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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49화 (149/281)

◈14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6)

발아래 보이는 풍경이 차차 흐려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보인 광경은 무너진 분수대와 그 앞에서 어깨에 뱀의 엄니를 꽂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휴고의 부친이었다.

-내 대리자였던 ‘체단’의 인간도 치명적으로 다치고 말았다, 컁. 아마 저 인간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다, 컁. 저자의 수명은 더 길었으니까.

“아마 부친이 30년 전 분수대가 부서진 날에 입은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서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부친의 염원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겠죠. 지금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추구했던 모습의 대공이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본래 저 거대한 뱀 괴물이 이 북부에 나타날 일은 절대 없었다는 거지?”

-그렇다, 컁. 오염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거다, 컁. 나를 쓰러트리고 힘을 얻으려 한 거겠지.

“그럼 그 커다란 뱀이 왜 오염되었는지, 네 땅을 습격했는지 알아? 왜?”

-글쎄……? 모른다 컁.

“원인을 찾자면 저 뱀을 ‘오염’시킨 주범이, 혹은 네 땅을 습격하게 만든 주범이 있지 않을까?”

둑스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나를 빤히 보았다. 아기 여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의 비틀림이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면. 설마…….

이야기들이 ‘비틀리게 만든 주범’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심증만 있는 가정을.

[요정이 흥미를 느껴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저절로 눈이 감겼다.

또 한 번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장소에 서 있었다.

‘검은 방?’

사방이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깜깜한 방이었다. 있는 거라곤 천장 가까이에 있는 창문 뿐.

밖은 아침인지 밝은 빛이 스몄다. 미약한 햇살에 의지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야?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대로 멈칫했다.

“……끕, 끄흡.”

눈앞에는 조그만 어린아이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검은 고수머리, 상처가 가득한 살갗,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

그리고 덜덜 떠는 손과 손에 들린 기다란 검.

게다가 그 옆에 쓰러진 꽤 커다란 몬스터의 사체까지.

땡그랑. 아이가 검을 떨어트리고는 제 귀를 막았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휴고?”

그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다.

동시에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지령이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내로 눈앞의 ‘북부 대공(남자주인공)’을 서쪽 탑에서 탈출시키세요!]

[단, 당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단 두 번뿐입니다. (0/2)]

뭐야, 이 지령은?

‘인터스O라도 아니고.’

과거의 대공님을 도우라니. 그럼 어떻게 되는데? 현실에서도 무언가 바뀌나?

이해할 수 없는 지령이었다.

‘아니, 첫 장면부터가 이상하긴 했지.’

갑자기 30년 전의 분수대가 무너지는 풍경을 보여줬잖아?

그것도 아무런 지령도 없이 그저 지켜보게만 했고. 그러다가 다시 대공님의 어린 시절로 데려다 놓다니.

두 장면은 분명 연관이 있는 거겠지.

어렵게 접근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 둑스는 30년 전 거대한 뱀의 침공이 의아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공의 부친은 이 일로 큰 부상을 입었고 그 후로도 후유증에 시달릴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대공님은 부친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금과 같이 본래의 성격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했다.

내가 알던 원작 속 모습 같은 차갑고 냉혹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그래, 근본적으로 저 커다란 뱀이 나타났고, 대공님의 부친이 다쳐서 대공님의 성격도 원작과는 달라졌단 건 알겠어.

그런데 그 커다란 뱀과 ‘요정’은 무슨 관계인 거지?

이걸 앞으로 알아내야 하나.

‘둑스, 근처에 있어?’

그러자 내 옆으로 둥실 떠오른 둑스가 컁, 하고 울었다.

순간적으로 어린 대공님이 어깨를 움찔한 것 같았다.

설마 소리가 들리나? 하지만 둑스가 몇 번 더 캉캉 울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까 커다란 뱀이 ‘오염’되었을 거라고 했지?’

-그렇다, 컁!

‘그렇다면 말이야……. 혹시 그 오염시킨 주범이 요정일 확률은?’

-그건, 음, 잘 모르겠다!

둑스가 머리를 갸웃했다.

‘아니면 반대로 누군가가 오염시킨 주범이 있고 요정은 그 주범이 벌인 일을 바로잡고 싶어한다거나?’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지금 말한 게 더 맞을 것 같다, 컁!

‘어떤 근거로?’

-감이다!

나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응, 감이구나.

그러자 아기 여우가 컁컁 울며 항변했다.

본인은 위대한 짐승으로서 육감 또한 아주 예리하기 그지없다고.

그래서 내가 슬쩍 지금은 힘을 잃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맞다고 했다.

전성기만큼 힘이 강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도 잊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마워, 둑스. 네가 아니었다면 감도 잡히지 않았을 거야.’

일단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지금 상황에 집중하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방 안에 있는 건…… 어린 대공님과 죽은 몬스터 뿐인가?’

빛이 잘 들지 않아 아주 명확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구도 없는 휑한 방이었다.

심지어 어디선가 철그럭 소리가 나서 슬쩍 고개를 내렸더니, 대공님의 발목이 묶여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뭐야. 벽에 고정된 사슬인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만약 저 몬스터를 대공님이 해치운 거라면, 이렇게 묶인 채로 해치웠단 말이었다.

와, 어린 시절부터 한 가닥 하셨구나, 대공님…….

그나저나 지령에 다시 집중하자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단 두 번뿐이랬지?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47:59:58]

흐음. 48시간이라. 약 이틀인 셈이다.

이 기간 내에 대공님이 여기서 탈출해야 한단 말이지?

나는 어린 대공님의 옆으로 다가가 벽에 팔을 뻗어 보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팔이 벽을 쑥 통과했다.

일단은 주변을 조금 조사해볼까?

어린 대공님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얼른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발을 재게 놀렸다.

정말 유령 같은 존재가 된 것인지 마음만 먹으면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여긴 복도인가? 아무도 없잖아?’

아니, 이건 내 착각이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웬 남자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한쪽은 유난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내가 저 얼굴을 어디서 봤지?

‘아,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 그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네……가 아니라 똑같이 생겼잖아?’

현실의 가르카는 약 40대 후반에서 50대로 보이는 아저씨였으나, 눈 앞에 있는 그는 과거의 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덩치가 커다랬지만 어울리지 않게 무척 긴장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선배님 여긴 대체 무엇이 있는 겁니까?”

“아, 넌 신참이었지? 들어온 지 이틀 됐나? 처음 보겠군.”

옆에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안쪽에 계신 건 공자님이시다. 우리 북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시지. 자네도 소문은 들었겠지만…… 공자님께선 정신이 온전치 않아. 아무래도 북부인답지 않게 나약한 정신을 가지셨지. 그럼에도 재능만큼은 역사상 비교할 자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라는 말도 들어봤을 거다.”

“어, 음 네…….”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는 적절한 조치를 하신 거다. 서쪽 탑에 몬스터랑 함께 가둬두는 것이지. 몬스터를 해치울수록 후계자께서는 더욱 강해지실 거다.”

“그건…….”

가르카가 우물쭈물했다.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현재 공자님의 나이는…….”

“허어, 나약한 인간이 여기에도 있었단 말인가? 정말 쓸데없는 소리군. 후계자에게 필요한 건 강인한 육체, 육체에 뒤따르는 냉혹한 정신이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

“…….”

선배란 사람의 따끔한 말에 가르카는 다소 시무룩하고 약간은 반항 어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는 그마저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더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너도 이 탑에 올 자격이 생긴 만큼 나머지 기밀 사항도 들었겠지. 대공 전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분수대가 무너지던 날에 입은 상처로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계시지. 이러다간 빠르게 돌아가실 거란 말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네, 들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초조하신 마음도 감히 이해한다. 공자님께서는 너무 나약하셔. 이대로는 이 거대한 북부를 다스릴 수 없다.”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땡그랑 종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머리보다 더 위쪽에 작은 종이 있었는데, 여기서 나온 소리였다.

선배 쪽이 걸음을 옮겼다.

“교대자가 도착했나 보군. 가서 문을 열어주고 오지. 여기서 대기하도록.”

“네!”

가르카는 멀어지는 선배의 등을 한참 보다가, 마침내 사라지고서야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쉬었다.

“허 참. 강하게 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몬스터말고는 볼 수 없는 환경에 가둬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그 순간 띠리링 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북부대공(남자주인공)’의 탈출에 필요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키워드: ‘조력자’]

[‘조력자’의 도움 여부는 상중하로 나뉘며, 도움의 정도는 당신이 이전 퀘스트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에서 얻은 최종 신뢰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뭐?

[축하합니다! 당신이 진행한 ‘외성 대장 가르카’의 신뢰도는 MAX, 따라서 도움의 정도는 특상입니다!]

귀에서 폭죽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막고는 찡그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조력자라니, 탈출할 때 이 아저씨가 도와준다는 얘기겠지?

앞선 퀘스트의 내용이 히든 퀘스트에 영향을 주다니, 나로선 매우 잘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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