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3화 (93/281)

◈93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0)

* * *

“달린, 잘 다녀와야 해!”

다음 날, 내가 북부 영지로 떠나는 날 에스테가의 저택 앞에는 긴긴 행렬의 마차가 서 있었다.

모두가 내 짐들이었으나, 저기서 에스테가에서 준비한 건 2할 정도고 나머지는 대공가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먼 곳으로 떠나는 날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리제도 함께 나와서 손수건을 열심히 적시고 있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나 죽으러 가는 게 아니래도.

꼭 전장에라도 내보내는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슬픔에 남몰래 뺨을 긁적였다.

이러면 나중에 결혼이 무산되었을 때 다들 좋아하려나…….

너무 놀라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가, 아프면 꼭, 꼭 연락해야 한다.”

“어휴, 저 이제 건강하다니까요.”

어머니, 저에게는 무려 80의 건강 수치가 있사옵니다.

“달린, 음식이 입에 안 맞거나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편지, 아니, 사람을 보내. 아니면 거기 있는 전송 마법 기지를 이용해도 괜찮아.”

“네, 그럴게요.”

부친이 마지막까지 끙, 숨을 참다 푹 내쉬었다. 옆에서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날 지켜보던 어머니도 손을 내밀었다.

“약은 꼭 챙겨가고.”

“아…… 음, 네에…….”

나는 내 손에 들려진 약 꾸러미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에스테가의 주치의가 만들었다는 약은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울먹이며 내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다녀와라.”

“응.”

파올로와는 짧게 인사를 나눴다.

흐음, 어째 파올로는 나를 걱정하는 동시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에 빤히 쳐다보니 리제를 살짝 곁눈질하고 있더라. 좋을 때다.

‘다녀오면 나보다 먼저 결혼하는 거 아니야?’

“걱정 마세요, 잘 다녀올게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 뒤를 자박자박 따라오는 자그만 발소리, 나는 이 소리에 놀라는 대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랑받고 이꾸나.”

“황녀님.”

오늘을 위해 무려 저택까지 방문해 준 내 조그만 친구님, 래빗이었다.

“그쵸, 제 친구도, 가족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에요.”

처음엔 아기 황녀님의 방문을 매우 어려워하던 부모님과 파올로였지만 내가 떠날 시간이 되자 래빗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만큼 걱정이 되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황녀님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죠.”

“그, 그론 말 둘우려고 한 말운 아니다.”

“알죠. 제가 하고 싶어서요.”

래빗이 살짝 찡그렸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론 뻔뻔함도 한둉안 볼 수 없게꾼.”

나는 래빗 앞에 쪼그려 앉았다. 착, 기다렸다는 듯 조그만 손이 내 뺨을 살짝 잡았다.

어디 한 군데 몰랑몰랑하지 않은 부분 없는 아기 황녀님은 손도 강아지 발바닥처럼 폭신했다.

“거긴 마니 춥다고 하니 불을 많이 때라. 마봅사가 필요하면 3황자놈이라도 내려보내 주게따.”

“이런, 3황자님께서 우시겠는데요?”

“……빨리 와.”

“네.”

어차피 한 달 뒤 3황자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오겠지만, 이걸 지적하는 대신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래빗도 알고 있으면서 투정을 부리는 거고 난 그런 래빗이 기꺼웠으니까.

“건강하게 지내세요.”

“거긴 몬수터와 마수가 많운 걸로 알고 있눈데, 그에 대해소는 조만간 조치하겠댜.”

“네? 네.”

뜻 모를 말을 끝으로 래빗과도 헤어졌다.

마차에 앉아 창밖을 보자, 래빗이 조그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풉 웃음이 터졌다. 나는 바로 손을 올려 마주 흔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애타게 보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차가 출발했다.

“어디 보자, 체단 대공가라…….”

출발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내 손에는 긴 양피지가 들려있었다.

“저, 달린 필요하다고 해서 얼른 만들어봤어. 이거면 될까?”

이건 리제가 만들어 준 체단 대공가에 대한 정보 모음집이었다.

대공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어 리제에게 부탁했었다. 그냥 기본적인 정보들만 달라고 했는데…….

“……휘하 루스폰 영지 내 결탁으로 인한 자금 횡령?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안 건데.”

뭐야, 이런 고급 정보들까지 달라고는 안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무서워, 리제야.

“……총범죄 발생 및 검거율은 어떻게 조사한 거지? 거기다 인구수 통계는 왜 적은 거야…….”

왜 이렇게 양피지가 길고 두툼하나 싶었더니만, 정보가 끝도 없이 적혀 있었다.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보고서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게 문제였다. 대공가를 모략에 빠트리고 싶은 누군가 조사를 한다면 이렇게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했으니까.

이게 대공가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알겠어, 달린. 맡겨만 줘!”

귀엽고 예쁜 리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만만한 표정.

“난, 너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어!”

최근 들어서는 처음 리제를 보았을 때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숙녀의 모습 대신 조금 더 시원시원한 모습을 본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 보고서도 참 시원시원했다. 들키면 내 목이 시원시원하게 날아가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이 양피지는 네가 아니면 보지 못하게 조치해 놨어. 일 처리는 확실해야 하잖아?”

마치 내 걱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기억 속 리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이렇게까지 자세한 정보는 필요 없었는데…… 확실해도 너무 확실하잖아, 리제야.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덕분에 여러 정보를 알게 됐으니까.

정보 모음집을 읽어내려가던 중 한 항목이 눈에 띄었다. 대단히 중요한 기밀이라는 듯 표시가 되어 있었다.

“……최근 중앙 영지에 출몰하는 마수와 몬스터들이 증가했다고?”

대공이 다스리는 북부는 거대한 설산 지대였다. 널따란 땅 곳곳에 체단의 깃발을 올린 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이 영지들은 각각 높고 낮은 산을 낀 형태였다.

때문에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이동하려면 마법사들의 이동 마법을 이용하거나, 순간이동 마법이 걸린 ‘포탈’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간편했다.

물론 마법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말이나 마차를 주로 이용했다.

대공은 그 드넓은 영지에서도 중앙의 영지, 체단에 거주했다. 거기가 대공령의 수도인 셈이다.

“이런 게 왜 최고 기밀인 거지?”

다른 영지들과 마찬가지로 체단 역시 뒤로 산을 끼고 있었는데 북부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산 파이난테 봉이었다. 이런 지형 덕에 체단은 ‘천혜의 요새’라 불렸다.

그런 장점이 있는 대신 산에 서식하는 몬스터와 마수들이 항상 골칫거리였다.

이렇듯 체단에 몬스터와 마수가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시기에 따라 수가 급증하기도 한다고 들었기에 크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리제는 이 부분에서 의아할 정도로 크고 진하게 붉은 동그라미를 쳐놓고, ‘?’를 그려 놓았다. 리제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리제에게 자세히 물어볼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걸.’

내가 열심히 서류를 보는 동안에도 마차는 열심히 굴러갔다.

무슨 조치를 한 건지 우리 집안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될 편안함 덕분에 멀미도 거의 나지 않았다.

‘사흘쯤 마차를 타야 한다고 했지. 그다음엔 포탈을 이용할 거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돌연 멈춰 섰다.

마차 바깥이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이내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의아함에 얼른 대답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대공님이었다.

‘응? 뭐지?’

대공님에겐 황제 폐하 알현과 더불어 레스터풀과의 후사를 해결하는 일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따로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버젓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주변으로 처음 보는 기사들이 몇몇 보였지만 대공님의 미모에 가려 완전히 묻혔다.

“영애.”

문이 막 열리는 순간 내가 마주한 것은 초상화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순간 대공의 긴 눈꼬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래로 내려가더니 온순하게 접혔다.

워,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어떻게 미소 하나로 사람이 저렇게 온순해 보일 수 있지?

“오늘도 뵙습니다.”

“앗, 네. 안녕하세요, 대공님. 좋은 오후에요.”

나는 대공 뒤로 어느새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다 얼른 말을 정정했다.

“아니, 저녁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

빙긋 웃으며 건넨 내 말에 대공님이 한참 말이 없었다. 누군가 대공님을 뒤에서 톡 친 것 같았다.

‘대장, 대답요, 대답.’

대공님이 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눈보다 새하얀 뺨이 사르르륵, 붉은 꽃물 들듯 물들었다.

“그, 렇군요. 영애, 좋은 밤입니다.”

“으음, 그죠, 밤이라기엔 곧 저녁이 되겠지만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진하디 진한 눈동자가 더욱 진해지는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고이며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니, 이번엔 왜 우는 거죠?

“제가 말, 말실수를.”

“설마 대공님, 말실수 때문에 우시는 건, 그, 아니시죠……? 저는 괜찮아요.”

실수라고 생각도 안 한다고 정정하자, 대공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영애가 웃는 게 너무 예뻐서……”

예?

“눈물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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