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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44화 (144/281)

◈14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1)

그가 너무 얼어붙은 것 같아서 쓰다듬어주려 손을 잠시 떼려는데, 그보다 먼저 대공님이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나는 그대로 힘에 이끌려 그의 품에 달라붙다시피 가까워졌다.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코앞으로 내려왔다.

“……영애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건가요?”

“네.”

대공님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음 순간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더는 무엇을 할지 모를 길 잃은 사람처럼 찡그렸다.

“그렇다면, 영애가 바라는 모습은 무엇인가요?”

“네?”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뭐든 가능해요, 영애.”

울먹임이 그의 얼굴로 스쳤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설움이었다.

“당신만, 아니, 영애만 옆에 있어 준다면……! 대체 어떤 모습을 바라는 거죠?”

“……진정하세요.”

“역시, 나는 아닌가요? 아니면 2황자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를 거절하는 건가요? 내가 영애의 기대대로의 모습이 되지 못해서?”

“아니, 아니에요.”

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대공님, 아니. 휴고. 잘 들어요.”

그의 뺨을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대공님 모습도 충분히 멋있어요. 이 영지의 모든 사람은 지금 대공님의 모습을 존경하고 앞으로도 존경하며 사랑해올 거고요. 그저, 전 절 향한 사랑을 빌미로 대공님을 마음대로 바꾸는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단 거예요.”

파지직. 손끝에서 정전기를 맞은 듯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경고!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요정의 권한으로 중단을 요구해요!]

……아하. 중단을 ‘요구’한다? 강제 한다가 아니라?

첫 번째 이야기와 같은 협박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속으로 웃음 지었다.

‘네 계획 안의 일이 아닌가 보지?’

[경고! 메인 퀘스트와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지나친 혼란이 충돌했습니다!]

[경고! 메인 퀘스트 파괴는 불가합니다!]

암, 그래. 그거 파괴 못 한다는 건 알았어. 퀘스트는 이대로 쭉 진행되겠지.

다만, 조금 다른 형태가 될 건 분명했다.

지금 내가 일으킨 ‘변화’ 때문에.

[빙의자 님은 제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장면 연출을 위해 조건을 달성해주세요!]

이윽고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문구가 연속해서 등장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요정의 창을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난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을 택했다.’

‘대공님을 북부 대공답게 만들라’는 것이 이 메인 퀘스트의 한 축이었다. 나는 이를 완전히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첫 번째 이야기와 다르게 여기서는 어느 정도 진실을 전달할 수 있으니…….

다른 형태로라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래빗의 이야기처럼 말이지.

“……영애가 한 이야기가 조금 혼란스러워요.”

대공이 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경고! 메인 퀘스트와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지나친 혼란이 충돌했습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이 기능이 개입합니다!]

[새로운 루트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새로운 루트?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에요, 대공님. 그저, 앞으로 제가 대공님에게 또 한 번 어떤 방식의 변화를 요구해도.”

“…….”

“그게 제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내가 전혀 다른 선택을 해서 새 루트가 생겼다는 건가?

나는 요정의 창에 나타난 이상 현상에 대해 골몰하여 생각하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떤 ‘존재’가 영애에게 바랐다고요?”

“네.”

“……그건 누군가요? 황제인가요?”

황제보다는 더 대단한 존재일걸요. 나조차도 아직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차라리 황제였다면 좋았겠지. 정체라도 명확하니까.

“…….”

내가 이야기할 수 없단 걸 알았는지, 대공님은, 아니 휴고는 천천히 말을 바꿨다.

어느새 뺨을 잡고 있는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이 살짝 덮었다.

“영애가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 했거나, 첩자 노릇을 했다고 여기기에는…… 먼저 다가선 건 내 쪽이죠. 물론 내가 다가간 뒤에 황실에서 후속 지시가 내려왔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추측에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저 위에 계신 어떤 신의 뜻이라기엔, 이곳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인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컁!

정확히는 내 방 안에 있을 또 다른 신을 믿는 쪽이지.

“영애가 나를 속인 것이 있더라도 상관없어요.”

“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혹여 내가 모르는 이상한 존재가 있더라도…… 상관없겠단 생각이 들어요.”

대공이 내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목적이 있다 했지요.”

손끝에 파르라니 떨리는 속눈썹이 스쳤다.

“그렇다면 영애는 무엇을 바라는 거죠?”

“저는 대공님에게…….”

“이름을, 불러주세요.”

이미 그의 얼굴은 새빨개진 상태였다. 눈 밑마저 발그레 물들었다.

“그럼 영애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니까요…….”

그가 애교를 부리는 짐승처럼 내 손바닥에 가만히 얼굴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허용하는지, 가늠하듯이. 조심스럽게.

“영애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결국 그 ‘목적’이란 걸 이루는 건가요?”

곧 수줍은 목소리와 함께 그가 눈을 깜빡였다.

몹시도 위험한 미소가 그의 얼굴로 스쳤다. 그러니까, 잠시라도 이성의 끈을 놓으면 바로 홀릴 것처럼 매혹적인, 그리고 내 취향인 미소 말이다.

[이럴 수가! 빙의자님의 선택이 원작의 궤도로 가던 세계의 핵심과 충돌했습니다!]

파지지직, 다시 한번 붉은 번개가 튀었다.

그 순간 내 손에서 주황빛이 흘러나오며 번개를 막아냈다.

-인간! ‘요정’의 힘, 자꾸 느껴진다!

귓가로 둑스의 컁컁,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만의 로판’ 기능의 개입으로 새로운 ‘엔딩’의 가능성이 생겨났습니다. 단, 빙의자 님은 두 가지 가능성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마저 멈추게 하던 대공님의 황홀한 얼굴이 한순간이나마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첫 번째 이야기처럼 불완전함을 남긴 엔딩을 향할 수도, 완벽한 ‘원작’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완벽한 ‘원작’을 만들길 권유합니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들.

[<선택하세요!>]

[1. 이 세계를 완벽하게 ‘원작’으로 되돌릴 루트로 진입 (단, 이 경우 ‘남자주인공(대공)’의 오늘분 기억 소거)

이 경우 이 세계에는 어떤 오류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다음 소설로 넘어가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2. 이대로 ‘선택’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루트에 진입합니다.

단, 2번 선택지는 후에 ‘불완전한 결말’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빙의자 님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 한번 본 적 있던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전엔 첫 번째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타났던 문구인데…….

‘그게 지금 나타난다고?’

게다가 하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아니,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기억 소거라니…….’

설마하니 지금 내가 휴고에게 했던 말들을 지우겠단 소리인가?

라이칸의 고백을 거절하란 이야기처럼,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지고 놀려 드는 말로 느껴져 거북함은 물론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이 선택지를 받았을 땐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지만.’

등장인물이 책 속 주인공으로 돌아간다.

말이 좋지, 존재를 뜯어고쳐 제자리에 두겠단 말이 아닌가? 그의 자유 의지는 무시한 채로.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좀 더 깊이 깨달은 시점에서는 더욱 기분 더럽게 느껴지네.’

나는 요정의 창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여기, 내 손을 잡은 채 대답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지.’

이미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내뱉은 참인데, 그걸 무효로 돌리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빙의자 님이 2번 선택지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엔딩’을 맞이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만약, 빙의자 님이 최종 폭주를 막고, 배드 엔딩을 피할 시 ‘불완전한 엔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평소엔 그리 꼴 보기 싫던 이모티콘 하나 없는 창들.

멋대로 하다니 네 속이 편하냐? 하는 삐딱한 의도가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이셨길! ꒰ღ˘‿˘ற꒱]

오냐, 100퍼센트 네 뜻대로 가느니, 나는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련다.

[등장인물 ‘휴고’를 당신의 세 번째 ‘나만의 로판’ 루트의 인물로 초대하겠습니까?]

[경고! 단, 현재는 ‘나만의 로판’ 루트 초대가 불가합니다. 메인 퀘스트를 마무리 후에 가능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한 창이 한 번 더 뜨길래,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남자 주인공(북부 대공)’의 혼란을 완화합니다!]

“네, 대공님. 제가 원하는 건 그 목적을 이루는 거예요.”

“……내가 영애의 목적을 도울 수 있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지금까지는 이 대공님에게 계약 결혼의 끝을 고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폭주를 만드는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계약 결혼의 끝이 내 자유 의지가 아니란 걸 말하는 건 어려운 것 같았지.’

그 끝이 정말로 끝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사실 다행스럽게도 이 목적을 이루면서 대공님이 간절히 바라던 걸 들어드릴 수 있어요.”

이 대공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광증도 폭주도 사라지길 바랐다.

퀘스트를 끝내면 이것만은 내가 도울 수 있다.

사실, 나는 래빗에게 바랐듯이 이 대공님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날 보는 눈은 정말로 왜 이제야 깨달았나 싶을 만큼 깊은 감정을 담은 것 같으니까.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기분이 들 정도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영애. 어째서 영애가 내게 그런 ‘계약’을 제안했는지도…… 알 것 같아요.”

대공님이 나를 보며 천천히 속삭였다.

“그렇다면 바라던 바를 이뤄내면 나를 떠날 수도, 이대로 영영 멀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

신기하게도 그는 내 표정만으로 긍정인지 부정인지 그 의미를 다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졌다. 이번에야말로 펑펑 울까?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알겠어요. 그럼 돌아가는 당신을 내 쪽에서 쫓아가는 건 반대하지 않을까요?”

“네?”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을게요. 영애의 목적을 돕겠어요.”

붉은 눈동자는 뜻밖에 영민했고 깊었다. 매사 눈물을 펑펑 터트리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내 손을 뺨에서 떼어내 부드럽게 문질렀다.

“영애가 있는 곳에 나 또한 존재하면, 한 번이라도 시선을 더 주지 않을까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

“내가 영애에게 그랬듯이요.”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여전히 그때처럼 불완전해 보였고, 얼굴은 한껏 붉어져서 진지하거나 어른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나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이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린,”

그 순간이었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100]

내 입이 그대로 벌어졌다.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게 고백했을 때보다 더욱 크게.

[‘남자주인공(북부 대공)’호감도 특수 조건 플러스 알파(+α) 달성! ※키워드: 무한한 신뢰

설명: 사랑과 믿음은 꼭 함께 하는 존재는 아니죠! 광증을 앓아온 ‘북부 대공’은 사랑과 별개로 빙의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진심을 토로하며 이를 달성했습니다!]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의 조건 달성! (현재 달성도: 80%)]

“당신이 어떤 존재라도 좋아요.”

자각했을 땐 커다란 품이 나를 와락 끌어안은 뒤였다. 얼굴이 맞닿은 곳에서 쿵쿵쿵 요란스럽게 뛰는 박동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다.

그윽한 목소리가 내 귓가로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당신을 유혹해 보일게요. 날 사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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