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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67화 (167/281)

◈16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

리제는 손까지 흔들면서 아이처럼 웃었다.

“리제 어째, 돈 얘기가 나오니까 너 엄청 신나 보여.”

“앗, 그래 보였어? 아버지가 재무대신이라 그런가……. 경매 같은 걸 보는 게 너무 좋더라.”

잠시 당황하던 리제가 수줍게 웃으며 고백했다.

경매와 나라의 경제는 별 관련이 없지 않나? 나는 생각한 걸 그대로 묻는 대신 끄덕였다. 내 친구가 좋다면 좋은 거지 뭐.

“접수는 저쪽인가 봐. 그런데 줄이 너무 기네……. 시종이나 기사를 데려올 걸 그랬어.”

당일 경매 입장권은 한쪽에서 판매하고 있었는데, 줄을 서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리제는 나까지 기다리게 하기 미안하다면서 내 등을 꾹꾹 떠밀었다.

“아니, 나는 같이 기다려도 괜찮은데? 정말로!”

“아냐. 아냐! 달린 넌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쓰러지는걸! 그렇게 되면 내가 백작님 볼 면목이 없어. 안 돼, 안 돼.”

아니, 나 이제 건강수치 괜찮아서 쓰러지지 않는데…….

이걸 자세히 설명할 자신도 없었을뿐더러 에둘러 말을 해봐도 리제가 워낙 단호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전시관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대! 거기서 기다려줘. 금방 갈게.”

“응, 알았어.”

그렇게 리제와 헤어진 난 마법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신기한 물건이 가득했다. 마녀의 빗자루처럼 생긴 긴 빗자루도 있었고, 마법 지팡이 하면 떠오르는 나무 지팡이나 아주 화려한 스태프도 있었다.

‘근데 삽? 이건 왜 여기 있는 거야?’

가끔 왜 있는지 모를 엉뚱한 물건도 보였다. 설명을 읽어보니 태풍을 일으키는 삽이란다. 300년 전 대마법사가 만들었다는데. 대마법사들은 다들 괴짜인 건가?

신기한 물건도 계속 보려니 조금 지쳤다. 얼른 가서 좀 앉자.

한참을 안쪽으로 걷다 보니 입구에 꽤 몰려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안쪽으로 쭉 가면 차 마시는 공간이 나온댔는데?’

정신 차려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상했다. 난 분명 일직선으로 걸어왔는데.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잖아?’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왔던 길로 돌아가려니 돌아가는 길 쪽에도 사람이 전혀 없다.

벽이 다 똑같이 생겼다 보니 방향도 조금 헷갈렸다.

내가 길치라고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지만, 이 상황에선 합당한 의심이었다.

“어떡한다…….”

이대로 서 있으면 누군가는 오지 않을까.

일단 잠시 기다려보기로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내가 봤던 소설 중에 대마법사 남주도 있었지, 아마?’

수많은 소설을 읽은 탓에 하나하나 세세하게 떠올리진 못하지만, 이런 나라도 그 수많은 소설 중에 하나쯤은 기억하는 것들이 있었다.

개중 하나가 지금 떠올린 소설이었다.

‘책 빙의물.’

내가 마법사 남주도 좋아할 수 있구나,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그 책은 드물게 내가 무려 남주 이름뿐만 아니라 여주 이름까지 기억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만난 대마법사의 이름과는 달랐다. 여기 대마법사는 역시 주인공이 아닌 건가?

내용은 뭐 그렇게 특별하진 않았다.

자신이 엄청 좋아하던 책에 빙의한 여주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원작 서브남의 불행을 막고 그 서브남이랑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으니까.

중간에 일명 ‘원작병’에 걸린 여주가 고구마를 먹여주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끙, 사람이 안 오네. 할 수 없지. 왔던 길을 좀 떠올려보면서 가볼까…….”

왔던 길을 되짚으며 열심히 돌아갔지만, 어째 점점 더 분위기가 한적해지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찔끔 식은땀이 흘렀다.

‘이쯤 되면 길을 단단히 잘못 든 게 맞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 나는 돌아가는 길로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일단 계속 걸었다.

그래, 걷긴 걸었는데…….

이번엔 계단이 나타났다.

아래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오, 사람이 있나 보네. 잘됐다. 사정을 말하고 나가는 길을 물어보자.’

그렇게 바닥에 디딘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텅 비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꽃?”

거대한 기둥이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꽃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꽤 오래된 건지 꽃이 거의 상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고서야 그게 뭔지 알았다.

“……묘지?”

비석이라 생각했던 건 묘지였다.

게다가 묘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의 묘지 옆에 또 다른 묘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묘지에 새겨진, 이 무덤의 주인 이름을 읽었다.

「알렉타 카란시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뭐야, 이게 뭔데.’

이름 아래쪽에는 사인이 적혀 있었다.

-살해당한 억울한 영혼 여기 잠들다.-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서둘러 옆에 있던 묘지의 이름을 읽었다.

「줄리엣 라뮬라」

마찬가지로 사인을 보았다.

-살해당한 억울한 영혼 연인과 함께 여기 잠들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왜 저 이름들이……?’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들의 이름은 조금 전에 내가 추억했던 ‘빙의물’ 소설의 주인공들이었으니까.

몇 안 되는, 내가 정확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그보다 더욱 말이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마, 말도 안 돼…….”

이 무덤 앞에서 사이렌 오더가 빛을 내고 있었다.

무덤을 향해서.

……야, 잠깐만. 이게 뭔데. 설마 주인공들이 죽었다고?!

[빙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요정 놈이 드디어 나타났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빙의자 님께서 스스로 세 번째 소설에 대한 단서를 찾았어요! 그러나 이를 어찌할까요? o(╥д╥)]

처음으로 안타까운, 한숨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소설 주인공들은 이미 이 세계의 ‘오류’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처음으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본 것 같다.

‘……XX,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본 거야?’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얼마나 황당한 일이 많았던가.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제치고 지금이 가장 당혹스러웠다.

‘주인공이 이미 죽었다니?!’

하다못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여주인 지젤 그 언니가 비혼 선언을 하고 갑자기 실종 당했을 때도 이 정도로 황당하진 않았다.

거기다 지금은 여주의 문제가 아니라 남주도 같이 죽었단다!

이걸 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Q. 주연이 죄다 죽어버린 이야기는 어떻게 살리면 될까요?

A. 내가 그걸 어떻게 알죠?

그걸 알았으면 현실에서도 내가 독자였겠냐. 진작 재능 살려서 작가 했겠지.

애써 엉뚱한 생각으로 이 당혹을 지워보려 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욕뿐이었다.

“이, 요정 미친 새X야!!”

결국 참다참다 못해 욕이 튀어나왔다.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조건 반사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살리라고?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동시에 발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요정?”

끝을 늘리는 듯한 말투와 졸음기가 담긴 목소리. 이미 한번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아무도 없는데?’

뒤쪽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들었던 목소리인데 거기다…….

“이쪽이에요. 여기.”

고개를 돌리면 웬 남자가 둥실 떠 있다가 자리로 툭 내려왔다.

다만, 테라스에서 보았을 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남자, 대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나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인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죠? 여긴 내 친구의 무덤인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게요, 왜 난 여기에 있을까요.

“……여기 오려고 한 게 아니라, 끙, 길을 잃었어요. 그보다 안녕하세요, 대마법사님?”

“안녕 못하는데.”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들은 대마법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상하네. 귀찮게 됐어요.”

“네?”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마법을 걸어둔 곳에 당신이 나타났단 얘기예요.”

뭐?

“나는 탑을 지키는 사람이자 수장으로서, 여기 들어온 침입자는 누가 됐든 응징을 해야 하는데…….”

“으, 응징요?”

“네. 죽이는 거요.”

잠깐만, 잠깐만. 뭐요?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팔을 휘젓다 말고 팔찌를 보게 됐다.

‘뭐야. 지금 빛이……!’

사이렌 오더가 빛나고 있었다. 주연에게만 반응해서 빛을 내는 아이템이!

뭐야? 아까 저택에서 만났을 때는 전혀 반응이 없었잖아?

‘거기다 빛이 조금 이상해.’

지금까지 주연을 만났을 때의 빛의 색깔과는 완전히 달랐다.

새빨간 색.

마치 경고등처럼 반짝거렸다. 이 색의 의미는 뭐지?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그런데 이 남자가 내게서 멀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제야 남자가 조금 흥미로운 얼굴로 다가왔단 걸 알았다. 내가 멀어진 걸음만큼 한 발짝씩 좁히면서.

이 남자는 퍼스널 스페이스란 개념도 없나? 멀어져. 좀!

“저기, 음, 대마법사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여쭙는 건데, 절…… 죽이시려는 건 아니시죠?”

설마 방 하나 잘못 들어왔다고, 세 번째 이야기 속 주연 손에 죽는 건 아니지? 야, 요정 나와. 나오라고.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이 망할 요정은 필요한 때엔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왜 저 남자를 향한 불빛만 색이 다른 건데!

“죽여 없애는 게 원칙이긴 한데…….”

“그, 제가 물론 의도치 않게 침입자가 되긴 했지만 정말로 의도한 게 아니거든요.”

“네, 그래 보여요. 그래서 고민인데 어떡하죠?”

“그,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럴까요?”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멈칫했다.

사알짝 눈을 떴더니, 눈앞에 내 취향으로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사실 꼭 침입자를 제거해야 하는 일인데…….”

마법사는 계속 반만 뜨고 있던 눈을 어느새 명확하게 뜨고 있었다. 난 남자의 눈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쁜 석양의 색임을 깨달았다.

곧 눈앞에서 첫눈이 녹듯 남자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유려한 눈웃음이었다.

“당신은 예쁘니까 모른 척 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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