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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9화 (129/281)

◈12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6)

심지어 저 밖에서 키에에엑! 하고 울리는 몬스터의 비명보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더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밖에 나타난 놈들은 ‘키마이라’입니다. 독이 있어서 가뜩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인데…… 이렇게 무리 지어 나타나다니 곤란하군요.”

“친위대 분들은 괜찮을까요?”

“예, 괜찮을 겁니다. 내성 기사들과 병사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마나홀의 숫자가 많은 것인데…….”

제타르 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실 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티면 될 겁니다.”

이미 새까맣게 나타난 몬스터들로 우리가 있는 창고 주위가 포위되는 바람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어려울 거라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시선을 들었다.

‘함께 싸워야 하나?’

아니다. 내가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약골이 되니, 여기서 대기하는 쪽이 더 나을 거다.

“트, 특무대 3사단 부대장님! 계십니까!”

곧 누군가 창고의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을 여니 칼리의 부하라는 자가 들어와 황급히 보고를 올렸다.

“마나홀이 추가로 다섯 개 더 발생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중형급입니다! 수비대장님께서 부대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제타르 경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전달해.”

“음, 제타르 경, 저도 함께 갈까요? 제가 함께 나가는 거라면…….”

“아뇨, 바깥은 이미 병사와 기사들, 그리고 몬스터들로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영애께서는 여기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끝을 흐렸다.

“다만 문제는 몬스터의 숫자가 너무 많아 갈수록 포위가 좁혀 들어 온다는 건데……. 거기에 대해선 칼리 경과 대화해 보긴 해야 하겠습니다.”

“오라버니, 내가 갈까?”

아스의 말에 제타르 경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그때였다.

우리가 있는 창고의 문을 누군가 한 번 더 두드리더니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계십니까? 저는 제2마법사단 소속 마법사 루파파라고 합니다.”

로브를 걸친 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데생트 님께 연락 받았습니다. 현재 이곳의 긴급 단거리 포털은 무사한 상태로, 영애께서 이쪽을 이용하실 수 있게 도우란 지시를 받았습니다.”

“데생트 님이? 하아, 다행이군요.”

그러자 아스, 제타르를 비롯한 주변의 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영애, 영애께서는 포털로 성까지 이동하시면 될 듯합니다. 가는 동안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아, 네!”

“아닙니다. 그런 수고를 들이시지 않아도 가실 수 있습니다……!”

마법사 루파파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포털까지 단거리 이동마법을 쓰려고 합니다. 영애께서는 제 손을 잡으시면 됩니다.”

“뭐?”

제타르 경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동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님을 여기 동원하다니, 데생트님이 많은 신경을 써주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제타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 모두 들으셨겠지만 마법사 루파파와 함께 가시면 될 듯합니다.”

“네.”

잠시 침묵 사이로 밖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포악한 몬스터의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안심하십시오, 데생트 님의 명에 따라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데생트 경이 다른 친위대 대원들과 함께 은근히 앞으로 다가와 루파파의 어깨에 어깨 동무를 했다.

순간이지만 데생트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래, 우리 특무대의 소문은 루파파 당신도 잘 알겠지요? 미친개들이 열렬히 모시는 분이니 아주 자알 부탁합니다.”

그러자 잠시 굳었던 루파파가 파랗게 질린 낯으로 끄덕였다. 겁을 살짝 먹은 모습이었다.

아니, 좀 이상한데.

‘음? 좀 지나치게 겁을 먹은 느낌인데?’

“예예, 알겠습니다. 혹 함께 가실 분이 계십니까? 제, 제 동료가 이동을 도와줄 겁니다.”

마법사 루파파는, 더듬더듬 자신은 한 번에 자신을 포함한 두 명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함께 온 동료 마법사가 이동시켜 줄 거라고 설명했다.

내 뒤를 따라 포털로 이동하기로 한 사람은 아스였다. 그리고 제타르 경을 제외한 가장 강한 특무대원들도 바로 뒤따르기로 했다.

다만 아스를 제외한 이들은 직접 움직여 포털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오라버니, 내가 먼저 도착해서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 잘 부탁한다. 곧 도착하실 대공님 앞에 더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자고.”

“물론이지.”

내 앞에서 두 남매가 인사를 나누고 나 역시 제타르 경과 짤막한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설명대로라면 어차피 포탈에서 다시 보게 될 테니 긴 인사는 필요 없기도 했고.

“제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마법사 루파파의 손을 잡았다.

푸르른 빛이 나를 감쌌다.

‘……손이 축축해. 이 사람, 왜 이렇게 떠는 거지?’

그 순간 품에 안겼던 둑스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컁! 날카롭게 울었다.

-인간!

그러나 이미 빛이 나를 모두 휘감은 뒤였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낯선 공간이었다.

“……허?”

어딜 봐도 포털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으, 으으으, 으억!”

고개를 돌리자 나를 이동시킨 마법사 루파파가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저, 전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그, 아르테반님 마, 말대로……!”

심장 부근을 붙잡는 걸 보아선 몹시도 아프거나 괴로워 보였다. 여기까지 이동한 게 저 사람한테도 부담이 된 건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혼란은 잠시,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봐도 여긴 안전한 곳은 아니니…….’

겁에 질린 표정이었던 마법사의 얼굴 위로 곧 광기 어린 미소가 어렸다.

“그, 그래, 흑마법사를 처단하는 일입니다. 숭고한 일!”

자기 자신을 세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 모, 모든 건 아르테반 님의 뜻대로……. 위, 위대한 대공 전하를 위하여!”

그 외침이 마법사 루파파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곧 푸르른 빛이 일어나더니 마법사 루파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홀로 이동해버린 것이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쳤네. 사람 목숨을…….’

신중한 제타르 경이 안심하고 나를 맡긴 건 그만큼 저 마법사가 데생트 얘기를 한 게 신빙성 있었단 소리였을 거다.

거기다 저 마법사가 그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은 아닐 거란 정보도 있었겠고.

거기다 저 루파파가 아르테반, 주모자의 이름을 직접 내뱉은 건…….

내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있던 거겠지?

‘와, XX.’

나를 죽이려 드는 인물들은 아무래도 영주성 깊이, 곳곳에 손을 뻗은 모양이었다.

‘큰일 났다.’

이 순간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몬스터보다도 다른 것이 걱정됐다.

“광증 수치…….”

대공님의 폭주가 아직 두 번 남았었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단 사실이 알려지면 분명 폭주가 일어날 것이다.

‘확실해.’

이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요정이 모처럼 작은 친절을 베풀어요! ٩(•̤̀ᵕ•̤́๑)૭✧]

[‘지도’를 외쳐 주세요!]

‘뭐? 지도!’

눈앞으로 푸른 창이 나타났다. 게임의 지도 같은 창이었다.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점 위로 내 ‘Me’라는 글자가 떴다.

난 어렵지 않게 지도를 파악했다.

‘저기가 내성인가? 다행히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어.’

문제는 나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붉은 점이랄까…….

[붉은색 점은 몬스터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이게 다 몬스터란 말이지?

[빙고!]

그 순간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숨을 잘게 내쉬었다.

‘망했네.’

……후, 내 건강 수치가 얼마나 남아 있더라?

“둑스, 힘을 빌려줄래?”

-인간, 맞서 싸울 거냐?

품 안에 안겨 있던 아기 여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컁, 인간 저것들 모두 없애지 못해. 아직 약해!

“응, 없앨 건 아니고……. 어제 네 힘을 사용해 보니까 조금 특이하더라고.”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거 믿고 전력으로 뛰어야지.”

믿을 건 삼십육계 줄행랑뿐이다. 어떻게든 달려서 성문 근처에 도달해야 한다.

그럼 누구라도 날 발견하겠지!

‘어제, 둑스의 힘은 신체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켰어.’

어제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높이까지 뛰어올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킬 ‘소환(lv.1)’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4)’가 활성화됩니다!]

[소환 대상 ‘신 둑스’(S급 영혼)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5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4:59]

“요정, 건강 수치를 바치면 스킬 지속 시간이 늘어나겠지?!”

[요정은 가능하다고 외쳐요! (❁ᴗ͈ˬᴗ͈)⁾⁾⁾]

어쩐지 요정이 즐거워 보이는데, 착각이 아닐거다. 이 염병할 요정 같으니!

나는 빠르게 발을 굴렀다.

그러나 나는 이걸 알아야 했다.

세상에는 아무리 세세하게 가정하고 예측해도…….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이었다.

“하아, 하아…….”

20분 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까만 무리들을 보았다.

[현재 스킬 ‘빙의’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 중입니다! 현재 건강 수치: 25]

둑스의 분수대를 고치며 그나마 조금 얻었던 건강 수치마저 몽땅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떻게든 스킬을 지속할 순 있겠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위험해.

눈앞을 까맣게 메운 무리는 가지각색의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이들과 같거나 다른 몬스터들의 사체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고작 20분이었지만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나는 숨을 거칠게 토했다.

-인간……!

내 옆에서 둑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컁컁, 울었다.

가슴 속에선 엠버넷 씨의 염려가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둑스는 저 아기 여우의 모습으로도 미약하게나마 힘을 쓸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해도 몬스터를 경계할 수 있었다.

다만, 제약이 있어 이 이상은 쓰지 못한다고 한다.

낭패였다.

‘어떡하지,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내성까지 도착하더라도 최대한 정신은 유지해야 한다. 기절하면 안 된다.

혹시 내가 기절한 사이에 대공님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끝이야.’

막을 수 없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참.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여기서 살아남는 게 먼저일 텐데.”

이 세계에 온 뒤로 매번 생명줄을 쥐인 채 휘둘리는 처지라 그럴까.

이런 순간에도 난 차분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공포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는데…….

“하아, 힘이 좀 빠지네…….”

둑스의 힘은 래빗의 힘처럼 강한 페널티는 없었지만 확실히 엠버넷의 힘보다 지속하는 게 힘들고 어려웠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쭉 빠졌다.

‘안 되겠어. 둑스, 우리 조금 우회해서 가자!’

-컁!

나는 들고 있던 가지를 꽈악 쥐었다. 비틀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내 다리가 형편없이 휘청거렸다.

‘어라? 왜? 아직 건강 수치는 남아 있는데?’

[저런, 빙의자 님의 영혼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어요! (╥ω╥`)。゚]

[스킬 지속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어요!]

이런 미친! 이 순간에?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쓰러지는 건…….

그 순간 단단한 손이 내 어깨와 허리를 붙들었다.

“……늦지 않았군.”

곧 길고 곧게 뻗은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영애는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만 보여.”

나지막하지만 듣기 좋은 울림이 귀 바로 옆에서 웅웅 울린다.

나는 그제야 크고 탄탄한 것이 나를 감싸 안았음을 깨달았다.

“먼 곳에서도 항상 영애가 위험에 처하진 않았을까 우려했지.”

천천히 고개를 드니 이 쾌청한 하늘만큼이나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내 눈이 커졌다.

잘게 흩날리는 하늘빛 머리카락의 주인이 나를 향했다.

반듯한 턱선, 낮고 나지막한 목소리.

“그래서 그대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나 보다, 에스테 영애.”

2황자, 라이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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