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팔찌는 그대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 취향인데? 완전 내 취향이다 못해 취향 스트라이크 존 한중간에 위치한 외모인데?
뭐지? 이런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니?
라이칸과 휴고는 처음 본 순간 이 사람들은 무조건 남주다! 싶을 정도로 내 취향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두 사람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이 사람도 남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아니라니요!
‘야, 요정. 이게 어떻게 된 일인데?’
요정을 불러봐야, 항상 저 편할 대로 나타나는 놈은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일단은 침착하자. 나는 차분하게 대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우선 이렇게 만났으니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
그래, 사람 된 도리로서 인사를 먼저 하려 했다.
다음 순간 이 남자가 당혹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남자가 내 팔을 살며시 잡은 채 제 얼굴로 가져왔다. 뭐야, 설마 입이라도 맞추나? 마법사도 기사들이 하는 손등 키스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돌연 그의 시선이 내 손목을 향했다.
정확히는 내 아이템 ‘사이렌 오더’를 향해서.
대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졸음이 가득한 눈이 깜빡 나른하게 움직였다.
“이상하네. 왜 이게 내 영혼과 마력을 탐지해요?”
그 순간 등으로 소름이 쫙 돋았다. 뭐야. 사이렌 오더의 기능을 느꼈다고?
이건 뭔데. 이 사람 뭔데?
‘야, 요정, 나와! 이 XX 이 상황에도 안 나올 거냐고!’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사이렌 오더의 기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다못해 강인한 힘을 가진 전생의 대륙 황제 래빗이나 현 대륙 제일 검이라 일컬어지는 휴고조차도.
‘마법사라서? 마법사라서 뭔가 다른 건가?’
아니, 젠장. 그랬으면 요정 이놈이 경고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애꿎은 요정을 탓하는 사이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인가 하면, 아닌데…….”
어느새 우리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 남자가 팔찌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저어, 대마법사님?”
덕분에 나는 이 남자의 눈동자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주황빛이라 할 수 있는 색, 그러나 신기하게도 홍채로 예쁜 금빛이 테를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금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하지만 눈이 반쯤 감겨 있고 졸음이 가득한 탓에 나까지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풀잎색.”
대마법사가 작게 속삭였다. 목소리에도 본인의 움직임같이 느긋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이 남자가 내 눈동자 색을 말했음을 알아차렸다.
곧 백 년이고 천년이고 붙잡혀 있을 것 같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손이 놓아진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대마법사가 뒤로 물러났다.
“……아, 졸려서 안 되겠네.”
남자가 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저 남자가 스르륵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 행위가 인사였음을 알았다.
나는 테라스에 멍청하게 남겨진 채로 눈을 깜빡였다.
‘대체 뭐야…….’
저 인간은?
* * *
테라스에서 얼마나 오래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와. 어떡하냐. 대마법사가 주연이 아니라니?’
대체 저렇게 내 취향으로 생긴 인간이 왜 주인공이 아니냔 말이다.
덕분에 저 사람이 다음 이야기 주인공이라면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행복회로가 아예 망가져 제 기능을 잃고 말았다.
대체 요정 이놈은 어떤 주인공을 가져다 놨길래. 저런 취향 스트라이크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지 내가 꼭 지켜볼 거다.
‘그나저나 야단났네.’
조금 골치 아프게 됐다. 저 대마법사가 다음 이야기의 주연이 아니라는 건, 곧 다음 주연을 찾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니까.
문제는 당장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조금 막막해졌단 거다.
우선은 초상화 모아둔 걸 재차 확인해보고.
‘로판 대표 소재부터 정리해야 하나…….’
일단 육아물과 계약결혼은 빠질 테니까. 끙, 그게 빠져도 너무 많은데.
어느새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얼마 안 가 저택으로 기다렸던 반가운 손님이 도착했다.
리제였다.
“달린! 으어엉. 정말 달린이구나!”
리제는 나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한바탕 쏟아냈다. 그간 나를 멀리 보내고서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고. 리제 본인 대신 파올로에게 엄청 들었다.
‘두 사람 왜 안 사귀는 거지?’
짧은 시간 동안 파올로에게 어찌나 리제 얘기를 많이 들었던지, 듣다 보니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나는 친구를 진정시킨 뒤에 함께 밖으로 향했다. 리제가 산책을 나가자 조르기도 했고, 나도 마침 잠시 바람을 쐬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간만에 나들이에 나서서 신난 리제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를 산책할 곳으로 지목했다.
“마탑?”
“응, 마탑! 오늘은 마탑이 일반인에게도 공개되는 날이야.”
아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탓에 눈가가 빨개진 리제가 방긋 웃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거기 주인을 조금 전에 만났는데.’
그 본인이 거주하는 곳이 마침 공개되는 날이라니. 무슨 날인가 싶었다.
‘거참, 그 남자가 주연이었으면 모든 게 다 잘 풀렸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남자에게 할 말이 있었다. 아깐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그 남자가 주연이 아니라 해도, 명색이 대마법사인 만큼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사이렌 오더의 기능을 어떻게 느꼈는지도 물어보자.’
요정이 준 물건의 기능을 느끼다니.
‘어쩌면 둑스에 이어서 요정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는 리제가 쉴 틈 없이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리제의 말에 끄덕이면서 함께 웃었다.
“그래서…… 파올로 경이 날 도와주셨는데…… 해서…….”
“으음, 리제. 말 끊어서 정말 미안한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왜 두 사람 안 사귀는 거야?”
“뭐어?!”
리제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잠시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으음, 달린. 파올로 경은…… 나 같은 사람에게 너무 아까워.”
글쎄다. 파올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리제 이야기만 하면 붉어지는 혈육의 얼굴을 떠올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연애야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진심이야. 내겐 너무 아까워.”
그 순간 리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단 한 순간. 그녀가 얼굴을 우아하게 쓸어내리면서 손틈 사이로 보인 표정이었다. 아마 본인도 나에겐 보일 거라 생각하지 않고 지은 표정 같았다.
잠시지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우리 오빠가 못나면 못났지, 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수도 사람들 100명에게 물어도 나랑 똑같이 대답할걸.”
“과장이야, 달린.”
진짠데. 파올로는 좀 가끔 무뚝뚝한 면이 있어서 세심한 배려는 못 할 인간인 것 같은데.
“으음, 아무튼 그래. 그나저나 마탑으로 가는 길이 조금 걸리지? 서쪽 끝에 있어서 그래. 가면 신기한 것들이 많을 거야 달린.”
리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화제를 전환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져 그대로 수긍할까 싶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한 번 더 얹었다.
왜 파올로와의 관계에서 걱정이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파올로는 한눈에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리제를 좋아하는걸.
“리제, 사람은 가끔 너무 겁을 먹어서 실제와는 한참 다른 데도 그럴 거라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어. 생각보다 많아.”
내 말을 들은 리제가 생긋 웃었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간 북부에 가서 내가 아프지 않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더니 그녀는 얼굴이 조금 핼쑥해진 것 같았다.
“북부에서 일어난 일도 들었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아.
아까 저택에서 리제를 달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북부에서 일어났던 일을 리제가 알고 있더라?
‘엄청 훌쩍이면서 뱀 괴물 얘기랑 휴고의 얘기나 성이 무너진 얘기도 자연스럽게 했지?’
북부에서 출발하면서 듣기로, 지금까지 일어난 북부의 일은 당분간 바깥에 알려지지 않게끔 기밀을 유지할 거라 들었는데…….
워낙 외지고 폐쇄된 곳이다 보니, 몇몇 연락만 틀어막으면 수도로 가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리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리제는 내가 출발할 때 북부의 기밀 같은 것이 적힌 보고서도 주지 않았던가.
‘으음, 리제랑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분명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나를 걱정하며 펑펑 울던 얼굴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게다가 리제는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조금 전 보았던 씁쓸한 표정이 떠오른다.
‘지금은 일단 나들이를 즐기고, 기회를 봐서 한번 꺼내 보자.’
나는 손목의 아무런 빛도 띄우지 않은 팔찌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 *
“와아.”
마법사의 탑. 줄여서 마탑. 이곳은 수도 서쪽 끝에 자리한 숲 근처에 만들어진 탑이었다.
본래 수도에 있던 탑이 아니었는데, 약 200년 전 즈음에 어떤 대마법사가 수도로 옮겼다고.
‘탑을 통째로 옮기다니, 대마법사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인가 보네.’
거대한 탑을 보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오늘 보았던 대마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의도치 않게 머리카락을 만지게 됐는데. 무슨 비단처럼 부드럽더라.
‘그 남자가 분명 투명 마법을 어떻게 눈치챘냐고 물었었지?’
그냥 털실 같은 게 보여서 손을 뻗었을 뿐인데 말이지.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달린, 달린! 저쪽으로 가면 내부 전시관으로 갈 수 있대.”
“아, 정말?”
“응. 오늘은 경매도 함께 진행해서 마법 물건을 살 수 있는 날이야!”
마탑 내에는 오래됐거나 아주 비싸거나 혹은 굉장히 중요한 마법 도구를 전시한 곳이 있는데, 이따금 마탑 내에서 경매를 열어 이 물건들을 팔기도 한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