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7화 (97/281)

◈9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4)

그랬다. 멀지 않은 곳에 수하들과 대치한 대공님이 보였는데, 뺨과 옷에 검은 피칠갑을 한 채, 특히 뺨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검은 쪽은 몬스터의 피, 붉은 쪽은…….

으엉! 엄마, 저 무서워요!

‘야 임마, 육아물 퀘스트에서도 래빗에게 덤비라는 미션은 없었잖아!’

난이도 무슨 일인데, 미쳤냐고!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저 시선, 붉디 붉은 시선 아래 검은 무언가 도사리는 것 같았다. 아까 실패하면 광증 수치가 10이나 올라간다고 했지?

거기다 퀘스트 문구 중에 아직은 광증이 심하지 않을 때, 라고 했다.

그것인즉 여기서 광증 수치가 더 올라가면 감당 못 할 수준이 될지도 모른단 소리지? 지금도 무시무시해 보이는데!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뭐든 시도를 해 봐야 한다.

나는 숨을 꾹 참고 앞으로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공과 대치할 타이밍은 빠르게 찾아왔다.

“크으으읍, 으윽!”

내가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치지지지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옆으로 쓰러졌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타르 경이었다. 이미 뺨에 깊은 상처가 난 상태여서 몹시 힘겨워 보였다.

제타르 경이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영애! 이게 무슨!”

“하하하…….”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한 손에 치지직 검을 끄는 소리. 무표정한 대공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타르 경의 앞을 막아섰다.

“비키십시오, 영애! 위험합니다!”

제타르 경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기사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미안하고 감사하지만 안 들려요!

제타르 경 앞으로 뻗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날은 추웠고, 나는 무서웠다.

“저, 대공님…… 마, 마차 안에만 있으라고 하셨는데 죄송해요.”

내 음성이 들려오자,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던 대공님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와 동시에 아우성치던 소리도 사라졌다.

침묵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소리가 너무 살벌해서, 혹시나 다치셨을까 봐…….”

되는대로 내뱉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럴 때일수록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은 방해 안 되게 안에만 있어야지.

말을 정정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대공님의 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이상하네…….”

뚝. 대공님의 뺨을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진다. 이 첨예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내 손이 주먹을 쥔 채 달달 떨렸다.

“이젠 몬스터들이 영애 얼굴까지 흉내 내고.”

네? 네에?! 아니, 아니요. 본인! 본인인데요!

“얼굴……? 얼굴이라고 했습니까? 영애! 똑똑히 들었습니까?”

“네? 아, 네, 제타르경!”

뒤에서 가만히 있던 제타르 경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런, 영애 뭐든 더 외쳐 보십시오! 뭐든요!”

외쳐? 뭐를?

하지만 더는 주워 삼킬 시간은 없었다. 내 몸이 뒤로 이끌리는 동시에 눈앞에서 검들이 충돌했다.

채애앵!

제타를 경이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감싸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힘겹게 검을 막고 있었다. 대공님의 표정은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여유로웠다.

“감히.”

그러나 나를 향한 순간 시선이 가느스름해졌다.

“거슬리게.”

아악, 아니아니, 제타르 경 죽겠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 대공님!”

멈칫.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던 것이 전부였다는 듯 검 한 방에 제타르 경의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영애를 지켜! 호위해!”

“넷!”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다가와 뒤를 노렸고 대공님은 다시 이들을 상대하느라 조금 뒤로 떨어졌다.

그러나 간간이 무표정한 눈이 나를 향했고 어둡도록 깊은 눈동자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하나둘씩 기사님들의 검이 날아가고 막 마지막 기사님과 검을 맞대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검이 기사님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야말로 숨이 꿀꺽 넘어가는 상황.

나는 매우 다급하게 소리쳤다.

“대, 대공님! 대공님! 뭐라고 해야 해, 아우, 그, 그!”

여기서 보통 뭐라고 말해야 정신을 차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리제가 주었던 대공가에 대한 정보 조각들이 정신없이 머릿속에서 넘어갔지만 답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휴고 렉타스 체단!”

떠오르는 거라곤 이름뿐이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대공님아!

“…….”

그리고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검이 멈췄다.

대공님과 검을 맞대던 기사님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날카로운 검 끝을 보며 숨을 삼켰다.

“휴고…… 렉타스 체단…… 전하?”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검 끝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그대로 내려간다.

툭 바닥에 꽂힌 검을 뒤로 한 채 올려다보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하는 대공님이 보였다.

아, 초점 돌아왔다.

……돌아온 거 맞지?

“대공님?”

“……여, 영애?”

[퀘스트(서브) - ‘사랑의 힘으로 얍!’이 완료되었어요! (∗❛⌄❛∗)]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아, 돌아왔구나.

긴장이 풀리면서 나는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히잉……. 흐엉…….”

X나 무서웠다, 진짜.

그대로 무너져내린 몸이 누군가의 손에 덥석 잡혔다. 시야에 당황한 대공님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 영애!”

쓰러지는 나를 잡긴 잡았으나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까 그 눈 돌아간 모습을 보고 나니 더욱 확실하게 알겠다.

“괜찮으신가요……!”

“네, 네에…….”

이 모습은 정말, 정말로 순한 맛, 순한 버전이었다는 걸!

이 남자 속에 시방 아주 무서운 것이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나를 단단하게 잡은 팔을 느끼며 속으로 ‘당황하지 말자’ 하고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하자고.

그래, 북부 대공님이 광증 하나 정돈 앓아줘야 대공님이지!

처음에 광증이란 미지의 개념에 두려움을 갖긴 했지만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해.

‘저주’.

이거야 로판 남주들에게 으레 클리셰로 나오는 요소 아니겠는가?

저주에 걸린 남주와 이것을 풀어줄 수 있는 건 바로 나?! 그래, 내가 네 인생을 구원하겠어!

……하는 소설도 충분히 봤다. 소재 가리지 않고 잘 나오는 클리셰기도 하다.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남주의 인생까지 구하고 싶은 건 아닌 여주는 어떡하죠……?’

그랬다. 인생을 가볍게 살아가고 싶은 나 달린 에스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목표 같은데.

거기다가 클리셰로서 사용되는 ‘저주’ 좋다 이거야.

이 세계는 원작 소설과 클리셰가 뒤틀려서 만들어진 거라며!

그래서 이 대공님이 ‘아방한’ 북부 대공이 된 거라며!

그런데 이런 것만 꼭 로판 클리셰로 남겨두기 있냐? 잘 생각해 보니까 원작에 이런 요소도 없는 것 같은데!

‘망할, 순전 제멋대로야.’

이딴 시스템을 만든 요정이란 놈 나와, 나오라고!

[저런, 요정은 부끄러움이 많아요! 나설 수 없어요! (´∇`*)ノ]

나는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그곳엔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귀여운 얼굴이 있었다.

‘……이 날카로운 눈매가 귀여워 보이다니.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변하는 퀘스트라도 받았나.’

객관적으로 내 취향인 얼굴, 거기다 난 까칠한 남주가 우는 걸 몹시 좋아하기까지 한다.

이건 야구로 치면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 직구에 양궁으로 치자면 중앙 캠까지 부숴버리는 퍼펙트 샷이었다.

“여, 영애가 저 때문에 다치신 거지요……?”

“네? 아뇨, 아니에요. 저 멀쩡해요!”

내 말에도 대공의 루비 같은 새빨간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봐왔던 것 중에 제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대체 왜?!

“울지 마세요! 대공님, 뚝! 뚝!”

당황해서 그만 아기 다루듯 이 남자를 달래버렸다.

래빗의 유모로 있으며 몸에 익은 행동이었으나 역시 씨알도 안 먹혔다. 우는 모습이 아이처럼 서러워 보이는 거지, 이 남자가 진짜 아기는 아니니 말이다.

나는 고심 끝에 대공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우리 래빗은 이러면 울음을 좀 그치던데.

“저, 영애 괜찮으십니까?”

제타르 경이 다가왔다. 이 사람까지 왜 그러지?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고개를 내렸다가 깨달았다.

‘아.’

발이 엉망이었다.

조금 전 구두를 신고 뛸 수는 없겠다 싶어 벗어버린 결과였다.

생채기가 꽤 생기긴 했지만 많이 아프진 않았다. 아니, 사실 고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출혈이 있어요! 빙의자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 ﹏ ˂̶᷄⌯)゚ 현재 건강수치: 83]

아니, 안 아프다니까 건강 수치는 왜 떨어지고 난리야.

“네, 괜찮아요. 이 정도 상처는 별 거 아닌걸요.”

제타르 경 외에도 기사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거나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대공님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팔을 흔들어 주었다.

발이 아프진 않은데,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이 좀 추웠다. 대공님에게 붙잡힌 팔과 허리는 으슬으슬 떨려왔다.

급한 마음에 웃옷이고 숄이고 나 팽개친 내 탓이다. 털신이라도 신을 걸 그랬지.

“……영애는 그동안 많이 아프셨다고 하셨지요.”

대공이 곧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나를 살짝 들었다 내려놓았다.

나는 발에 닿는 따뜻한 감각에 놀랐다. 이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코트 속 품에 내 발을 넣은 것이다.

발끝으로 보드라운 털이 닿았다. 어째 등줄기가 간지러워졌다. 아니, 울고 수줍어하고 내외할 건 다 하면서 이런 스킨십을 하다니.

“그래서 영애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습관이 생기신 건가요?”

얼떨떨해하는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이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묽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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