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4화 (94/281)

◈9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1)

나는 당황했다.

내 얼굴이 나름 예쁘장한 건 나도 알고 있지만, 가끔 거울을 보며 만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런 날카로운 남자를 얼굴만으로 울릴 만큼 예쁜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공의 뒤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아차리고 정신 차렸다.

그래, 저 사람은 래빗처럼 세계의 뒤틀림의 피해자다. 내가 정신 차리자, 정신을……!

“그!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 대공님 당신은 왜 또 마주 고개 숙이는 건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난 얼른 할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대공님, 저흰 북부 영지에서 다시 보기로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맞아요, 그러기로 하였지요.”

“폐하를 알현한 일은 모두 끝나신 건가요?”

“아뇨, 그런 건 가신들에게 맡겼습니다.”

“아하.”

“레스터풀도…… 멸족이 두렵다면 더는 날뛰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다소 해맑은 음성이었지만 난 이미 이 남자가, 정확히는 대공가가 위명 그대로 결코 녹록지 않은 가문임은 확인한 상태였다.

“그 여자가 무슨 수를 쓰지 않는다면.”

나를 바라보며 수줍게 웃던 대공의 얼굴로 한순간 서리 내리듯 차가움과 함께 어두운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중얼거리는 말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영애, 저도 함께 가요.”

“아, 그럼 들어오시겠어요?”

“아뇨! 아뇨! 아뇨!”

대공이 그럴 수는 없다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직, 한 방에 있는 건 조금……!”

“아, 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71]

……마음은 솔직하시군요?

“날이 춥지 않을까요?”

“저는 북부에 사는 기사인걸요.”

그건 그렇지. 제국에서 가장 추운 곳에 사는 사람에게 지금 같은 날씨가 춥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대공은 내게 앞으로 북부 영지까지의 여행 일정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이미 파올로와 대공가에서 나온 안내인에게 두 차례 들었던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은 결코 춥지 않을 거예요.”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남자의 뒤로 커다란 꼬리가 보이는 듯했다. 머리 위로는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리제가 주었던 서류 중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리제가 준 정보에서 좀 놀라웠던 이야기가 있었지.

‘……이 남자가 나보다 연상이라니.’

이렇게 보아서는 영락없이 연하 같은 기분인데. 실제론 아니었다. 이 남자는 나보다 몇 살 연상이었다.

연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가?’ 하면 앳된 인상은 아니었다.

그건 외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어쩜 놀라울 정도로 순하게 접힌 눈꼬리와 눈치를 보듯 움츠린 어깨에서 보이는 거였다.

“부하들과 함께 불편함이 전혀 없도록 모실 거예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이 커다란 덩치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다니,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영애에게 불편함이 없게 갈 수 있다면 1년이 걸리더라도…….”

“아뇨 아뇨, 불편한 건 전혀 없어요.”

이게 다 대공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이라고 인사치레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호감도가 올랐다는 창이 떴다.

광증 수치만 올라가지 않으면 호감도는 제법 쉽게 올라가는데. 요정 놈이 이런 데서 밸런스를 맞춘 건지.

“영애, 그리고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대공이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옆에서 여기있습니다! 하고 무언갈 잽싸게 건넸다. 건네는 손만 삐죽 보였지만 거기 들려있는 게 뭔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 저게 뭐야.

곧 대공이 이를 양손에 들고 내게 내밀었다.

“저, 대공님 이건…….”

“북부에만 사는 몬스터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예요. 마침 이 근방에 리더 스노우 타이거가 나왔다고 하기에 당장 잡아오라 일렀어요.”

대공이 거대한 모피를 든 채 수줍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올로 경과 에스테 백작에게 영애의 연약함과 과거 병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어요.”

파올로 경?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거죠? 파올로는 아직 대공님을 불편해 할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새하얀 모피가 내밀어졌다.

엄마야, 이거 머릿가죽까지 나와 있잖아?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애써 진정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게 북부 사람들의 애정표현 방식이라잖아?

리제의 보고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북부에서 최고의 사냥감의 모피를 벗겨 주는 건 연인 간의 다정한 애정 행위이자, 연인이 아닌 사이에선 최고의 구애 행위다」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이 스노우 타이거가 어떤 몬스터인지 몰라도 나는 감사히 받았다. 아니, 받으려 했다.

받는 순간 엄청난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면 말이다.

[저런, 지나치게 무거운 걸 들어 손목에 무리가 갔습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79]

뭐야, 이 무게는? 나는 당황했다.

게다가 모피를 받다 말고 너무 무거워서 휘청한 까닭에 그대로 마차 계단 쪽으로 몸이 기울어 쓰러졌다.

“영애!”

정신 차렸을 땐, 황성에서 느꼈던 가슴팍에서 한 번 더 눈을 뜬 상태였다. 대공에게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난 눈을 깜빡였다. 곧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무슨 모피가 돌덩이보다 무겁죠……? 아니, 이건 연약한 제 손목 탓인가요?

“아, 감사합니다.”

내가 희미하게 웃자, 대공님은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지금 현기증이라도 느끼신 거라면 의사를……!”

“아뇨, 무거워서요.”

“네?”

“……무거워서요. 그거.”

잠시 대공이 말을 잃었다. 약간 평생을 전교 1등 해왔던 애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친구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게 가능해?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싱긋 웃었다. 응, 가능하네요…….

“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위험할 뻔했네요.”

“아.”

대공이 내 몸을 가볍게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황실에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참 가볍게도 든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 여성의 무게인데 말이지.

“……어째서 영애의 가족이 그리도 신신당부했는지 알겠어요.”

어째서인지 나를 내려놓은 대공님은 결연하고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아니, 뭐 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저 무게면 내가 아니라 리제 같은 다른 여자가 들어도 휘청거렸을 것 같은데.

“앞으로 영애를 갓 태어난 토끼처럼 생각할게요.”

“……네?”

“황녀님의 당부셨어요.”

……래빗? 너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리고 파올로 경의 말처럼 작은 부상에도 골절된다는 말도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잊어 주세요.”

파올로 오빠, 넌 또 무슨 호들갑을 떤 거야.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으며 대공님의 과장된 판단을 정정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바닥에 내려서고 보니, 대공님뿐 아니라 주변 기사들의 시선 또한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구나 하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저, 기사님들?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 것 같은데, 세상엔 저 같은 사람도 없진 않답니다?

“이건 담요로 가져온 것이지만 시트에 깔라 명할게요.”

하지만 이미 늦은 걸 깨달은 나는 그냥 얌전히 대공님의 한마디에 끄덕이기로 했다.

그래요, 그냥 북부의 갓 태어난 토끼 부인 하겠습니다…….

* * *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출발한 지 약 8일이 지난 오늘. 이대로 3일만 더 지나면 도착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이에 마차 여행은 물론이요, 중간 거점에 들러 포탈까지 탄 참이었다.

포탈을 탄 이후로도 북부의 수도 격인 체단 영지까지는 좀 더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처음으로 겪어본 순간이동 마법 도구는 무척 신기했지만 울렁거리는 느낌을 주어서 그리 자주 경험하고 싶은 도구는 아니었다.

그 사이 지루할 법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긴 여행을 고려해 리제가 재미난 책들을 함께 챙겨준 탓에 그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다.

“와, 이 세계의 막장 소설이란 것도 엄청나네.”

리제가 챙겨준 책이 엄청난 막장 소설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역시 과거 로판 고인물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라 순식간에 다 읽었지.

열심히 책을 읽는 내 아래 시트에는 8일 전 대공님이 선물한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가 곱게 깔려 있었다.

이뿐일까.

내 발에는 뭔진 모르겠지만 무슨 설산에만 사는 다람쥐 몬스터 털로 만든 털신이 신겨져 있었고.

내 어깨에는 설산에만 사는 누에를 잡아 실 뽑아 만든 고운 숄이 감겨 있었다.

이런 물건들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주 호사스럽단 건 알겠달까.

북부 가서도 추위를 못 느끼는 거 아니야?

똑똑.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고정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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