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9)
* * *
처음 둑스를 보았을 때, 둑스는 빛 덩어리 같은 형태에서 서서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래서 처음엔 유령인가도 싶었지.
거기다 퀘스트 보상에 ‘둑스’의 호감이 있어서 대체 신이 왜 내게 호감을 가진 걸까의아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거기다 소환 대상이 위대한 짐승, 신님이라니. 완전 땡 잡았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북부에서는 북부 법을 따라야겠지?
이 땅의 주인이자 이곳에서는 곧 법인 둑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메인 퀘스트 마무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둑스의 힘을 빌리는데 래빗 때처럼 너무 큰 제약은 없길 바라야지…….’
마지막으로 꿈속에서 둑스를 실컷 쓰다듬다가 눈을 스르륵 감았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짹짹.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창문으로 새파란 오전 하늘이 나를 반겼다.
“끄으응…….”
한 것도 없는데 찌뿌둥한 아침이었다.
“아침이 엄청 빨리 온 기분이네…….”
나는 몸을 일으킨 다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몸이 살짝 무거웠다.
아마도 꿈속에서 피를 흘린 것 때문이 아닐까?
…요정이 뭔가 페널티를 주려 했던 것 같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둑스의 등급 확인은 추후 가능하다고 했지.
‘어제 계약한 둑스의 영혼 등급을 알려 줘.’
[위대한 짐승의 신 ‘둑스’는 S급 영혼이에요! (๑˘ꇴ˘๑)/ 단, 빙의자 님에 맞게 등급이 조정되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요정의 모습에 잠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참자, 그래. 앞으로 이놈이 계속 판을 치게 두진 않을 거잖아?
‘넌 딱 기다려라.’
“S급이라니, 엄청나네…….”
신 아니랄까 봐 제일 좋은 등급으로 나온 것 같은데. 심지어 나에 맞춰서 조정된 거라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래빗, 아니, 로아타 황제의 등급은?’
[측정이 불가해요! (*☌ᴗ☌)。*゚]
……엥?
둑스가 S급이라는데, 우리 래빗 힘은 측정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뭔데, 우리 래빗은 SSS급쯤 되냐?
[영혼 등급은 빙의자 님과의 유대 관계도 주요한 영향을 끼쳐요!]
“허어, 그럼 강한 영혼이 나랑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좋다는 거야, 뭐야.”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긍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옆으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손에 말캉한 감각이 느껴졌다.
응? 말캉말캉?
“엥, 에엥?”
-끼이잉…….
침대 위에 조그만 아기 여우가 색색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허어?”
눈을 씻고 봐도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둑스였다.
나는 깜짝 놀라 여우를 마구 흔들었다.
“저기요, 저기, 둑스 님? 둑스? 진짜 신님이세요? 진짜?”
-끼이잉……. 힘들다, 더 자게…….
“아니, 저기요, 선생님! 일어나 보세요!”
아기 여우가 캥캥 울며 겨우 눈을 떴다.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아니, 너 왜 여기 있어?”
-컁, 함께하기로 했다! 어제!
“그렇긴 한데…….”
엠버넷 씨는 내가 부를 때가 아니면 내 안에 계시지 않았나?
둑스와의 계약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이쪽은 신이라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실체 유지는 못 한다며? 아니, 안 한다며, 다른 모습은 하기 싫다고…….”
-그렇지만, 친구, 위해서라면 할 수 있다! 하찮은 모습!
아기 여우가 캉캉 울었다.
나름 비장한 결심을 말한 것 같은데, 무척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나 생각해 주니까 기쁜걸.”
-그리고 인간, 내가 옆에 있으면 된다, 도움!
“응, 그럴 것 같네.”
지금은 사라진 요정의 창 쪽을 보면서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 둑스와 차차 할 얘기도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그럼 일어나 볼까.”
이렇게 말한 순간,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아, 아스. 네,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 아?”
트롤리를 밀고 들어오던 아스가 멈칫했다.
내 허벅지에서 하품을 길게 하는 아기 여우를 본 것 같았다.
“……붉은 여우?”
나는 아기 여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하하 웃었다.
저 언니 당황하셨네.
“세상에, 북부에선 희귀한 붉은 여우군요.”
“아, 희귀한가요?”
“예.”
북부에 사는 여우는 대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털이 하얀 눈여우거나 은여우란다.
붉은 여우가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둑스의 전령 역할을 하는 짐승이라고 알려져 더 귀하게 여긴다나.
“그나저나 어째서 아가씨 방에 붉은 여우가, 있는 겁니까……?”
함께 들어온 린도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잠든 둑스 쪽을 보았다.
정말 귀한 동물이긴 한지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얼굴엔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음, 그게요.”
나는 망설이다가 결심했다.
“위대한 신 둑스께서 어젯밤 제게 내려 주신 선물이에요.”
“예?”
“어젯밤, 꿈에 둑스께서 나오셨거든요. 그때 붉은 여우와 함께 나타나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렇게 옆에 있네요.”
거짓말은 아니다, 암. 약간의 날조를 첨가한 거지. 그럼 그럼.
“오, 세상에, 둑스시여…….”
“둑스여!”
린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잡았다. 아스는 심지어 기도까지 올려서 당황스러웠다.
이도 모자라 린은 대공님을 모셔 오겠다며 밖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가, 내 방으로 달려오는 거대한 발소리가 들렸다. 꽤 많은 이들의 발소리였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한 명이었다. 대공님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물기에 살짝 젖어 있었다.
“영애?”
“아, 대공님.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아기 여우를 안은 채 하하 웃었다. 일이 어째 좀 커지는 것 같았지만, 일단 태연하게 그를 맞이했다.
“린에게 들었어요. 둑스의 전령이 나타났단 말인가요?”
“네…….”
대공님은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한참 둑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말 붉은 여우네요.”
“아, 음 그렇죠?”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붉은 여우는 30년 전에 멸종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나도 조금 놀랐어요, 영애.”
“어, 정말요?”
대공님은 나를 올려다보며 맑게 웃었다.
“이거야말로 둑스의 축복이라 할 수밖에 없네요. 영애는 정말로 나와 내 영지에 축복을 내려 주는 존재인가 봐요.”
밖에서 달려온 것인지 그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가 장갑을 벗고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끝은 차가웠으나 손바닥은 따뜻했다.
“……영애가 조금이라도 더 이 영지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네요.”
나는 그 눈을 오래 바라볼 수 없어 슬그머니 돌렸다.
그러다 그를 다시 쳐다보는데, 그의 눈 밑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아, 죄, 죄송해요.”
“네?”
“여, 영애께서 막 일어난 참이라는 걸 잊어서……!”
“아.”
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고서 깨달았다. 가운을 걸치긴 했지만 안쪽 옷이 꽤 흐트러진 데다 살짝 비치는 재질이었다.
‘음, 안에 원피스 하나 더 입었는데 뭐.’
이곳의 속옷은 현대에서 걸치던 민소매 원피스와 비슷해 나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기선 좀 부끄러워해야 하나……?
“으음, 괜찮지 않을까요? 일단 남들이 보기엔 저희가 부부 관계고…….”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2]
“……저만 들어오길 정말 잘했네요.”
“어, 혼자 오신 게 아니었죠?”
“네. 린의 보고를 함께 듣던 이들이 따라오겠다 졸라서요. 성가시게……. 감히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아마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 방의 천장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 하하하…….”
밖에 계신 분들이 누구신진 모르지만 정말 다행이다. 여러분은 시력을 지켰습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렇게 한 번씩 훅 들어오는 살벌한 협박에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는지 괜히 오싹해졌다.
나는 둑스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님, 혹시 바쁘실까요?”
어느새 대공님의 호감도가 90 초반에 육박했다.
거기다 광증 수치는 최근 오르는 속도가 느려진 상태.
물론 이따금 생각지도 못하게 오를 때가 있기도 하지만…….
‘이제 오르는 타이밍을 알겠으니까.’
“바, 바쁘지 않아요.”
“그럼 혹시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저 이제 아침 먹으려 하거든요.”
“좋아요!”
얼른 메인 퀘스트 첫 번째 목표인 이 대공님의 호감도 수치 100을 찍어 보자.
“네, 저도 좋아요. 식사하러 가실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서 기분 좋게 몸을 돌렸다.
‘아마 이대로 질투의 대상만 나타나지 않으면…… 수월하게 오를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