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1)
“네? 아뇨?”
대마법사. 분명 맨 처음 내 취향으로 모았던 초상화들 중, 최종까지 남아있던 것 중에 그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외양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경쟁상대가 더 늘진 않아서요.”
대공님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수줍게 웃었다. 뒷말은 아주 작게 중얼거려서 듣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고맙게도 황실에서 협조하고 어째서인지 대마법사까지 도움을 제공한 까닭에 모든 게 빠르게 해결되었다. 내 여정 짐 또한 빠르게 꾸려졌다.
대공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날 오후 바로 출발하게 되었다.
“영애, 조심해서 다녀오길 바라요.”
“네. 대공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정말로요.”
“…….”
마주 보는 우리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와 대공님 둘 다 알고 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부친이 낫진 않는다는 걸.
어쩌면 부친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애써 쾌활하게 웃으려 했다.
“순간이동 포탈을 타기 위해선 여기서 반나절만 가면 된다고 했죠? 마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에요.”
침략의 위험을 덜기 위해서 장거리 이동 마법 포탈은 대공님 영지가 아닌 옆 영지에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영지로 빠르게 가는 길이 조금 험해서 산을 올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대공님은 마법사와 친위대를 잔뜩 붙여주었다. 이 정도로 많이 붙여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너무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저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본래라면 대공님도 함께 떠나려 했지만 하필 가장 뛰어난 마법사 리바가 영지 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를 포착했다고 했다.
그건 대형 마나홀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징조라고 했다.
“괜찮아요, 대신 대단한 분들이 절 지켜주잖아요?”
그런 징조가 영지 내에 발생했는데, 가장 뛰어난 기사인 대공님이 영지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또한 이 대공님과 정이 들어 헤어짐이 약간 아쉬웠지만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
“영애.”
그런 나를 바라보던 대공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올리자, 곧 제 뺨에 가져다댔다.
“……정말로 돌아오시는 거지요?”
“네. 돌아올게요.”
“이상하네요. 아주 오래전에 이렇게 이름 모를 누군가를 갑자기 보낸 경험이 있는 것만 같아서.”
대공님이 내 손 끝에 입을 맞추고는 나를 놓아주었다. 이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단단한 것이 나를 끌어안았다.
“……제발, 약속, 지켜주세요.”
“…….”
“제가 미치지 않게.”
그는 나를 오래 잡지 않고 놓아주었다. 나는 깜짝 놀란 탓에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은 꼭 지키니까요. 제겐 위대한 둑스의 가호가 함께 할걸요.”
나는 품 안에 안겨 있던 둑스의 앞발을 잡고 살짝 흔들어 주었다.
“그러니 대공님도 무탈하게 저를 반겨주세요.”
* * *
포탈이 있다는 도시, ‘라혼’까지 가는 길은 아주 순조로웠다.
일단 날이 좋았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산행에는 이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일이란다.
하기야 그렇긴 하겠다.
“이대로 3시간만 더 가면 됩니다, 예비 대공비님.”
“네, 고마워요.”
호위 총 책임자인 제타르 경의 말을 듣고 끄덕였다.
“이런 산길을 마차가 오를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렇지요? 마법의 보조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길이 있다는 것도요.”
“영주성에서 만든 길입니다. 선조가 만든 길이기도 합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초조한 마음을 꾸욱 눌렀다. 제타르 경은 그런 나를 배려하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가는 길의 안전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사실 며칠 전 아르테반의 마지막 중추 세력을 잡았거든요, 그러니 더는 위험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아르테반을 따르는 마지막 세력이 잘도 도망쳐서 여러모로 곤란했는데, 드디어 붙잡았다고. 전사와 마법사로 구성된 이들은 영지 뒤 산맥 어딘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 어떤 마법을 쓰려다가 실패한 듯 초토화되어 있었다고. 아마 강력한 몬스터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그것 참 다행이에요.”
“예, 그 덕에 대공님께서도 안심하고 예비 대공비님을 보내드릴 수 있게 되셨지요.”
제타르 경이 막 이렇게 얘기했을 때였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지? 이 기운은…….”
“제타르 경?”
“모두 정지!”
제타르 경은 여기 와서 처음 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정지! 모두 주변을 경계해!”
“네? 제타르 경, 그게 무슨…….”
“대장, 왜 그래요?!”
그 순간 나는 눈앞에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검은 로브 자락을 보았다.
금방 사라져서 착각인가 싶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인간! 대규모 마법이다, 컁!
이미 내 허벅지에서 벌떡 일어난 둑스가 컁컁 외쳤지만, 그보다 먼저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눈 앞으로 안개 같은 것이 일렁거리며 마차 안으로 침투했다. 숨이 살짝 막혔다.
‘뭐야, 이 안개는?’
사방에서 기침 소리와 고함이 들렸다. 특무대와 마법사들의 말이었다.
“젠장, 이건 뭐야?”
“헉, 헉, 이 이건 위험한 마법입니다! 다들 들이마시지 마세요!”
“영애, 영애를 지켜라!”
난 빠르게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혹시 몰라 들이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그 사이 둑스가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컁컁 짖었다.
‘둑스, 이게 뭔지 알아?’
-안다, 컁!
둑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인간들이 ‘흑마법’이라 부르는 마법이다!
뭐? 흑마법?
‘북부 애들이 내가 그걸 쓴다며 더럽게 모함하던 거 말이야?’
실존하는 거였어?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내 일행을 습격한 걸로 봐서는 아마도 대공님과 적대하는 세력, 즉 나를 흑마법사라 모함하던 이들 사이에…… 진짜 흑마법사가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까지 똥 묻은 것들이 날 뭐라 하던 거였단 말이지.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 분노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터. 나는 침착하게 밖을 응시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그랬다. 조금 전부터 날 지키기 바쁜 이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차 바로 옆에 붙어있던 제타르 경의 목소리마저도.
나는 맞은편 의자에 올려져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혹시나 ‘힘’을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놓아두었던 것이었다.
‘나뭇가지가 아니라 검을 든 건 생소한걸.’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둑스, 바깥 기척이 느껴져? 대공가 측 사람들의 기척은?’
-느껴진다. 끙, 인간,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컁.
마차 밖은 아직 깜깜했지만 둑스가 이렇게 얘기한 걸 보면 당장 위험한 건 아니라는 거겠지.
나는 속으로 스킬을 발동시킬 준비를 하고서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려서는 동시에 눈앞의 어둠이 말끔하게 걷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
“아니, 처음은 아니려나요?”
하얀 설원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 앞에 병장기를 든 몇몇 기사와 히죽 웃고 있는 마법사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없어.’
친위대와 대공님 측의 마법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못하겠어? 너, 날 성 밖에 버린 마법사잖아?”
그랬다. 내성으로 갔었을 때, 혼란을 틈타 나를 성벽 밖으로 이동시켰던 사람이었다.
이상한데, 분명 저 사람은 잡혀서 처벌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같이 온 자들을 찾으시는 거라면 없습니다. 꽤 멀리 이동했거든요.”
“이동?”
“꽤 힘든 흑마법이지요. 생명을 바쳐야 할 정도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섭게 서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쓰러졌다. 하얀 눈위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생명을 바칠수록 더 많은 힘을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흑마법. 참으로 애석합니다. 그날, 당신은 성 밖에서 그대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
마법사가 히죽히죽 웃었다.
“이 수단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
마법사의 손에 조그만 장치가 보였다. 어쩐지 저것이 조금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 하는데, 땅이 우르릉, 울렸다. 고개를 돌리면 마법사가 땅을 짚고 있었다.
와르르르!
내 뒤로 땅이 무너졌다. 간발의 차였다. 내가 타고 있던 마차가 아래로 떨어진다.
등 뒤를 바라보면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높이의 낭떠러지였다.
‘아, 그래. 저 장치 뭔지 알겠다. 본 적 있어.’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마나홀’을 끌어들이는 도구가 하나 사라져 고민이 컸는데 말이지요…….’
라바의 손에 쥐여 있던 장치였다.
후에 이렇게 생겼다며 한번 보여주었던 장치.
“아, 네. 마나홀 중에서도 거대한 마나홀을 이르지요. 이 영지의 마법사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주기에 맞춰 거대한 마나홀을 끌어들이는 도구를 사용해 영지 바깥으로 끌어냅니다.”
“거대한 만큼 많은 몬스터가 나와서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몬스터가 나오기도 하니 말이지요.”
라바가 보여주었던 것과 전부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겠다 싶을 정도로 유사했다.
마법사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장치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감히 대공님의 눈을 현혹한 마녀의 최후는 갈기갈기 찢긴 시체 신세가 될 것이다!”
이윽고 마법사의 뒤로 공간이 마구 일렁이더니, 그대로 쭉 찢어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검은 털이 난 팔이 불쑥 솟았다. 그 팔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지, 그대로 마법사를 공격했다.
“하하하, 오라, 마나홀이여! 강인한 몬스터여!”
마법사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미친 듯이 웃었다.
“대공 각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나니! 아르테반님과 우리의 희생으로 그분께서는 더욱 강인해지실 것이다!”
너무나 즐겁단 듯이.
“지금쯤 영지에서도 축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을 더욱 강인하게 만들 피의 축제가!”
나는 그 말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이런 미친 XX들!”
나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