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6)
“대공님께서 건강하신 건 제가 매우 잘 알지만, 그래도 오늘따라 너무 얇게 입으신 것 같아요.”
“아, 이건 영애가 좋아…….”
“걱정되어요.”
“……영애가 걱정된 나머지 아무거나 급히 걸쳐서 그런가 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래도 앞으론 조금 더 따뜻하게 입으시면 좋겠어요.”
내가 개복치 같은 몸뚱이로 다녀 보니 알겠더라.
건강은 가지고 있을 때가 최고인 것을…….
“그, 영애도 함께 앉으세요.”
대공님이 조심스럽게 나를 붙잡았다.
어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옆으로 이끌려 갔다.
사실 지금 상태가 상태인지라 약한 힘에도 중심을 잃고 발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탁, 상체를 잡고 일어났을 땐 이미 그의 품에 넘어진 상태였다.
“……음, 하하. 저희 요즘 이렇게 보는 일이 잦네요?”
“…….”
“죄송해요, 대공님.”
나를 내려다보던 대공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수줍게 미소했다.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영애. 이런 일이…… 백번쯤 더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작게 중얼거린 대공님이 나를 살포시 들어 의자에 앉혔다.
곁눈질로 본 뺨과 귀가 토마토처럼 새빨갛다. 요즘은 눈물보다 빨개진 낯을 더 많이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드는 긴장감에 숨을 삼켰다.
‘퀘스트 마지막에 연출해야 할 장면이 정해졌잖아?’
골치가 아팠다.
이번 메인 퀘스트는 총 두 가지 미션을 완수 해야 했다.
첫 번째, 남자주인공을 원작과 같은 북부 대공의 성격으로 만들 것.
두 번째, 첫 번째 조건을 달성한 뒤 퀘스트가 선정한 장면, 클라이맥스를 연출하는 것.
그리고 그 ‘선정 장면’이란 게 하필…… 계약 결혼의 끝을 선언하는 장면이었다.
‘이 대공님이 더는 계약으로 남고 싶지 않다고 한 상황에서 말이지…….’
숨을 꼴깍 삼켰다.
퀘스트에 분명 예시가 필요하면 환상으로 어떤 장면인지 보여 준다고 했었지.
‘시간이 될 때 한번 보는 게 좋겠어.’
일단 칼리의 신뢰도가 떨어진 이유를 찾고 이 대공님의 남은 호감도를 올리는 게 먼저다.
물론 광증 수치도 관리하면서 말이다.
‘어째 갈수록 미션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요정을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육아물보다 쉽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나와라. 고생은 더 하잖아!
어쩌겠나, 우선 직면한 일들부터 차근차근 처리해야지.
분명 뭐든 방법이 있을 거다.
“음, 그런데 대공님…….”
나는 말을 꺼내려다 말고 흠칫했다.
문 앞에서 얌전히 서 있던 린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저 눈은…….’
린은 아스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다 말고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린의 표정을 고스란히 본 뒤였다. 기대로 가득한 얼굴 말이다.
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내가 로판 주인공들이 썸을 타는 장면에서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영애, 출출하진 않으신가요?”
“아? 음, 조금 배가 고프긴 하네요……. 대공님께선 식사하셨을까요?”
“아뇨, 아직이에요. 영애랑 함께하고 싶어서……. 그리고 영애 무슨 말씀을 하려 했나요?”
“아,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럼 저희 식사부터 할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린과 아스가 다가와 식사에 대해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이 도착했다. 식당까지 나가고 싶진 않았던 내 의사를 존중해 준 덕분이었다.
와, 맛있겠다. 스튜는 아주 맛있어 보였다.
아스와 린은 시중을 들기 위해 탁자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아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 아가씨 정말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잠시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아스. 네, 얼마든지요.”
아스는 잠시 대공님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저어, 두 분께서는 약혼 관계이시지만 실질적으로 혼인하신 거나 마찬가지시라고 들었습니다. 혼인 서류도 이미 제출하셨다고도요.”
“음, 그렇죠?”
아, 바깥에는 그렇게 알려졌었지. 나는 눈을 굴리다가 살짝 끄덕였다.
나와 대공님이 아직 약혼 관계인 건 에스테 가문의 고집을 들어 준 거였고, 대외적으로는 혼인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건가요?”
“아 그게…….”
계약 결혼인 탓에 혼인 서류를 제출하기 전이란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대공님뿐이었다.
“혹시 두 분의 합방은 언제부터 준비하면 될까요?”
“네? 크흡, 콜록! 콜록! 네, 뭐, 뭐요?”
“괜찮으세요? 여기 물입니다!”
나는 아스에게서 얼른 컵을 받아 들고 기침했다.
정신을 차리니 대공님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애, 괜찮으신가요?!”
“크흡, 흡, 네, 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놀랐네요…….”
“아뇨, 아닙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아가씨의 시녀다 보니…….”
“아니에요, 물어볼 수 있죠. 그 합방…….”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대공님이 어깨를 움찔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소리는 아니지.’
우리야 계약 결혼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우리가 부부가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으니…….
으음, 그래, 분명 이상한 게 아닌데. 나한텐 충분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합방? 합방이요? 바로 침대행이요?
“아하, 역시 식을 올리시고 하시는 걸까요?”
다행스럽게 린이 활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얼른 끄덕였다.
“이,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대공님은 어떠실까요?”
“아, 저, 저는!”
대공님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가 떼어 냈다. 이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청순해 보이는 잘생긴 얼굴이 발긋 달아올랐다.
“영애가 원하면 언제든지…… 오, 오늘이라도!”
옆에서 린이 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스가 얼른 그녀의 등을 쳤다.
“아뇨!”
나는 황급히 외치고는 입을 가로막았다. 아니, 아니. 그건 참아 주세요, 대공님. 이 세계에서 제대로 연애도 못 해봤는데!
“그, 그건 조금만 더 시간을…….”
“물, 물론이에요, 영애! 저는 절대 서두를 생각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영애의 뜻에 따른다는 이야기였어요.”
다행스럽게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봉합되었다. 이게 정말 봉합된 건진 모르겠지만……. 이후로 식사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으음,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들어서 괜히 심장 벌렁거리네.’
하기야, 지금까지는 너무 이런 것들과 동떨어져 지내왔지. 매번 살아남기 바쁘지 않았나.
슬프게도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핑크빛 간질간질한 로맨스든, 19금틱한 어른들의 연애든 어쨌거나 다 살아남아야 도전해 볼 수 있지 않겠어?
식사가 끝나고 대공님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즈음, 나는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대공님을 향해 줄곧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었다.
“칼리 말인가요?”
“네.”
“으음, 칼리가 어떤 사람이냐니…….”
대공님은 뜻밖의 질문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물론 반쯤 이해한다는 표정도 함께였다.
“역시 이제 와 응징하고 싶어졌을까요?”
“아뇨? 아뇨! 그게, 그…… 칼리 경은 아무래도 제가 동경하는 여성상이셔서요.”
“동경이요?”
“네. 키도 크시고 전에 가르카 님과 대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검도 정말 잘 쓰시더라구요. 제가 검술이 뛰어난 여성분을 동경하거든요.”
나는 내 손목을 슬쩍 만졌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엠버넷 경도 우리 래빗도 좋아하니까.
“오빠가 황실 기사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제게는 오래 검을 잡을 만한 힘이 없다 보니 말이에요…….”
슬쩍 대공님을 보자, 충분히 납득한 듯했다. 휴, 다행이다.
그런데 대공님이 돌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영애, 검은…… 제가 더 잘 써요.”
“네? 아, 네. 그거야 그렇죠. 대공님이 검 쓰시는 모습이 제일 멋있지 않을까요?”
“……그, 그렇게 생각하시면 고맙지만요.”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2) 현재 호감도: 90]
끙, 분수대 앞에서 광증 수치가 한 번 오른 탓에 호감도가 내려간 게 아쉬웠다.
그래도 이 정도는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종의 예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호감도가 빨리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으음, 칼리는…….”
대공님의 설명을 듣자면 칼리는 이 영지 내에서도 유서 깊은 명문가 사람이었다.
아, 그전에 이곳에서의 명문가란 중앙의 기준과 달랐다.
‘대대로 뛰어난 전사를 많이 배출할수록 명문가라지.’
어주 오래전부터 체단 가문과 함께 설산에서 몬스터를 잡아 온 이들이란 소리였다.
칼리의 가문도 이와 다르지 않았고, 특히나 그녀의 조모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였다고 한다. 그 피를 물려받은 칼리 또한 대단한 전사라고.
‘흐음, 유서 깊은 가문이라……. 확실히 더 보수적이겠네.’
그 언니의 신뢰도가 계속 내려갔던 이유가 이젠 확실히 잡힐 것 같았다.
날이 밝는 대로 한번 찾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