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5)
“할머니!”
칼리가 놀라 바란타를 불렀다.
이렇게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바로 알겠다. 엄청 닮았네.
‘저 날카로운 눈매에서 기시감이 들더니만.’
사실은 내 취향이 소나무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걸까. 어쩐지 이상하게 위협할 때도 그리 무섭지 않았단 말이지.
내 취향의 얼굴이라고 매번 마음이 약해지면 곤란한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취향인 얼굴로 눈이 갔다.
대공님은 어째서인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배불리 먹은 짐승처럼 나른한 만족감마저 살짝 엿보였다.
웃음이 은은히 배인 눈은 바란타를 향한 채였다.
‘음, 그러니까 설마 할머니가 나를 인정하다 못해 따르겠다고 해서 저런 얼굴인 거야?’
커다란 뼈다귀를 받은 강아지처럼 볼을 살짝 물들이며 기분 좋게 웃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영애, 롬뮈바는 북부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예요.”
“아하, 그, 알고 있었어요.”
“네. 그 롬뮈바에서 영애에게 충성을 맹세했어요.”
기분 좋으신 건 알겠는데 이렇게 귀에 속삭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안겨 있는 상태라 피하기도 마땅치 않은데 말이지.
‘간지러워…….’
“다행이에요, 롬뮈바까지 없앨 일은 없어서.”
“네?”
“아, 영애를 절대 인정하지 못하느니 하며 반발하는 이들이 다들 이유가 있다고 시끄럽게 굴어서……. 더는 그 이유를 입에 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려 했어요.”
“아하하……. 그러셨구나.”
나는 눈을 슬쩍 피했다. 동시에 바란타, 칼리의 할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이가 지긋한 눈동자는 무언가 알겠다는 듯 나를 보며 인자하게 휘어졌다.
“예비 대공비 전하, 이미 아시겠지만 이쪽은 칼리, 제 손녀입니다.”
“아, 음. 네, 알고 있어요. 칼리 경.”
“롬뮈바의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제 후손 중에 가장 뛰어난 아이입니다.”
흐음, 저 할머니가 증손녀니 딸이니 했던 걸 생각하면 다른 자식도 많은 것 같은데. 그만큼 칼리 저 언니가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나 보다.
“아하, 칼리 경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지는 이미 확인했어요. 가르카 경과 대련하는 걸 봤거든요.”
“이잉? 아이고, 가르카 그놈은 아직도 제 손녀한테 시비를 겁니까? 아니지, 칼리 네가 또 도발했느냐?”
“도발은 무슨, 할머니.”
“잘했다! 그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한 놈들은 한번 두들겨 패야 정신을 차리지.”
“뭐, 이기긴 했어요.”
……음. 이게 북부식 전통인가.
아니, 북부의 정신?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범상치 않은 대화를 나누는 조손을 보았다.
‘일단 칼리 저 언니가 할머니에겐 꼼짝을 못 하는 것 같지.’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데? 나는 현재 칼리를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리바까지 달성한 마당에 얼른 칼리를 공략해 퀘스트를 해결하고 싶었다.
‘메인 퀘스트 기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어.’
나는 속으로 끙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두 번째 이야기는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메인 퀘스트 기간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급히 해치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인데. 일이라고 뭐가 다를까?
어쨌든 나는 죽지 않으면서 퀘스트도 성공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신중하자고.
“날이 추우니 이만 들어가지. 바란타, 그대는 내 집무실로 오도록.”
“예, 전하.”
바란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는 대공님이 움직이기에 앞서 얼른 그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 잠깐만요. 음, 바란타 님?”
“편히 바란타라 불러 주시지요, 예비 대공비 전하.”
“아, 네, 바란타. 의원을 부를 테니까 치료받으세요. 아니면 마법사를 불러도 좋구요.”
“네?”
나는 내 목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 다치셨잖아요. 제게 몬스터 이름을 알려 줬던 즈음에요. 감사해요, 절 도와주려 하셨던 거죠?”
“…….”
당시엔 정신이 없어 몰랐고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바란타가 한 손에 돌을 쥐고 있던 걸 보았다.
다리를 절뚝이는 데다 단검으로는 싸우기 힘드니, 돌을 던져서라도 도와주려 했던 거였을 거다.
어쨌거나 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거겠지? 그거면 됐다.
“아니면 리바 님한테 가셔도 좋아요. 제 이름을 대면 치료해 주실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고도 했고 신뢰도도 한계치를 돌파했으니, 치료 정도는 너끈히 해 줄 터였다.
“괜찮겠죠, 대공님?”
“물론이에요, 영애. 영애가 바라는 것은 뭐든지.”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 딱 알맞은 높이에 있어서 그만.
나는 다시 바란타 쪽을 보았다.
‘다리도 저는 것 같았는데…….’
이건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바란타의 다리 상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오래전부터 저 상태였을지도 모르지.
-인간, 저 나이 든 인간은 몬스터 독에 당했어!
‘몬스터 독?’
-응! 독이 다리로 통하는 마나를 막았어.
‘단순히 다리를 다친 거랑은 다른 거야?’
둑스의 말을 듣자 하니 바란타의 다리는 몬스터의 독이 몸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마나를 막아서 저리됐다는 모양이었다.
또한 둑스는 자기라면 치료할 수 있다고도 했다.
‘대단해, 이런 것도 가능하다고?’
-컁! 난 신이니까!
여우가 대공님 발밑에서 컁컁 울었다. 곧이어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작게 웃으며 보드라운 귀를 쓸어 주었다.
와, 그럼 이 신님은 전투도 가능하고 힐러도 된다는 얘기지…….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스킬 쿨타임도 있고, 힘을 쓸 수 없어 일단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좋았어, 이거라면 칼리 저 언니의 신뢰도도 문제없겠어.’
이미 내 안에서 칼리의 신뢰도는 완벽하게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별일 없으면 그렇게 되겠지.
“갈까요, 대공님?”
대공님은 나를 빤히 보더니 작게 끄덕였다.
“그, 네. 영애, 그리고…….”
“네? 네.”
“머리…….”
대공님이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 한 번만 더 쓰다듬어 주시면 좋겠어요.”
너무 붉은 여우만 쓰다듬는 것 같다면서.
작게 중얼거리는 뺨이 아기 여우의 털보다도 빨갰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7]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내려갔어요! (-1) 현재 광증 수치: 17]
* * *
다음 날.
운이 좋은 건지 오늘도 날이 화창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그리 춥지 않았다.
‘내가 메인 퀘스트를 완수할 때까지 날씨가 이렇게만 쭉 이어지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나는 시험 삼아 입김을 후후, 불어 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시선을 내리자 왁자지껄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담겼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사람이 더 많네.”
“원래 날이 더 좋을 때 더 붐빕니다.”
“시장도 더 활기차구요!”
양옆에 있던 아스와 린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랬다. 나는 지금 영주성 밖 도시로 나들이 겸 나온 참이었다.
물론 진짜 나들이는 아니었고, 도시의 중심을 쭉 통과하면 나오는 내성이 내 목적지였다.
칼리 그 언니가 오늘은 내성으로 출근했으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거지 뭐.’
아쉬운 쪽에서 찾아가야지.
아스와 린은 내 쪽에서 칼리를 부르는 게 어떠하냐고 물었지만 그랬다간 괜히 신뢰도만 더 떨어질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대공님을 설득하는 게 어렵긴 했지만, 결국엔 그도 허락했다.
원래는 대공님도 함께 나오려 했으나 오늘만은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제 영주성에까지 마나홀이 열렸으니까.’
“보통 영주성에도 마나홀이 많이 열려요?”
“음, 흔치 않은 일이지만 없는 일도 아닙니다.”
마나홀은 그야말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기이한 현상이라, 북부 어디에서든 예고 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대공이 거주하는 영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마법사들이 온 힘을 다해 만든 몇몇 특수한 공간에서는 발생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넓게 만들기는 어렵다고.
거기다 완벽한 방어는 어렵다고 했지.
“본래는 완벽한 방어가 가능했었는데…… 최근 마법사들이 여러 곳에 힘을 쏟는 바람에 어려워졌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괜찮을 겁니다.”
“왜요?”
“분수대가 본래대로 돌아왔으니까요!”
“아, 린. 그럼 그간 마법사들이 분수대 복구에 힘을 쏟아서……?”
“정확하게는 분수대가 망가지면서 얻기 힘든 식수를 감당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아스와 린이 번갈아 가며 대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아스의 말까지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래서 어젠 안전하다는 정원에 있었는데도 마나홀이 나타났구만?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말이지…….
-이젠 괜찮을 거야!
‘성소가 복구돼서?’
-성에 이 몸이 있으니까! 컁!
하긴, 살아 있는 신이 바로 옆에 있으니 든든한가. 나는 생긋 웃으며 둑스를 쓰다듬었다.
나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가 사사삭 시선을 피하는 누군가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티 나게 숨어도 괜찮나 몰라.’
내 시선을 피한 남자는 다름 아닌 제3사단 단원이었다.
그랬다.
이번 외출에도 대공님이 붙여 준 친위대가 호위로 나섰다.
그런데 바깥에 나오고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문제란…… 내가 너무 유명해졌단 점이었다. 그리고…….
“아니, 3사단? 쟤가 내 아들인데!”
“오오, 설마 호위하는 분이 예비 대공비님……? 살아 있는 둑스의 화신!”
“화신이시여! 대공비님! 여길 봐 주십시오!”
“꺄아아악! 대공비님!”
아무 생각도 없이 나왔다가 인파에 휘말렸다.
그 바람에 황급히 성으로 돌아가 데생트의 도움을 받아 변장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죄송한데, 단원분들 덩치 때문에 시선이 쏠려요.”
“하, 하지만, 아가씨!”
“그럼 좀 떨어져서 경호하면 어떻습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원들이 울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친위대 대장인 제타르 경과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끝에 친위대원들은 각기 사복을 걸치고 우릴 쫓아오기로 했다.
물론 솔직히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북부 사람들은 덩치가 크다. 특무대 단원들은 그런 이들 사이에서 특히나 컸다.
뭐, 하나 마나 한 변장 같지만…….
수상해 보이는 대신 더는 내게 시선은 안 쏠리니까.
“여기선 제 머리색이 참 눈에 띄긴 하나 봐요.”
“아무래도…… 음, 대공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공님께서 무어라 하셨는데요?”
아스가 잠시 침묵했다가 날 향해 보일 듯 말 듯 미소지었다.
“‘봄의 색’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나 참, 이상한 곳에서 로맨틱한 분이시네.
……이러다 진짜 꼬셔지는 게 누구일지, 0진심으로 걱정된다.
그 전에 여길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우린 얼마 가지 않아 도시 가장 바깥에 위치한 성벽에 도착했다.
이 거대한 도시엔 두 개의 성벽이 있다.
하나는 저 멀리 산맥 쪽을 경계하는 ‘외성’과 우리가 빠져나온 숲과 황무지 쪽을 막고 있는 ‘내성’.
어느 쪽이 더 위험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대형 몬스터는 산에서, 군집형 몬스터는 숲에서 등장한다고.
이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두 성벽 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 체력을 고려해, 중간에 마차를 탄 덕분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불행하게도…….
“하아, 아스, 전 아무래도 운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요즘 따라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말입니다…….”
아스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를 업고 와 준 제타르 경을 보며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또 가는 곳마다 마나홀이 발생할 수 있죠?”
“…….”
그랬다.
내성에 도착해 칼리를 찾는 것도 잠시, 성 근처에 마나홀이 다발적으로 발생했던 것이었다.
그 탓에 나는 칼리를 만나기는커녕 호위하던 제타르 경의 등에 업혀 안전한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것보단 다른 생각을 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어떤 생각 말인가요?”
“제가 위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아가씨를 업게 된 건 비밀로 해 주신다거나 말입니다…….”
“하하하. 그 정도는 대공님도, 참작해 주시지 않을까요……?”
“…….”
“잘 말씀드릴게요.”
제타르 경이 비장하게 끄덕였다.
아니, 왜 목숨을 각오한 표정을 지으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