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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6화 (96/281)

◈9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3)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겨우겨우 대공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따라나서느라 1차로 문기둥에 손목을 찧었고 2차로는 계단에서 기우뚱 기울어 넘어질 뻔했다.

결국 대공님이 잡아 주었다. 모피를 받을 때와 똑같은 자세였다.

그가 나를 내려놓고는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호, 혹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세요? 아프신 거였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아야아야.”

내 손목. 슬쩍 봤더니 빨개져 있었다. 그만큼 다급하게 잡은 탓이다.

이 대공님은 내가 아야, 하고 외치는 순간부터 울 준비가 된 사람 같았다.

반사적으로 차오르는 눈물을 보며 나는 황급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게 아니라, 같이 먹으려구요! 같이 먹으려 안 먹은 거예요!”

“네?”

“기다린 거라구요!”

제타르 경 말에 따르면 이 대공님이 미리 앞서 도시에 간 건 내가 잘 만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미리 마법사를 대동해 방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으라 지시했다고.

“저희를 보내도 될 텐데 굳이 직접 가셨지요.”

아니, 그렇게까지 해줬다는데 나 혼자 밥을 먹기도 그랬다.

제타르 경과 기사들은 내게 저녁을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내가 사양하는 이유를 듣고서 난감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흡족한 기색이었다. 자기들의 촉이 역시 더 좋다나 어쨌다나.

사실 내가 어떤 처지인지 알게 되면 나를 응원하지만은 못할 텐데.

아무튼 간에 이 대공님이 멀쩡한 사람 하나 잡기 전에 얼른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게 되었다.

정말 지치지도 않고 대단하구나 이 사람.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78]

“그런,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어느새 호감도도 거의 80에 육박했는데, 이렇게 쭉쭉 올라만 가면 소원이 없겠다.

“아니에요, 감사하실 일은 아니죠.”

사실 기다리면서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대공님도 그렇지 않을까?

막 손을 흔들며, 준비되면 함께 저녁을 먹자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대공님이 그대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날카로운 기세에 내가 놀랄 정도였다.

“대공님?”

“영애, 얼른 마차로 돌아가세요. 어서요, 아니. 시, 실례할게요…….”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허리로 손이 쑥 들어와 나를 계단 위로 올렸다. 나는 마차 바닥에 앉혀진 채 눈을 깜빡였다. 뭐지?

“무슨 일이에요, 대공님?”

“몬스터의 습격이에요.”

난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두두두두, 땅이 울리는 진동과 거친 소리가 들렸다. 대공은 유순하게 웃으며 한걸음 물러났다.

“영애가 걱정하실 건 아무것도 없어요.”

분명 순하게 웃는데 그 웃음이 이상했다. 8일 내내 얼굴을 보았기에 이젠 더 잘 보였다.

이 남자의 웃음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두려움인가? 아니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걱정, 혹은 염려에 가까웠다.

“영애,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가요?”

“……오늘밤에는 절대 마차에서 나오지 말아 주세요.”

되짚어보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밤새도록.”

식사는 제타르를 통해 보내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탁. 닫힌 문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뻐끔였다. 저 얼굴, 뭔가 진짜 이상했는데.

생각은 길어지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끼이익! 캬아아악!

문밖에서 곧 처음 들어보는 매서운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결코 평범한 짐승의 울음소리는 아니었고, 아마 몬스터겠지.

나는 황급히 일어나 가져온 책을 뒤졌다.

《제국 북부 서식 1000종 몬스터 도감》. 이 또한 리제가 함께 챙겨 준 책이었다.

“끄응, 하지만 내가 지금 이걸 본다고 무슨 몬스터인지 바로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도 울음소리만 듣고서는 더욱더.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창밖으로 몬스터들의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새카만 비늘을 가진 것들은 부리가 독수리처럼 뾰족했고, 몸통은 카멜레온처럼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특무대 3사단 단원들은 손쉽게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문제가 있다면 몬스터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보이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버거워 보이진 않았다.

‘……근데 왜 난 불안한 거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생존 눈치를 올려주는 스킬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보아, 이 상황에는 뭔가 더 있다. 뭐지?

이윽고 지금까지 들렸던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무어라 거칠게 외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젠장, 블랙 코도모 도마뱀 킹이 왜 여기에?”

“엄호해!”

그르렁거리는 울림이 어찌나 큰지, 마차 안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으아, 괜찮겠지? 그래도 대공은 북부의 패자였다. 창문 밖 기사들도 당황한 것 같지만 난감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를 증명하듯 얼마 안 가 거대한 울음소리를 냈던 몬스터가 이번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상황이 끝난 것 같은데 다행이다. 이제 진짜 마무리된 건가?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어?

“젠장, 대장님!”

“다들 준비해! 어서!”

분명 몬스터의 울음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 창문밖으로 살짝 보이는 기사들은 분주해 보였다. 심지어 몬스터들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빨리 대장님을 상대할 준비해! 죽기 싫으면!”

동시에 내 귀로 알람 소리가 들렸다.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서브) - ‘사랑의 힘으로 얍!’

북부 영지로 가던 도중 상급 몬스터 블랙 코도모 도마뱀 킹을 만난 당신!

하지만 북부 대공님의 멋진 활약으로 무사히 퇴치했습니다!

저런, 하지만 전투의 흥분으로 북부 대공님의 ‘광증’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어요.

사실 대공님의 ‘광증’ 증세는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몬스터’로 보이는 것!

이대로 두면 대공님이 아군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 로맨스 판타지 세상은 사랑이 있는 세계! 이럴 때 대공님이 첫눈에 반한 당신이 나서 봅시다! 아직은 광증이 심하지 않을 때,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을지도?

물론 실패해서 운이 나쁘면 죽을지도 몰라요!

내용: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앞에 나서서 광증을 가라앉히자.

실패 시,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 +10,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10

보상: 건강 수치 5,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5,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 –4, 아이템 ‘사이렌 오더’ 강화 주문서

※주의하세요,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 있습니다!

기한: 30분]

“미쳤어?!”

퀘스트 창을 보자마자 절로 외쳤다.

대공 앞에 나서라고? 미쳤나요? 나부터 죽을 것 같은데? 아니, 이 퀘스트 내용은 대체 뭐야?

광증이 뭐? 아군을 적으로, 그러니까 몬스터나 괴물로 인식한다고?

“후, 진정하자. 그래, 진정해.”

그래. 광증이라잖아. 이 정도는 돼야 광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흥분이 가라앉혀지지 않아서 가슴 한쪽이 온통 뜨겁게 들끓었다.

“크으윽! 막아! 혼자 가시게 둬선 안 된다!”

“네엣!”

밖에서 싸움이 치열한데, 저기 한복판에 나가란 말이지…….

퀘스트에는 ‘실패 시 사망’이라고 적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 있다’는 건, 저런 험한 싸움판에 끼어들면 눈먼 칼에 엄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경고하는 거겠지?

‘빙의 스킬을 쓰기도 애매한데…….’

현재 대공에게는 몸이 약한 것처럼 소개하고 결혼 거절의 변명으로 써먹기도 했다.

이제 와 나를 의심스럽게 볼 상황은 주고 싶지 않았다. 대공이 아니더라도 기사들에게도 말이다.

후, 일단 가자. 정말 위험하면 이상하게 보든 말든 엠버넷 씨 불러야지 어떡해.

나는 손을 불끈 쥐고 마차 문을 열었다.

그래, 퀘스트가 쉬울 거라곤 생각 안 했다!

“크으윽! 부대장님!”

문을 열자마자 어이쿠. 나는 화들짝 놀라 넘어가지 않게 몸에 힘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게 문을 열기 무섭게 엄청난 소리와 더불어 기사님 한 명이 이쪽으로 날아왔으니까. 매번 요리를 담당했던 요엘 경이었다.

“요엘 경, 괜찮으세요?!”

“괜찮습니…… 영애?!”

나를 보던 기사의 얼굴이 깜짝 놀랐다. 경악한 표정.

“무엇하십니까! 들어가십시오, 얼른! 어서요!”

요엘경은 그렇게 내뱉은 뒤 황급히 일어나서 다시 달려갔다.

하하하. 내가 실수로 마차를 열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죠…….

나는 바닥을 보다가, 후 숨을 내쉬며 구두를 벗었다. 굽이 높진 않지만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사뿐 내려와 앞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앞은 아수라장. 개판이었다.

사방에 쉽게 베어 넘겼던 검은 비늘을 가진 도마뱀 몬스터 사체가 널려 있었다. 나는 널려 있는 사체 사이에서 손쉽게 대공님을 찾았다.

숨이 꿀꺽 넘어간다.

……야, 저건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한데?

[요정은 빙의자 님을 응원해요! ҉ ٩(๑>ω<๑)۶҉]

응원이고 나발이고! 눈이 맛이 갔잖아! 아군을 때리잖아! 기사님들 날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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