이 머뭇머뭇 다가왔다.
잘 만들어진 한 폭의 명화가 사람으로 변해 불쑥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럼 영애가 말씀한 것들을 들어드릴 테니, 영애도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네.”
대공이 한 발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요물을 만난 기분이었다.
[퀘스트(서브) - ‘두 번째 책을 시작해 보자!’가 완료되었어요!]
“나와, 같이 잠시만 내 저택으로 갈래요?”
* * *
[아이템 ‘사이렌 오더’의 추가 기능으로 ‘주연’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어요!]
[현재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감정 상태: 매우 기쁨]
나는 반투명한 요정의 창을 보며 속으로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런 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나도 보이거든?
다각다닥.
고요한 마차 안, 창문 밖으로는 녹색 풍경이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지나갔다.
무슨 조치를 한 건지 마차는 안락하다 못해 허리가 살살 녹는 것 같았다.
이토록 편안한 몸과 달리 마음은 너무도 불편했다.
“저기요…… 대공님.”
“…….”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그만 우세요.”
기쁘다며. 엄청 기쁘다며. 근데 왜 30분째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발그레한 뺨 덕분에 슬퍼서 우는 게 아니란 건 아주 잘 알겠다. 왜 우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약 4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공님의 청혼을 어찌저찌 겨우 보류하고서 그 대가로 이야기를 더 나누고자 장소를 이동하기로 했는데, 파올로가 쫓아 나왔다.
“달린!”
이분이 내게 첫눈에 반했대. 그 자리에서 바로 청혼까지 받았어.
사실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영혼이 반쯤 가출한 상태의 파올로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일단 파올로에게 설명하면 부모님 귀에도 들어가겠지.’
사정 설명 없이 대공을 따라가 버리면, 파올로의 입장에서는 가문에서 돈을 갚지 못해 나를 인질로 데려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면 파올로의 성격상 영지전이 우리 집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근데 사실 이 사람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말보단 내가 인질로 잡혀간다는 게 더 그럴싸하게 보이겠다…….’
아니나 다를까 파올로의 반응은 예상 그대로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왜! 이건 진짜 아니라고!”
파올로가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만 버티라면서 앞을 가로막는 통에, 나는 불안하게 대공 눈치를 봤다.
“돈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야, 파올로 고맙긴 한데…… 지금 저분 표정이 굳었다고.
“대공 전하, 어차피 투자금이 걸린 정략혼이었으니, 그 돈만 해결되면 없던 일로 가능하시겠지요?”
“돈으로 해결하겠다면, 이번 파혼으로 처박힌 내 가문의 위신과 피해 본 사람들의 위자료까지 해서 세 배는 내놓아야 할 텐데요…….”
그리고 유순하게만 보이던 대공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순간, 나는 왜 퀘스트에 광증 운운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지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진심을 보이기 위해선 지금 당장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하나 보군요?”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얼른 나서서 마차로 가는 척했고, 파올로도 더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그만큼 시무룩한 얼굴에서 나오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던 탓이다.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눈에 선한데, 끄응. 일단은 대공과 이야기를 끝내고서 생각해 보자.
말했듯 결혼이 무슨 자판기 커피 뽑듯 처리할 일도 아니고, 아무리 퀘스트라 한들 바로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건강 수치에 여분도 있고.
‘집에 돌아갈 즈음엔 부모님도 알고 계시는 상태라고 생각하자.’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아주 상상이 잘 가니 잠시 뒤로 미뤄놓고 말이다.
아무튼 난 파올로와 대공이 정말로 충돌하거나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재빨리 장소를 옮기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했고.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대공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 낌새도 맥락도 없었다.
“훌쩍.”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까 울고 있더라고?
황당해서 쳐다보고 있었더니,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더라.
‘처음엔 그래, 귀엽기도 했는데…….’
30분이 지나니까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울어도 되는 건가.
조금 빨개진 눈가를 보고 있으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다만 물기 어린 눈으로 자꾸만 열렬하게 쳐다보는 건 매우 불편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린 강아지를 유기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달까.
아무튼, 세계가 비틀려서 울보가 되다니 여기도 고생이네. 그것도 평범한 울보가 아닌 울보왕 수준이라니.
‘위대하신 요정님아, 혹시 이 대공님이 앓는다는 중2병에, 예민하다 못해 스치는 바람에도 눈물이 나는 증상이 있니……?’
환생을 기억하던 래빗을 상대하던 때보다는 나은가 싶다가도 ‘광증’이란 복병을 떠올리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무튼 이제 건넬 손수건도 없는데 대공은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안쓰러움에 빤히 보자 잠시 대공이 흠칫하더니 이내, 눈치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볕을 흠뻑 받은 뺨이 더 발그레해지며…….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4]
……쳐다보기만 했는데 오른 거야?
거 그래도 명색이 ‘북부 대공’님인데 이렇게 쉬워도 되나요?
나는 생긋 웃었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5]
어쩌면 이번 두 번째 메인 퀘스트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희망이 생겼다. 내 사랑 래빗, 듣고 있니? 얼른 끝내고 곁으로 돌아갈게!
‘근데 그 광증이란 건 정확히 어떤 증상인 걸까.’
퀘스트 창에도 자세한 내용이 없었고 요정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이건 나더러 알아서 알아보라는 뜻일 터. 우선 여기에 관해서 알아봐야겠다.
“저, 대공님.”
“네, 네?”
“아, 그치셨네요.”
갑자기 불리는 바람에 놀랐는지 대공이 눈물을 그쳤다.
그 모습에 나는 푸흡 작게 웃었다.
내 웃음에 흠칫하는 대공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눈 밑에 닿을 듯 길게 뻗은 속눈썹이나 붉게 물든 하얀 피부까지, 반사판 하나 없는데 얼굴에서 빛이 나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6]
와, 이 퀘스트 꿀인 것 같아요. 요정님 감사합니다!
[요정이 생긋 웃어요!]
아니, 취소. 너 웃지 마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까.
어느새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먼저 내려간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내게 손을 뻗었다.
“아, 바닥이 미끄러워요…….”
내민 손을 잡은 순간, 그의 섬세함이 공존하는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어쩐지 그의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덩치는 위협적일 만큼 커다란 주제에 행동은 강아지 같으니.
남자는 이 기묘한 부조화를 잘생긴 얼굴로 극복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이런 건 제때 관리가 필요한 법인데, 그럼에도 혹 영애가 넘어지셨다면 비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들의 팔다리가 쓸모없는 것이니, 베어 다스리면 되니까요…….”
수줍은 듯 청초한 웃음기가 엉킨 대공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저기요, 잠시만. 방금 그거, 수줍어하며 할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순식간에 지나가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여긴 작지만 내 저택이에요.”
저택이라고 부르면 안 될 듯한, 차원이 다른 크기의 장원을 가리키며 대공님이 수줍게 미소지었다.
꼭 고급 아파트에 사는 애가 자기네 집에는 침실이 다섯 개밖에 없다며 수줍어하는 걸 본 기분이었다.
“드, 들어갈까요?”
“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대공과 달리 나는 적진에 들어가는 장수처럼 마음을 비장하게 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아니,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람 한 명 없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원인데 왜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지?
그리고 왜 생존 눈치를 올려 주는 스킬 알람이 울리는 겁니까?
그래, 이놈의 메인 퀘스트가 절대 쉬울 리가 없지.
무언가 숨겨진 부분이 더 있을 게 분명했다. 바짝 긴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