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5)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32/50]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33/50]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35/50]
……음? 뭐지. 왜 이 언니만 수치가 내려가는 건데?!
‘마치, 이 언니만 생각이 다른 것처럼 보이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선은 참고해둬야겠다.’
마차에 탄 뒤에도 내려 달라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여전히 대공님에게 안긴 채였다. 머리가 핑글 돌아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니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 그 안엔 수줍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저 쳐다만 보았을 뿐인데, 그의 눈밑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절경이었지만…… 이거 마음 놓고 감상해도 되는 건가.
“영애, 불을 피워 놓으라고 얘기해 두었어요.”
“아, 감사해요.”
“아니에요, 인사하지 마세요.”
내 시선이 위를 향했다.
“영애가 이곳에서 감사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네?”
나는 피어나는 그의 웃음을 보며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영애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혹하면 안 되는데, 가끔 저 얼굴을 멍하니 보게 된다.
그나저나, 진짜 한 달 뒤에는 여기서 돌아갈 수 있긴 한 걸까…….
래빗, 오늘따라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네.
* * *
“…….”
높디높은 하늘, 그 아래에 펼쳐진 언덕, 그 위에 선 조그만 인영은 마치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잘 어우러졌다.
언덕에 선 이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아기였지만 어째서인지 표정이 뚱했다.
“왜 그러지?”
묵직한 목소리에 아기가 고개를 돌렸다.
“뉴가 날 부룬 것 같아써.”
“내가 느끼기로 이 근처에 우리 말고 사람은 없는데.”
“아라.”
아기, 래빗은 볼을 부풀렸다. 본인이 어떤 표정인지 모르는 듯했다.
“내가 더 잘 안댜고.”
함께 있던 남자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여동생을 향한 채였다.
2황자 라이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상처가 나 있었다.
처음 상처를 접한 시종들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감히 우리 황자님의 국보급 얼굴에 상처라니! 마법사를 데려와 치료해야 한다, 최고급 회복 물약을 써야 한다, 아주 난리였다.
그러나 라이칸은 이 모든 것을 물렸다.
래빗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뺨운 치료 안 할 고냐? 그고 키먀이라에게 당한 거라며. 독이 있울 텐데.”
“괜찮다, 치료 안 해도.”
키마이라는 사자 머리와 곰의 몸, 독수리 날개와 뱀의 꼬리를 가진 거대한 몬스터였다.
그리고 래빗이 부탁한 보약 재료 목록에 있는 몬스터이기도 했다.
“그보다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을 텐데…….”
“으윽, 모, 몰 말이냐?”
“우리 약조 말이지. 내가 널 몰래 데려가는 대신 내 호칭을 앞으로도 바로 써 주기로 했던 걸로 기억한다만. 내가 알기로 넌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고.”
“……으웅, 알아, 안댜고, 오, 오뺘!”
래빗이 조그만 손으로 마구 제 뺨을 비볐다. 도무지 이 호칭엔 익숙해지지 않았다.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가족이잖아요. 영 적응이 안 되면 어때요, 황녀님께는 저도 있구요.’
노래하듯 예쁜 목소리가 래빗의 귓가에 울렸다.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유모, 앞으로 쭉 함께할 사람, 달린의 목소리다.
래빗은 만족스럽게 슬쩍 웃는 라이칸을 노려보다가 입을 오물오물 열었다.
“구래소, 그 상초는 정말 치료 안 한다고?”
“어.”
“댸체 왜?”
“보여 줄 사람이 있으니까.”
라이칸은 잠시 앞을 바라보다 머쓱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직접 치료해 줬으면 하니까…….”
“듕증이군.”
“…….”
라이칸은 부정하지 않았다. 래빗은 제 오빠를 더 나무라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흐움, 얼마나 남았을까.’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설산이 있었다.
“우리, 얼마나 더 가야 하눈 고지?”
“꽤 많이.”
“그래? 그럼 빨리 개초롬 달료라!”
“……넌 에스테 영애와 떨어진 뒤 말이 더 험해졌군.”
“그래소 모?”
“아니 뭐, 상관없겠지.”
북부 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 꽤 먼 여정이 남아 있었다.
* * *
“흐아아!”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 마음껏 비명을 질렀다. 물론 아무도 없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으어어, 진짜 피곤하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검푸른 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내가 푹 자긴 했네…….”
벌써 저녁이었다.
분수대를 복구하고서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간신히 씻고서 바로 죽은 듯이 잠들었다.
건강 수치가 후드득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도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게 마지막엔 수많은 인파 앞에 나서야 했으니까 말이다.
‘뭐, 그 덕에 소문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마구 흩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아, 일단 악소문은 해결했는데…….
“효과가 너무 과한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막에 영지민들이 외쳤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영애야말로 고대 짐승의 화신이셨다!’
왠지 혹 하나 떼려다 오히려 또 다른 혹을 붙인 기분이 드는데.
물론 이 새로운 혹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계약 결혼이 끝난 뒤 이 영지에서 나갈 수나 있을까 약간 고민될 뿐이지.’
좋아, 지금으로써는 그리 나쁜 방향은 아니니 일단 넘겨 두자. 한 달 뒤까지, 아니 그 뒤로도 살아남는 게 먼저니까.
그럼 다음으로는…….
마차에서 보았을 때 퀘스트 공략 대상인 ‘리바’의 신뢰도가 마구 솟았었다.
속도만 보아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도 그대로 수치를 달성할 것같이 엄청난 속도였지.
반면에 칼리는 어땠던가.
‘그 언니, 수치 변화가 이상했어.’
리바의 수치가 오른 것으로 봐서는 영주성에도 분수대 복구 소식이 빠르게 퍼졌을 터.
그런데도 홀로 수치가 떨어졌지,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그 언니가 품고 있던 의심이 이번 일로 더욱 깊어졌거나…….
아니면, 누군가 선동했거나.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앞선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이쯤 되면 뒤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소거법을 사용하면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자,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어떻게 접근한다…….
똑똑.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소리 없이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네,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피로가 큰 것 같은데……. 준비하라 지시했던 건 어떻지?”
“아, 특무대 1사단과 2사단이 움직였습니다. 전하기론 맡겨만 달라고 하더군요.”
문 옆으로 대공님의 어깨가 삐죽 튀어나왔다. 문 앞을 지키던 아스와 대화 중인지 목소리만 도란도란 들려왔다.
지금까지 목소리가 가장 좋았던 남자는 2황자 라이칸이었는데, 이 대공님의 목소리도 그에 못지않게 좋았다.
곧 방문 뒤로 고개를 삐죽 내민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에 반짝 반가움이 스쳤다.
“영애!”
언제 진지한 표정이었냐는 듯 그의 눈꼬리가 사르르 내려가더니 한달음에 달려왔다.
다리가 길기도 하시지.
“좀 괜찮으신가요? 주무신다고 하셔서 밖에서 기다렸어요.”
“엇, 기다리셨다구요? 그, 언제부터……. 아, 몸은 괜찮아요!”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대공님이 눈을 휘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해질 무렵에 잠시 들렀었던 거라…….”
나는 근처의 시계를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이곳에선 해가 꽤 빨리 지던데, 최소 두 시간은 기다렸다는 소리였다.
“헉, 춥진 않으셨어요?”
“아, 영애 저는 추위를 안…….”
“세상에, 손이 차가워지셨네요.”
“맞아요, 조금 추웠던 것도 같아요…….”
나도 모르게 대공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따라 늘 끼고 있던 장갑도 벗고 온 탓에 손끝이 차가웠다. 끙, 깜빡하신 건가.
내 탓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해졌다.
“제가 피곤했나 봐요, 오래 잤네요…….”
“아뇨, 아뇨, 영애 탓이 아니죠! 그냥 제가 살짝 오, 오한을 느껴서…….”
“헉, 대공님 이쪽으로 오세요.”
생각해 보면 북부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이 정도 날씨에 추위를 탈 리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대공님의 말을 믿게 된 것은 그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가운, 거의 안 입은 거나 다름없는 두께 아니야?’
어제까진 그나마 꽤 두꺼운 가운을 걸치시더니!
‘……보기는 좋지만.’
꽁꽁 싸맨 다른 사람에 비하면 헐벗은 수준이다.
설마 내가 좋다고 해서 저렇게 입은 거야?
나는 그를 벽난로 앞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내가 쓰던 담요까지 덮어 주었다. 대공님은 담요를 머리에 쓰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