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
웃음기 어린 나른한 음성이 귓바퀴를 감싸는 기분이었다.
웃음으로 인해 목소리가 더욱 낮아진 탓에 무슨 기분 좋은 밤 라디오 DJ처럼 느껴졌다.
“……네?”
얼빠진 소리를 하는 나를 보다 못한 건지, 그토록 불렀던 요정의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번째 소설의 추가 단서를 찾았어요! 이런, 그나저나 어쩌나요? 세 번째 소설은…… 망했어요! /(´∩`。)\ ]
야, 이씨. 지금 네가 그딴 말 할 처지냐?
상황도 잊고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죠! 요정은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요. 빙의자 님의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새로 조정됩니다!]
[빙의자 님은 이미 아주 훌륭하게 두 개의 원작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따라서 요정은 세 번째 이야기의 향방을 빙의자 님에게 맡기기로 하였어요!]
[빙의자 님은 제시된 키워드에 맞게, 세 번째 이야기를 이어주세요!]
[로판의 고인물! 당신은 할 수 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놀라서? 아니,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지금 이놈이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남주고 여주고 모두 죽은 소설에서 뭐 어쩌라는 건데?’
내가 여자주인공을 한다고 친들, 남자주인공이 없잖아? 뭐, 남자주인공부터 어디서 만들어오란 소리야?
[걱정마세요! 빙의자 님! 이미 빙의자 님은 힌트를 바로 옆에 두고 계시니까요! (*ˊᵕˋoo)]
힌트?
그때였다. 내 옆으로 불쑥 시선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거예요?”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동안 잊었던 대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을까 싶도록 지독하게 내 취향인 낯이.
‘힌트라니……. 설마 사이렌 오더가 빛낸 그거, 설마.’
……지금 옆의 이 남자가 새로운 남자주인공이라도 된다는 거야?
[빠라빰빰빰! 정답입니다! 세계에 대한 정보가 일부 해금되었어요!]
[세 번째 소설 <악녀는 서브남주를 구원한다>
#책빙의 #악녀여주 #사이다 #고구마뿌셔! #언니가 간다 #능글남주 #조신남주 #댕댕남 #대마법사남주 #쌍방구원물
빙의자 님의 평점: ★★★★★]
[독자 한줄평: 안녕하세요. 선발대입니다. 111편까지 모두 질렀습니다. 여러분 무조건 지르세요. 지르셔야 합니다. 이 소설은 그저 잠시도 고구마가 없이 사이다가 팡팡팡팡 터지는 여주언니와 능글맞지만 요오오오오망한 남주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입니다 저는 용두사미가 아니길 바라며 지르러 갑니다. 이만!]
내가 익히 내용을 아는 소설의 제목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숨을 살짝 참으며 요정의 창과 대마법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 그냥, 조금 놀라서요…….”
한 줄 평이 적힌 요정의 창이 곧 고장난 브라운관처럼 마구 흐려졌다.
마치 이 소설은 이미 망해버렸음을 알려주듯이.
곧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세 번째 이야기를 키워드에 맞게 만들어주세요! 키워드는 요정이 전달 드리며 평가도 요정들이 내립니다!]
‘……평가?’
잠시만, 잠시만. 내 표정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요정‘들’?’
요정들이라고?
나도 모르게 눈앞에 팔랑거리는 천을 잡았다.
내 옷자락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마법사의 옷임을 수 초 뒤에 알았다.
[빙의자 님 그간 당신에게 조언한 요정과 ‘경고’한 요정은 다르다고 알려요!]
[우리는 하나면서도 여럿.]
[우리를 만족시켜 주세요.]
[그럼 빙의자 님은 네 번째 소설로 갈 수 있어요!]
눈앞을 연속적으로 메우는 메시지의 창에 눈을 둘 곳이 없어졌다.
처음으로 요정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언급하는 순간이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
그렇다면 가끔 말투가 싹 달라지던 순간이 이해되었다.
[여긴 아주 중요한 소설이니까, 여기서 잘 살아 남아주세요!]
왜일까, 순간 눈앞에 작은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린 것도 같았다. 마치 동화 ‘피터팬’ 속 팅커벨처럼 내가 동화 속에서 익히 아는 요정의 모습이었다.
설마 지금 내가 본 게 이 요정의 모습인가?
“흐음…… 푸른 종이?”
그 순간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 바로 옆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대마법사가 보였다.
“흐릿한데…… 이게 뭐예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요정의 창이 보였다고?
“네?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종이, 종이라 하기엔 흐릿한데…… 처음 보는 글씨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야, 이씨. 이 무슨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인지.
이 순간 요정의 창도 무언갈 의식한 듯 평소보다 더욱 흐릿한 형태로 눈앞에 나타났다.
[세 번째 이야기, 새로운 첫 번째 키워드를 알려드려요!
키워드: #대마법사남주]
나는 끼긱끼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졸린 눈을 한 남자. 이 남자가 요정이 지정한 새로운 남자주인공이었다.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남주와 여주가 죽은 소설이라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어준 건데, 새로운 남주도 대마법사로 지정해준 거지?’
본래의 세 번째 소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악녀가 주인공인 소설.
소설 속에 악녀로 빙의한 주인공이 눈을 뜨자마자 주변의 고구마 같은 상황을 모두 시원하게 해결하면서 본래 좋아했던 원작 서브 남자주인공인 대마법사 남주의 인생을 바꿔 구원해주는 소설이었다.
그럼 그 내용을 내가 아는 그대로 흘러가게끔 이대로 맞춰가면 된다는 건가? 원작 흐름에 맞는 퀘스트가 주어지고?
‘어차피 세 번째 소설은 망했다며! 그냥 이대로 넘어가고 바로 네 번째 소설로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런 의문에 요정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요정은 말해요, 세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어차피 네 번째 이야기에서 반드시 죽어요! (‐^▽^‐)]
……아, 이놈 진짜 한 대만 때려주고 싶다.
해맑기 짝이 없는 대답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일단은 알겠어. 남주는 반드시 대마법사여야 한다는 거지?’
일단 이 엉망이 된 상황을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 대마법사님.”
나는 빠른 시간 내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이 남자가 세 번째 이야기의 새로운 남주라고 확정되었지만.
‘아직 요정의 창 어디에도 여자주인공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번째 이야기처럼 지젤이 도망간 자리, 어찌저찌 여주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처럼 이번에도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건가?
‘혹시 새로운 대마법사 남주가 지정된 것처럼 여주인 악녀가 될만한 사람도 근처에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내가 여주 역할을 하게 되는 거라면 요정이 이미 한마디 했을 터였다.
“저 안 죽이실 거라고 했죠? 한번 봐주신다고 하셨잖아요.”
“…….”
“예, 예쁘다고.”
내 입으로 반복하기 뭐한 말에 목소리를 조금 더듬었다.
“음, 그거 농담인데.”
“네? 진짜요?”
“아뇨. 농담.”
나를 보고 있던 대마법사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예뻐서 죽일 맘이 안 들어요.”
난 멈칫했다. 흡사 천사가 내려온 듯 유려하고 예쁘장한 미소와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결단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어…… 가, 감사합니다?”
어째 갑자기 이 남자의 웃음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저 혹시 뜬금없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저도 하나 물어도 된다면요.”
“어엄, 네. 뭐든 물어보세요.”
“네. 물어보세요.”
내 말투를 따라하듯 사근사근한 말투에 잠시 멈칫했다. 지금까지 어떤 남자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말투 탓이었다.
그나마 찾자면 휴고가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 사람은 특유의 수줍음과 말을 더듬을 때가 많아서 세련된 부드러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아까 요정의 창에 대해 묻겠지? 그럼 시치미 떼야겠다.’
정말 대마법사라서 사이렌 오더를 느끼고 요정의 창까지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야겠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가요?”
“보다시피 거대한 묘지에요. 이미 이름을 보았죠?”
대마법사가 비석을 가리켰다. 나는 살짝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내 전대 대마법사가 묻힌 곳이에요. 친구였기도 하죠.”
대마법사 발데르, 그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설명인즉 이러했다. 이 마탑에는 오래전 젊은 마탑주가 있었고, 그는 상당히 유능했단다.
그러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연인과 함께 살해당했다.
무려 대마법사가 살해당한 희대의 사건이었기에 마탑의 마법사들은 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 사실을 마탑 밖에 나가지 않도록 꼭꼭 숨겼고,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당시 방랑 중이던 발데르가 대마법사란 이유로 다음 마탑주에 앉게 되었다.
죽은 친구의 마지막 유언이었단다.
“……범인은 잡지 못한 건가요?”
“잡지 못했죠. 신기하게도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거든요.”
발데르가 주먹을 느릿하게 쥐었다가 폈다.
“찾아낸다면 아마 그날로 내 손에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겠지만요.”
원작에서 발데르의 존재는 기억나질 않으니, 어쨌거나 이 사람은 원작 외 인물일 것 같다. 뭐, 아니면 내가 책의 구석구석을 기억하지 못해서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거기다 주인공들을 죽인 게 이 세계의 ‘오류’라면…… 나도 만나본 적 있는 사람이잖아?’
히든 퀘스트에서 만났던 남자. 날 향해 말을 걸었지.
‘차라리 그때 그 남자를 붙잡아서 좀 더 이것저것 캐물어 봤어야 하는 건가?’
‘요정’과 ‘세계의 오류’는 서로 대적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요정들은 결국 오류라는 존재를 붙잡고 싶어 하는 걸지도…….
“전대 대마법사의 사인은 앞으로도 영원히 비밀이 되어야 해요.”
“반드시 비밀 지킬게요. 그, 어, 죽이지 않으셔도 제게 마법을 걸어도 좋아요! 발설을 못 하게 한다거나…….”
“발설 금지라…….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침묵을 하게 하는 건데도요?”
“…….”
이 남자, 멍한 얼굴로 은근히 살벌한 소리를 잘한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농담이에요.”
발데르가 나긋나긋 말하면서 잠시 허공을 보았다. 아니, 가만 보니 조금 전 요정의 창이 떠올랐던 자리였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나요?”
“네? 아, 네.”
올 것이 온 건가.
나는 태연하게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어떤 동요도 하지 않기 위해 대비를 했다.
요정의 창에 대해선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연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