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3)
[착한 요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๑˘ꇴ˘๑)/]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러나 나는 더는 토를 달진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놈은 지금까지 진실을 숨긴 적은 있어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제 그럼 ‘클라이맥스 연출’만 하면 이 모든 퀘스트가 끝난다는 거잖아?
“하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길었다. 아니, 실제로는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럼에도 무수한 시간이 흘러간 기분이었다.
‘이제 중앙으로 돌아갈 수 있나?’
눈을 굴리던 난 마침 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해서 말이에요.”
나는 뺨을 긁적이며 하하, 웃었다. 내 말에 아스의 표정도 묘해졌다.
음, 이 언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아스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보채지 않아도 필요한 말이면 해주겠거니 싶어서 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리는데,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멀지 않은 공터에 칼리가 서 있었다.
“칼리 경?”
자그마한 목소리였건만 용케 들렸는지, 칼리가 거짓말처럼 고개를 돌렸다. 칼리가 한걸음에 내 쪽으로 달려왔다.
“예비 대공비님을 뵙습니다.”
“으음, 네. 안녕하세요.”
이 언니의 태세전환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황당함이 반, 나머지 반이 얼떨떨한 마음이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훈련 중이셨던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칼리의 손에는 검은색 두꺼운 팔찌, 아니, 수갑에 가까운 모양의 물건이 채워져 있었다. 실제로도 수갑이란다. 마법이 걸려 있는데, 이 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보통은 죄수에게 채우는 수갑인데, 나를 습격하는데 찬성했던 무리들은 현재 모두 이걸 찬 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칼리 이 언니는 자진해서 모든 걸 털어놓은 탓에 본래 수갑을 차는 데까진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자진해서 찼다고 했던가.’
몇몇 가신들이 솔직하게 자수한 칼리를 옹호했지만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스스로 구속되었다고 들었다.
캉!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방에 재워두고 온 둑스가 내 발치로 달려와 내 발에 뺨을 비볐다.
나는 둑스를 보며 한번 웃고는 그대로 품에 들어 올렸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많은 사람이 갇힌 상황이라…… 음, 혹시나 마나홀이라도 나타나면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들었어요.”
“북부의 기사들은 강합니다. 비록 저와 같이 과잉 충성도와 변절자를 잡아들였으나, 몬스터들에 뒤지지 않는 저력을 갖췄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문제는 그 저력이 지금 죄수가 된 동료며 가신들을 감시 중이라 문제 아닌가.
하지만 이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보다 제가 할 이야기는 아니나…… 전보다 예비 대공비께서 안전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으음, 지금도 강하고 멋진 친위대 분들이 지켜주시니까요.”
“물론 아주 안전해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슬쩍 지웠다. 옆에서 아스가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제타르 경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칼리 경.”
“뭐지? 설마 예비 대공비님은 모르는 사실이었나?”
“그대로 입…….”
“무슨 일인데요?”
제타르 경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막아서진 않았다. 칼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난감함을 비치다, 곧 입을 열었다.
“아르테반, 그자가 순순이 붙잡혀 들어간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네. 알아요.”
“그게 문제가 됐습니다. 너무 순순히 잡혀 들어간 탓에, 아르테반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가신들이 있습니다.”
“……칼리 경의 증언이 있는데도 말인가요?”
“예. 제 증언뿐이고 물증은 없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제가 현행범임에도 아르테반을 엮는 조건을 내세우고 풀려났다고 믿는 가신들도 있습니다.”
음, 그 정도란 말이야? 아르테반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더 강했던 모양이다.
설마 친위대를 비롯한 린과 아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게 이 때문이었나.
제타르 경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답인듯했다.
“아르테반은…… 지나치게 인망이 좋습니다. 장로들마저 은근히 감싼 덕분에 일단 가둬두는 것으로 멈춘 상황입니다.”
“그래요?”
이곳은 대공님의 카리스마가 성을 지배한다 봐도 무방한 곳이다.
그러나 대공님이라고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법.
아르테반이 행정직의 수장 격인 탓에 아르테반이 이대로 억울하게 실각하는 장면이 만들어지면 덩달아 중하급 행정 관리들이 사기를 잃을 수 있다나.
‘흐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르테반 그 인간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해줄 걸 그랬나.’
좀 엉뚱한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랬다간 겨우 끌어모은 건강 수치가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칼리 경의 진술이 일관된 데다, 경이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현재 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뉜 상황입니다.”
“그렇구나……. 곤란하겠네요.”
내가 평온하게 대답하자, 제타르 경은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지? 난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현재 아직 붙잡지 못한 극소수의 인원이 남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특무대가 꼭 붙잡겠습니다.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어…….”
저는 이미 편히 발 뻗고 자고 있는데요? 거기다 이제는 나보다 귀가 훨씬 밝은 이 귀여운 둑스님도 곁에 있는 상황이고.
어찌 됐건 암살이란 위험은 고려하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까지.
“아닙니다, 반드시 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 오빠 말이 맞습니다, 아가씨. 저희가 반드시 대공님과의 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네?”
그 말에 대공님이 했던 말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던 말.
아, 맞다. 린. 그 언니가 대공님이 하는 소리를 다 들었지?
‘……다 퍼트렸구나.’
예상은 했지만, 결연한 표정들을 보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메인 퀘스트를 끝내는 계획을 하고 있던지라 기분이 묘했다.
“곧 이 북부에도 짧은 봄이 올 겁니다, 아가씨. 그때는 특무대에서 꼭 산맥에서만 피는 눈꽃을 바칠 겁니다.”
“예. 저희 친위대가 특히나 눈꽃을 잘 따올 겁니다, 딸들에게 주느라 도가 튼 인간들이니 말입니다.”
“어…… 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선, 시선을 돌리자!
“칼리 경! 처지가 이렇게 되었음에도 열심히 수련에 정진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아요! 북부에 와서 진정한 북부의 기사란 이런 모습이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저기 친위대 분들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 뱉었다.
그러자 이게 웬걸, 칼리 이 언니가 날카롭다 못해 무뚝뚝한 얼굴에 찌이잉, 감동 어린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뭐야. 끊긴 돌다리를 피하려다 이번엔 돌다리조차 없는 강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저기요? 언니?
어째 언니가 절 쳐다보는 얼굴에서 대공님이 청혼하던 때가 떠오르는 걸까요?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릇된 판단을 한 제게 기회를 또 한 번 주시다니.”
“네?”
“남은 생은 정말 진심으로 예비 대공비님과 대공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목숨을 바칠만한 감동을 받는 건지.
나는 슬슬 북부 사람들이란 뭘 하든 좀 지나치게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덕질하면 잘 맞을 사람들이네.
“……죄송한데 목숨은 소중히 여겨주세요. 저 목숨 운운하는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해요. 뭐가 됐든 살아야 누리는 거죠.”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이거 말이 안 통하는 기분이잖아? 나는 둑스를 슬그머니 끌어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칼리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후, 피곤하군…….”
혼자 있고 싶다는 내 부탁에 방에 남아있던 린과 다른 친위대들이 복도로 나갔다.
그 사이 품에 안겨 있던 둑스가 폴짝 뛰어내렸다.
-인간! 너는 많은 사랑을 받는구나!
“그런 것도 느껴?”
-이 몸은 위대하니까! 인간의 감정의 흐름쯤, 잘 안다!
캉캉! 통통 뛰어 흘러나오는 귀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 잠시 내 팔을 보았다.
“그래? 사실 난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왜?
“음, 일단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고……. 응답할 수 없는 거라면 모르는 게 낫지 않나 싶은 것도 있거든.”
나는 팔을 살살 흔들었다.
“둑스, 혹시 넌 내가 생각하는 결말이 뭔지 아니?”
-결말? 인간 네 생각을 말하는 거냐?
난 방을 한번 휙 돌아보았다. 여러모로 참 안락한 방이었다. 신경을 많이 써주었구나 싶었고.
‘대공님은 조금 늦을 모양이네.’
지금 시간쯤엔 올라올 거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둑스를 보았다.
“둑스. 잠시 결계를 쳐줄 수 있어?”
둑스는 가능하다고 말하곤 곧 방 내부에 결계를 쳤다.
나는 반투명한 벽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둑스, 혹시 우리의 대화가 요정에게 들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컁!
곧 반투명한 벽의 색이 더욱 강해졌다. 파지직, 잠시 스파크가 일어났지만 찰나였다.
-현재 이 몸은 힘을 잃어서, 오래는 힘들다!
“응, 이 정도면 괜찮아.”
나는 붉은 스파크를 떠올리며 씩 웃었다.
분명 그 번개는 요정의 힘이 개입하려 한 흔적이었다. 막아보려 했던 모양이지?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생각해보면 이 조그만 여우님은 나 외에 처음으로 ‘요정’의 존재를 인지하고 언급한 존재였다. 난 이에 관해 이야기 나눌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예전에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요정은 분명 처음에 내게 말했다.
‘이 세계는 비틀어졌다’라고.
그렇다면 이 세계가 ‘비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