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4)
이 거대한 덩치의 힘을 어떻게 견딘 것인지는 몰라도, 할머니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조금만 참으세요!”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높이 도약했다.
그대로 두 번째 몬스터의 등에 올라타 빠르게 정수리를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크롸라라라락!
‘일단 두 놈 처리 완료.’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시야를 살폈다. 둑스의 능력인지 감각이 짐승처럼 예민했다.
나는 곧바로 쓰러지는 몬스터의 등을 박차고 허공에서 한 바퀴 굴러, 근처 나뭇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목표는 저 아래!’
그리고 그대로 뛰어내려 마지막 그리핀의 정수리를 찔렀다.
[스킬이 종료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소모된 시간은 약 4분이었지만 숨이 몹시도 가빴다.
“하아, 하아…….”
그나마 다행인 건…… 둑스의 힘은 래빗의 힘처럼 페널티가 어마어마하게 주어지는 힘은 아닌 것 같단 점이었다.
[소환 대상이 스킬의 과부하 영향을 나눠 가집니다!]
[상태 이상 ‘멀미’에 돌입해요! Σ(。>﹏<。) ※남은 시간: 05:00]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1)’가 활성화됩니다!]
“하아, 흡, 하아…….”
뺨이 뜨겁다.
손등으로 닦아냈음에도 뚝, 검은 피가 떨어진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분만은 산뜻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실력도 나쁘지 않죠?”
* * *
‘후, 큰 페널티는 없어서 다행인데……. 기운이 빠지긴 한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둑스가 내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안쓰러워 나는 없는 힘을 쥐어짜 둑스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둑스. 덕분에 살았어.’
휘청거리는 내 몸을 누군가 붙들었다. 그대로 몸이 붕 하늘로 떠올랐다.
“……한발 늦어서 죄송해요.”
푹 젖은 목소리.
고개를 들자,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대공님이 보였다.
뭔가 바작거리며 부서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래를 보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저기 유리창이 깨진 방이 있는 걸 보니, 아마도 건물에서 바로 뛰어내려 달려온 것 같았다.
“설마 이곳에 마나홀이 나타날 줄은…….”
“괜찮아요, 대공님. 대공님도 예상하시지 못했던 일이잖아요.”
나는 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대공님이 나타나서 다행이었다. 만약 저 마나홀에서 또 몬스터가 나왔다면 이번엔 정말 감당하지 못했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앓아눕진 않을 거예요. 별로 힘을 쓰지 않았거든요.”
“…….”
“정말인데.”
대공님은 대답하는 대신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 체온이 꽤나 따뜻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영애, 피를 닦아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그 사이 멀리서 누군가 달려왔다. 아스, 린과 더불어 친위대 단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피를 묻히고 있었다.
‘다른 곳에도 마나홀이 열렸었나 보네.’
모두 죽은 그리핀을 보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거기다 대공님 표정도 심상치 않았고.
나는 선수 쳐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대공님, 대공님께서 이렇게 될 줄 모르셨던 것처럼 아스와 린, 그리고 친위대 분들도 이렇게 될 줄은 모르셨을 거예요. 아시죠?”
“하지만 영애의 곁을 비우는 건…….”
“제가 잠깐은 괜찮다고 했어요. 겨우 몇 분 비웠을 뿐인데 이렇게 된 건, 저분들 탓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곳에 마나홀이 나타날 줄 몰랐잖아요. 화내지 마세요, 대공님. 네?”
대공님이 이를 꽉 깨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뿐, 더는 무어라 하진 않았다.
후, 다행이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 초상이라도 치를까 봐 걱정했네.
‘……광증 수치도 오르지 않았고 말이지.’
하지만 여전히 대공님의 살벌한 눈이 친위대에게서 떨어지지 않기에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대공님의 손을 내 뺨으로 가져왔다. 그의 눈이 커졌다.
“보세요, 저 멀쩡하죠? 대공님이 빨리 달려와 주셔서 좋아요.”
“……영애는, 내가 화도 못 내게 하려는 거죠.”
나는 활짝 웃었다.
“네. 들켰나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4]
“차라리 내가 온종일 영애의 곁을 비우지 않는 게 낫겠어요.”
“음, 그건 나쁘지 않지만 영주민들에게 미안하니까…… 조금만 더 저랑 시간을 보내 주시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5]
대공님의 손이 살짝 움직여 내 뺨을 쓸어내렸다.
앗, 생각해 보니 닦았다지만 아직 내 얼굴 여기저기 몬스터 피가 묻어 있지 않을까. 찝찝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의 손을 슬쩍 떼 내려 하자, 대공님은 잠시 손을 떼는 듯하더니 곧 내 턱 쪽으로 내렸다.
“언제쯤 날 욕심내 주려나요.”
“……네?”
“당신을 위한 성이라도 짓는다면 좋아해 줄까요?”
“…….”
그거 잘못 들으면 나를 거기 가둬 두겠단 소리로 들리는데…….
아니지. 내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자.
나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함께 사는 성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6]
[호감도가 95를 돌파했습니다! 지금부터 광증 수치가 함께 하락합니다!]
호오? 정말?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내려갔어요! (-1) 현재 광증 수치: 18]
이어진 기분 좋은 알람들에 내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세상에, 이게 무슨 횡재람? 앞으로는 광증 수치 관리도 가능하단 소리잖아?
‘호감도를 95 밑으로 떨어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는데.’
“대공 전하.”
내 턱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던 대공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등을 펴고 바로 선 할머니가 있었다.
“……바란타.”
“예. 이 늙은이가 참으로 오랜만에 설산의 주인을 뵙습니다.”
“영지에서 올라온 건가.”
“예, 그렇습니다. 소식은 이미 전달 드렸었지요.”
역시나 이 할머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대공님이 할머니를 본 순간 미묘하게 표정이 풀어진 것이 보였으니까.
할머니가 다시 무어라 입을 여는 순간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할머니!”
소리와 함께 달려온 사람은 놀랍게도 칼리였다.
뭐, 칼리? 그 언니?
우리 앞에 도착한 칼리가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대공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할머니의 어깨를 잡았다.
“할머니, 아니, 가주님. 괜찮으신 겁니까? 다치신 곳은요?”
“시끄러워. 내가 겨우 그리핀에 당할 것으로 보이냐?”
할머니가 귀를 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비록 다리는 등신이 됐어도 저런 것쯤은 검기만 쓰면 다 죽여 버릴 수 있다.”
“누가 그걸 모른대요?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요!”
“그럼 저기 계신 분께 인사나 해. 나를 도와주셨으니까.”
할머니가 정중하게 나를 가리킨 것과 동시에 칼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저, 영애가 할머니를요……?”
칼리의 표정이 곧 오묘하고 복잡하게 바뀌더니 이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41/50 ]
……음, 언니의 신뢰도는 감사하다고 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 할머니에게 들은 게 있다 보니, 칼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이마저 내가 술수를 부렸다 생각하겠지?’
이젠 자기 할머니에게 술수를 부리냐면서 말이지.
하지만 나는 속으로 웃음지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생각만 뒤집어준다면 이 사람은 이제 적의를 지울 터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눈을 넘실넘실 타고 흐르고 있었으니까.
“…….”
나와 눈이 마주친 칼리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이미 간파당하셨어요, 언니.
“대공 전하!”
내일 칼리와 둘만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어떻게 이야기하면 저 언니의 신뢰도를 올릴 수 있을지 감이 아주 잘 잡히니까.
곧이어 리바와 데생트가 달려왔고, 그들이 내게 치료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전에 황성에서 받았던 것처럼 치료 마법은 놀랍도록 활기를 돌려주었다.
마법 내성 때문에 자주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정식으로 인사 드립니다. 바란타 롬뮈바가 예비 대공비님을 뵙습니다.”
몸이 따뜻해지기 무섭게 할머니, 아니 바란타가 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더니 날 보며 시원하게 미소했다.
“이런 말씀은 좀 더 지켜보다 드리려 했습니다만, 조금 전 모습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허리를 바로 폈다. 커다란 체격의 노년 여성이 멋스럽게 예를 올렸다.
“북부의 방패, 롬뮈바는 예비대공비님을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