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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0화 (120/281)

◈12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7)

“영애,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네, 대공님도요.”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대공님은 이내 결심한 얼굴로 다가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저, 저는 언제라도 좋아요, 영애. 합방…….”

내 손끝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이 떨어졌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1]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2) 현재 호감도: 93]

나는 내 손을 한참을 바라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간간이 겨울바람 소리가 들렸다. 꽤 매서운 바람이긴 했지만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상체를 침대에 기댄 채로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그 분수대를 복구한 건 영 이상하단 말이지.’

요정은 내 능력치로 이룬 일이라고 했다. 분명 내게 마법 쪽의 능력은 없지 않았나? 그럼 ‘나만의 로판’ 기능인가?

아니다. 그랬다면 요정이 이거라고 말했을 거다. 영 석연치 않단 말이지.

고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공님의 호감도를 100까지 채워야 하는 건 알겠어. 그럼 그다음에 표시되어 있던 플러스 알파는 대체 뭘까.’

나는 메인 퀘스트를 떠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론 식사 자리에서 나왔던 합방 이야기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나도 참. 그 후로 유달리 얇은 가운을 걸친 그의 널찍한 어깨나 단단한 가슴을 흘끗거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짝! 내 뺨을 찰싹 쳤다.

으으, 일단 잠이나 자자. 내일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다시 눈을 감았을 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렇게 그대로 날이 밝을 줄 알았는데…….

눈을 떴을 때, 나는 웬 새하얀 공간에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곳이었다.

‘분수대를 복구했을 때 보았던 곳이잖아?’

분명 분수대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졌을 때, 잠시였지만 나는 이 공간에 있었다.

-캉!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빛이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형체를 갖췄다.

그리고 낮에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우?”

탐스러운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게 나타난 형상이 이 거대한 공간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여우의 모습이었으니까.

호칭을 붙이자면 ‘아기 여우’라고 할 수 있겠다.

여우는 나타난 뒤부터 열심히 자기 앞발을 핥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휙 들더니, 핫, 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검고 동그란 눈동자가 크게 깜빡였다.

-캉!

여우가 허공으로 퐁 뛰어올랐다.

“으아, 엄마야!”

나는 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여우를 보며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다행스럽게 여우가 무겁진 않았지만…….

‘보, 복슬복슬해!’

뭐지, 이 푹신푹신함은?

좋은 냄새가 나! 포근해! 그리고 귀여워!

나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넌 뭐야?”

내 목소리에서 당황이 절로 묻어 나왔다.

이 여우는 대체 무엇인가.

물론 짐작이 가긴 하는데, 사실 믿고 싶지 않았다.

-나, 둑스! 둑스!

“……신? 그으, 위대한 짐승?”

-응!

그래,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듣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짐승이라며.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건 내 품에 쏙 안기는 아기 여우인데?

아, 물론 부드럽지만! 포근하지만!

“정말이야? 네가 정말 그 신이라고?”

-응! 안 해, 거짓말!

여우가 캉캉 울었다. 긴 주둥이를 내게 들이밀자 촉촉한 코가 내 뺨에 닿았다.

“와, 약해 보여…….”

-안 약해!

“으응…….”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 아기 여우는 내가 톡 치면 뒤로 발라당 넘어갈 것 같았다.

슬그머니 귀밑을 슬슬 긁어 주자 자지러지는 울음을 토했다.

‘어디서 여우가 갯과라는 이야길 들었는데.’

……진짜 강아지잖아?

-거기! 거기! 조아!

“어어, 그래…….”

나는 더 긁어 주다 말고 슬쩍 손을 멈췄다.

“정말 약하지 않다고?”

-안 약해! 이 땅 내가 지켜!

“북부 영지 말이야?”

여우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끄덕였다. 인간들은 그렇게도 부른다며.

-원래 이렇지 않았어! 내 몸, 아주아주 커다랗고 위대해.

“그럼 지금 모습이 진짜 모습은 아니란 거야?”

-힘을 모두 줬어, 이 땅에, 30년 전에. 그러지 않으면 지킬 수 없었어, 이 땅.

키잉, 아기 여우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오늘 낮에 제타르 경과 마법사 데생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수대가 심각한 마나홀로 인해 부서졌다고 했지.’

여우가 말한 건 30년 전, 시기도 일치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파악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럼 너는 힘을 줘서 이렇게 작아진 거구나. 착하네.”

-맞아, 착한 신이야!

“분수대는 그럼 일부러 고치지 않은 거야?”

그러자 아기 여우의 귀가 기다렸다는 듯이 추욱 쳐졌다.

-나 안 약해! 하지만, 다른 위험이 있을까 봐. 그래서 동상, 부순 건데…….

“아, 일부러 부순 거였어?”

-아니! 힘을 모두 나눠 줘서 고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나타나기 싫었어!

“나타나기 싫었다니?”

아기 여우가 낑낑 소리를 내며 제 앞발로 얼굴을 가렸다.

-이 모습은 위엄이 없다, 컁!

“음…… 그러게. 위엄은 없는데 귀엽긴 하다 야.”

스스로를 신이라 소개했지만 자신도 인정하듯 위엄이라곤 전혀 없어서일까.

어느새 나도 경계심이 모두 풀어진 채 아기 여우를 상대했다.

‘신적인 존재라……. 요정 그놈이랑은 완전 딴판이네. 아주 마음에 든다.’

[헉, 요정은 시무룩해졌어요! (ԾεԾ|||)]

‘응, 건강 수치 주면 너도 예뻐해 줄게.’

요정은 답이 없었다. 익히 예상했던 바였다. 아주 제멋대로인 놈 같으니.

내가 요정과 툭탁거리는 사이 품 안의 여우는 한창 바빴다.

컁?

내 턱, 목, 뺨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 모습이 무언가 탐색하는 것처럼 보였다.

“응? 저기, 뭐 하는 거야……?”

내 말에 여우가 내 목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컁! 하고 짖었다. 캐앵, 캥캥! 아기 여우의 눈이 접힐 듯 휘어진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 보상에 ‘둑스’의 호감도 있었지?’

여우가 눈을 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단 것도 처음 알았네.

-인간, 네게서 그리운 냄새가 난다!

“그리운 냄새?”

내가 이 여우랑 본 적이 있던가. 당연하게도 없다.

‘살아남기 바빴지, 아기 여우랑 연을 맺을 틈이 또 언제 있었겠어?’

아마 진짜 ‘달린’ 쪽도 연관은 없지 않을까. 내내 집에만 있었다고 했으니까.

-응, 그리운 냄새다! 내 동료!

“동료라니……. 나는 널 처음 보는데? 내가 그 동료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여우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혼의 냄새다. 내 친구와 냄새가 같아. 비슷해!

“으음? 무슨 영혼의…….”

-넌 다른 세계에서 왔어?

“…….”

나는 멈칫했다.

-내 친구, 다른 세계에서 왔다.

여우가 비비적거리다 말고 머리를 홱 들어 올렸다. 까만 두 눈이 나를 응시했다.

-너도?

말문이 턱 막혔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다른 차원의 사람이?’

지구에서 온 사람일까? 나처럼 빙의자인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혀끝이 입술 주변을 맴돌았다.

대답해도 괜찮은 건가.

육아물에서 나는 황제와 황자들에게 래빗의 환생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떻지?’

감이지만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맞아.”

가까스로 대답했다.

다행히 요정의 경고는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뭘까. 이쪽도 신이라 이건가?

[신 ‘둑스’의 호감이 금기의 대가를 상쇄했어요! ( ᐛ )و(งᐖ)ว( ᐛ )و]

상쇄라…….

‘그럼 앞으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밀을 누설할 수 있단 건가?’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이나.

이 세계가 책이라는 거나.

그러나 요정은 더는 대답이 없었다. 순전 제멋대로였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리다 말고 흠칫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정말? 정말? 정말이구나!

“어어?”

-너도 다른 세계!

“어어…… 마, 맞아.”

신이라서 그런가. 눈이 과도하게 반짝거리는 것 같다.

-어쩐지 냄새가 정말로 비슷했어! 좋은 냄새! 친구 냄새! 나 친구 조아해, 그럼 너도 조아!

여우의 눈동자는 오묘했다.

어린아이 같은 말투였지만 묘하게 귀에 콕콕 박혔다.

거기다 새까만 눈동자에 이따금 정말로 별빛 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우주처럼 말이다.

신기하게도 맹목적인 애정이 콕콕 들어찼다.

-너 조아해! 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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