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2)
* * *
다음 날, 북부 아침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나는 갑작스럽게 마주한 소식에 얼떨떨하기 그지없었다.
“……돌아, 가신다고요?”
그도 그럴 것이 래빗과 라이칸이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오전에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판이했다.
라이칸은 마치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마치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단 표정이었달까.
“그로타.”
그렇다고 래빗 또한 밝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라이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도통 말을 하지 않으려는 제 오빠 대신에 설명을 해주었으니까.
“뎡가시게 되었댜. 돌아가야먄 해.”
“헉, 무슨 일 있나요?”
“구래. 무순 일이 생겨따. 정확히눈 곧 생길 예정이지, 우리가 돌아가지 않우면 말이야.”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무슨 일, 인데요?”
“군대가 내려올 고야.”
“네에?”
군대라니? 내가 입을 살짝 벌렸다.
곧 머리로 어떤 생각이 스쳤다.
“설마……. 황실의?”
“구래, 맞다. 하아.”
래빗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첫째놈이 기오이 군대를 보낼 모양이야.”
“황태자 전하께서요……. 아니, 황제 폐하께서는요? 허락하신 거예요?”
“……황제눈……. 묵인해찌.”
이곳에 군대를 보낸다는 건 경우에 따라서 북부와 전면전을 벌이겠단 소리도 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호전적인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했다.
그런데도 군대를 보낸다고?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이 소중한 공주님 때문이겠지.
‘과연 전직 육아물 주인공…….’
이야기는 원작에서 벗어났지만 래빗은 오히려 원작보다도 더 사랑받는 딸이 되었다.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과보호도 따라왔다는 점인데.
‘신전 일도 있고 하니 더 예민해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런 래빗을 몰래 데려온 상황이었으니, 황제와 황태자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하루아침에 애지중지 막내딸, 여동생이 사라진 것 아니겠나.
래빗이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내 손을 잡아당겼다. 할 말이 있다나? 나는 순순히 우리 황녀님에게 귀를 내어주었다.
“달린 네 일에 방해가 될 생각운 없댜.”
아주 작게 속삭이는 말은 나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뭉개진 발음이었다.
‘으음, 한 번도 방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걸요.’
이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어주었다.
래빗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배시시 밝게 웃었다.
“사실 아쉽기눈 너무너무 아쉽지만…… 목적운 달성했우니 말이다.”
목적이라면 아마 ‘보약’을 말하는 거겠지. 사실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거기다 아직 먹지 않고 남겨둔 라이칸이 준 보약 쪽은…… 앞으로 특히나 큰 도움이 될 전망이었고.
“고마워요, 황녀님.”
“뭘, 아무래도 둘째, 아니 저 오뺘놈도 목적울 달성한 거 같우니 말이다.”
그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라이칸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눈 밑이 보일 듯 말 듯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 추위에 물든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보고 물든 것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아주 미약하게. 그렇지만 확실히 보였다.
난 뺨을 한번 긁적였다.
“그럼 롤린, 우리 다시 보쟈.”
“네, 황녀님.”
어쨌거나 황실의 군대가 오는 건 나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 더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지 못한 빠른 이별을 맞이했다.
‘요정 그놈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라이칸이 빨리 떠나는 쪽이 나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급히 갈 줄이야.’
물론 떠나는 그 순간까지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헤어지기 직전 인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무슨 짓이지, 대공?”
마차에 타기 직전, 라이칸이 날 선 표정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인사를 받았는데요…….”
대공님이 사뭇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을 끔뻑였다.
상황인즉 이러했다.
라이칸이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무릇 중앙에서의 인사란 기사들이 레이디에게 하는 손등 키스로 마무리되는 법이었다.
인사를 받기 위해 내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는데, 세상에 저 커다란 라이칸 손 위에 마찬가지로 커다란 손이 먼저 자리를 잡지 않던가.
바로, 대공님의 손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고.
대공님은 짐짓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2황자 전하께서 주신 인사를 받았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허, 북부에는 곰과 늑대가 아니라 여우가 살고 있었던가?”
더욱 날카로워진 라이칸의 눈매에 나는 몰래 숨을 삼켰다. 세상에 찡그리니까 더 내 취향이네.
내 어깨로 자연스럽게 대공님의 손이 올라왔다.
“이 땅을 수호하는 위대한 짐승 ‘둑스’께서 여우의 현신을 아끼신 것은 어찌 아셨는지요.”
“웃기지도 않는군.”
문제는 나를 흘끗 바라보는 붉어진 대공님의 이 얼굴도 내 취향이었다.
‘신은 어쩌다 이런 지옥맛 같은 천국에 나를 보내주셨을까.’
아니, 신이 아니라 요정놈이 나를 데려왔나.
라이칸이 대공님의 손을 쳐냈다.
대공님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린 탓에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저 악수를 하다 놓은 것처럼 보일듯했다.
나는 이미 인사를 나누고서 마차에 먼저 올라타 이쪽을 보고 있던 래빗과 눈이 마주쳤다. 래빗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어누 놈이 조운 거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요, 다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이 남자들을 선택할 때가 아니거든요…….
거기다 우리 아기 황녀님은 팝콘을 들려주면 아주 잘 먹을 것 같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이거 애들 정서엔 안 좋은 거 아닌가.
나는 대공님의 손을 톡톡 두드려주고는 라이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2황자님. 래빗 황녀님을 잘 부탁드려요.”
“……당연한 일이다.”
라이칸이 내 손등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내 손을 잡는 순간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려 오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 순간 내 어깨 위에 손이 지그시 얹혔다.
시선을 옮겨 보니 대공님이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곧 표정이 변했지만 시무룩한 낯이었다.
“그대도 꼭 먹어주길 바라. 내 정성을.”
“아, 네.”
라이칸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주신 건데, 귀히 먹어야지요.
이런 생각을 품으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데, 라이칸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입 모양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잊지 않길 바라, 약속도…….”
나는 멀어지는 등을 한참 응시했다.
마차에 타기 직전, 등을 살짝 돌린 라이칸이 대공님을 살짝 향했다.
“대공, 그대는 아무래도 그대의 약혼자에 부합하는 이상형은 아닌가 보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라이칸이 피식 웃었다. 장갑을 낀 손이 퍽 우아하게 입술을 가렸다.
그러고는.
“나 같은 얼굴이 좋다고 했거든.”
폭탄을 남긴 채로 돌아갔다.
* * *
‘아무래도 내가 정말 행복한 고민에 빠진 것 같은데.’
같은 날 오후, 영주 성에는 싸늘한 침묵이 가득했다.
첫 번째로는 나를 습격했던 무리들, 대공에게 과잉 충성했던 이들을 모두 사로잡아 가둔 여파가 아직도 컸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영지의 주인, 대공님이 매우 저혈압 상태였다.
‘아무리 행복한 고민이라 한들 이 고민만 할 새가 없단 말이지.’
이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대공님의 갑작스런 저혈압의 원인을 알았다. 오늘 오전 갑작스레 떠난 라이칸이 남긴 폭탄 때문이었으니까.
아니, 이봐요. 잘생긴 황자님.
거 잘생기면 다야?
사람을 이렇게 난감하게 만들고 떠나버리면 어떡해? 내 취향이면 다냐고.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다지.”
산뜻하게 답을 내렸다. 그러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디맑은 하늘, 그러나 이 실내에는 우중충한 구름이 내린 것만 같았다.
‘대공님이야 둘째 치고, 아스랑 친위대들은 왜 우울한 표정이지?’
대공님이 저기압이라 덩달아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다들 고민에 사로잡혔거나 울적한 표정들이었다.
‘산책이나 할까.’
우선 저기압이 된 대공님의 기분을 좀 풀어주고 싶지만, 현재 대공님은 지하 감옥에 간지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산책이나 하면서 얌전히 그를 기다려야지.
내 마음은 퍽 여유로웠다.
‘이제 메인 퀘스트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지.’
나는 원작과는 다른 결말이 될지도 모를 선택을 감행했었다. 다행히 내 선택이 메인 퀘스트와 충돌하지는 않았고…….
이제 남은 미션은 둘 뿐이었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출하는 것’과 ‘마지막 폭주를 막아내는 것’.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잠깐 산책을 다녀오려 하는데, 같이 갈래요?”
“아,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내 말에 아스와 제타르 경이 나를 따라나섰다.
내가 많은 사람을 달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탓에 남은 인원은 거리를 벌려 경호할 모양인듯했다.
이제 총관도 잡혀 들어갔겠다, 칼리도 우리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겠다, 추가적인 위험은 없을듯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두었다.
대신 하던 생각을 이었다.
‘클라이맥스 장면 연출은, 아무래도 전에 퀘스트가 보여준 환상대로 하면 되겠지?’
어째서인지 갑자기 보였던 그 환상 말이다. 거기서 대공님은 원작 모습 그대로였긴 했지만.
어찌저찌 잘 해보면 지금 상황에서도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폭주를 막아내는 건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잠깐, 만약 클라이맥스 장면을 끝내면…… 그대로 메인 퀘스트가 끝나는 거잖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럼 마지막 폭주는 막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그대로 퀘스트가 끝나는 거니까.’
난 허공을 보았다. 요정 이놈이 혹시 뭐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놈은 언제나 멋대로였지. 제가 원하는 때만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슬쩍 던지는.
[요정은 간만에 착한 일을 하기로 했어요! \( ˆoˆ )/]
곧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요정은 빙의자님의 생각이 맞다고 알려드려요. ( ⁎ ᵕᴗᵕ ⁎ )]
……진짜라고? 거짓말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