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3화 (123/281)

◈123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0)

* * *

어둑한 방 안.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오전의 햇살만이 시간을 겨우 짐작하게 했다.

창가에 서 있던 자가 잡고 있던 커튼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방 내부에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꽤 많은 수의 인원이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표정이 살벌하거나 음산했으며, 눈빛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에서 온 달린 에스테 영애가 둑스의 분수대를 고쳤다고 하더군요.”

마치 누군가를 향해 증오를 보내는 것처럼.

“……어찌하여 그 X을 멀쩡히 부르는 것이오? 그 여잔 우리 영지를 더럽히고 주군을 현혹한 간악한 흑마법사요!”

“젠장, 감히 성소까지 건드리다니!”

“무슨 수를 쓴 것이 틀림없소!”

그러했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중앙에서 나타난 달린 에스테가 음흉한 흑마법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이었다.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제타르가 달린에게 충고했던, ‘충성이 지나쳐 어긋난 숭배를 바치는 과잉 충성도들’이었다.

쾅!

누군가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젠장, 이대로는 우리 영지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입조심하시오! 지금 그 말은 대공 전하께서 영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란 거요?!”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이미 그런 역사가 있지 않소! 흑마법은 한때 우리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어! 전하께서는 속으신 것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소? 다 그 간악한 X이 문제지!”

이들은 자신들이 정말 대공을 위해 움직인다고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은 열렬한 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때로는 신심이 지나쳐 그른 일을 행할 때조차 모든 것은 신을 위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광신도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 땅에서 오래 자리 잡은 뿌리 깊고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거나,혹은 이 영주성에서는 소수인 문관들, 행정가들이었다.

“총관, 그대는 어떻게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리고 이런 이들을 이끄는 자는…… 총관 아르테반이었다.

50대 중반의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돌려 살짝 끄덕였다.

“저 또한 아주 괘씸하다 여깁니다. 감히 이 땅을 더러운 흑마법으로 지배하려 들다니…….”

그는 인자한 인상과는 다르게 속이 뱀 같은 자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다만, 스스로 자신의 음흉한 꾀를 대공을 위해 쓴다고 믿었다.

‘오직 나만이 주군을 옳은 길로 모실 수 있다.’

그의 신념은 여기 있는 이 중 누구보다도 굳건했다.

“그럼 어찌할 거요?”

“제거해야지요.”

“…….”

“왜들 그리 보십니까?”

아르테반이 작게 웃었다.

“아니면 이대로 대공께서 고작 중앙에서 온 계집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을 보시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중앙 계집의 치마폭에 싸인 북부라니 끔찍하군! 난 용납 못 해!”

아르테반에게 호전적인 북부 전사들을 다루는 것은 식은 스튜를 먹는 것과 같았다. 쉽고 간단했다.

물론 노련한 전사들은 말을 아꼈으나, 그들 또한 눈빛으로 동조했다.

“크흠, 총관. 그럼 어떻게 제거할 거지? 전사들에게 맡길 건가?”

“아니지요. 우리 전사들의 손을 더럽힐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게 좋은 수가 있습니다.”

“좋은 수라니?”

아르테반이 좌중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요즘 따라 ‘마나홀’의 발생이 빈번한 편이지요. 이대로라면 ‘대형 마나홀’도 하나쯤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침 그 시점에…… 중앙 계집이 홀로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그녀의 불행이 아닐지?”

“…….”

한편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남몰래 불편한 표정을 지우는 이가 있었다.

칼리였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유서 깊은 전사 가문 출신 아니면 문관들이다. 칼리는 이 중 전자에 속했다.

그녀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전히 달린이 ‘흑마법사’라 믿었다. 아니,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시무시한 힘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분수대는 어찌 고쳤단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칼리는 그 굳건한 믿음 속에서도 한편으로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지켜봐 주시면, 감사한데…… 일단 사람 좀, 여기 아이를, 봐 주세요…….”

코볼트 킹을 쓰러트린 자리.

자신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던 달린 에스테의 목소리.

“다쳤을까 봐…… 상처를 한 번만… 이 애부터…….”

쓰러진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으나, 그 영애는 홀로 엉망인 몰골이었다.

“꼭 아이, 치료…….”

칼리는 미약한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북부에서도 특히나 명문에 속하는 가문의 후계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대공가를 존경하고 나아가 숭배하도록 가르쳤던 윗대의 교육은 그녀를 철저한 기사로 만들었다.

광신에 가까운 충성.

그녀는 그 누구보다 강한 대공을 존경하고 공경했다.

그래, 혼란은 잠시일 것이다.

‘아니, 사실은 내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진 않나?’

칼리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누군가 노크했다. 시종이 들어섰다. 아르테반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자, 시종이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놀라운 소식이군요.”

아르테반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으나 그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다른 이들에게도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중앙 계집의 옆에 붉은 여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붉은 여우가 어떤 짐승이던가. 위대한 신, 신성한 짐승 둑스의 전령.

그리고 영지민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멸종한 짐승이었다.

‘역시 흑마법이었나!’

칼리는 지금까지의 혼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혼란조차도 자신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이토록 정교하게 간계를 꾸미는 자였다니.’

더욱 엄청난 것이 나타났기에 오히려 더 의심이 앞선 상황이었다.

“대체 붉은 여우가 어찌 나타난단 말이오? 그것들은 멸종했소!”

“마법사들도 찾지 못했지 않았소?”

이 자리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아르테반은 좌중을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제는 분수대를 고치더니 오늘은 붉은 여우의 등장이라…… 타이밍이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절묘하진 않은지요?”

“…….”

“마치 하나하나 짜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기적이 지나치면 오히려 의심을 부른다.

달린이 행한 일들은 과잉 충성도들의 의심을 더욱 지피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아르테반에게는 달린이 했다는 일들이 진짜 그녀의 힘으로 해낸 건지, 혹은 흑마법에 기대 얻은 건지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좀 더 빠르게 수를 써야겠군요.”

달린 에스테는 위대하신 대공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실 하나였으니까.

“중앙에서 온 영애 하나가 곧 ‘거대한 마나홀’에 휘말리겠습니다.”

* * *

‘으아, 배부르다.’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난간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은 날이 꽤 맑구만. 바람도 덜 불고 말이야.

대공님과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안 바쁘시다더니…….’

일은커녕 한가하다더니 사실 무척이나 바쁜 대공님이었다.

‘저어, 주, 주군…….’

식사를 마치고 잠시 함께 산책하는데, 서기관 하나가 거의 울상을 지으며 뒤를 졸졸 쫓아와서 알아차렸다.

이분, 바쁜데 나랑 있는 거구나, 하고.

하기야 이 거대한 북부를 다스리는 사람인데 안 바쁠 수가 있겠나 싶었다.

영지가 평화롭다는 소린 다스리는 자가 노력을 많이 한단 소리지.

나는 대공님을 잘 설득해서 집무실로 돌려보냈다.

“꼭, 꼬옥 돌아올게요…….”

“네네, 즐겁게 기다릴게요. 다녀오세요.”

“네, 꼭이요. 돌아올게요…….”

흡사 전쟁 통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이산가족처럼 내 손을 붙잡고 울먹이는 바람에 달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호감도는 또 올랐으니까, 뭐.

‘이제 호감도 100까지 7 남았나.’

정확히는 호감도 100을 채운 뒤에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지만 이건 일단 조건부터 달성한 뒤에 생각하자.

‘신뢰도 창.’

나는 허공을 바라보다 신뢰도 창을 불러냈다.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진행 상황: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 : MAX/50

내성 수비대장 ‘칼리’ : -40/50

제1마법사 ‘리바’ : 40/50]

어라, 마법사님 신뢰도는 그새 거의 꽉 찼잖아? 아무래도 분수대 복구가 엄청 컸던 것 같은데.

이대로만 가면 퀘스트 달성은 어렵지 않다.

‘어떻게든 칼리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대화를 나눠 보면 왜 그 언니만 홀로 신뢰도가 내려가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 언니를 공략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오, 세상에.”

나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런 우연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는 노인을 마주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신뢰도 창에 뜬 인물, 제1마법사 ‘리바’였다.

그는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옆에는 제자인 데생트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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