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8)
“전 아무것도 몰, ……네?”
……예?
“아, 약혼자는 있냐고 물어야 하나.”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여전히 앉아 있던 몸이 절로 세워졌다.
떠오른 탓에 나는 이 대마법사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된 형국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반쯤 졸린 눈이 뜨이며, 날카롭지만 예쁘게 미소짓는 얼굴이 보였다.
벚꽃처럼 나긋한 미소, 내가 이곳에서 본 주인공들 중 가장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발데르의 말에서 나는 잠시 휴고를 떠올렸다.
‘……데자뷰인가?’
정확히는 첫눈에 반했다고 외치던 휴고의 모습을.
그러나 이도 잠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 남자가 보이는 모습은…… 온도가 달랐다.
“당신이 얼마나 건강한지, 아니면 지금도 아픈지, 만약 특정 마법을 걸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마도 당신을 처음 치료하던 순간부터 궁금했던 것 같아요.”
래빗에게 들은 적 있다.
내가 래빗의 검에 찔려 쓰러졌을 때, 황제가 대마법사를 불러 나를 치료하게 한 적 있다고.
“당신의 영혼은 특별해요.”
이 남자가 요정의 창 얘기를 꺼냈을 때보다 덜컥, 더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이 있어요. 달린 에스테양.”
살랑, 아무것도 없는 곳에 따뜻한 실바람이 불었다.
눈앞의 봄처럼 나긋하고 어른스럽게 웃는 대마법사의 눈은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석양 같은 눈동자가 살짝 굴러 내 팔목을 향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에게 있는 신기한 힘도 조금은 궁금하네요.”
조곤조곤, 황태자처럼 협박하지도, 처음 만났을 때의 라이칸처럼 날카롭지도, 오래전 황제처럼 위협하지도 않는데.
경계심부터 들었다.
“나는 마법 능력도 없이 결계를 쉽게 통과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 이건 생각지도 못하게 밑천이 탈탈 털리게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었다.
‘아니지, 잠깐만. 잠깐만.’
달리 생각해보자. 나는 마음속에서 삐뽀삐뽀 울리는 경고등을 무시하며 생각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지 않나?’
이 남자가 왜인지 몰라도 내가 가진 어떤 특별함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이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정확히는 남자주인공으로서 움직여줘야 하는, 이 남자의 협력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난 좀 특별해요. 대마법사님.”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내 비밀은 알지 못했는데, 신기하네요.”
나는 생긋 웃었다.
“대번에 알아본 건 대마법사님이 처음이에요.”
손가락을 들어, 여유로운 척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비밀을 속삭이듯이.
“그런 김에 한 가지만 알려드릴까요?”
이렇게 된 거, 이 남자를 꼬드길 수 있는 거라면…….
“대마법사님의 친구를 살해했다는 그 나쁜 범인, 그 사람에 대해서 제가 뭔갈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발데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처음으로 보인 극적인 표정이었다. 곧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정말인가요?”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무심한 듯 나긋한 목소리, 그렇지만 폭군에게 위협당했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당신처럼 예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를 아프게 하진 않지만 금방이라도 아픔을 줄 수 있다,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와, 이 사람 나긋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네…….’
사실 이 말을 했을 때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바라던 바였다.
“네, 물론이죠. 제가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걸요? 그저 대마법사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비슷한 존재가 떠올랐어요. 저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거든요.”
듣기만 했나, 아예 직접 보았지. 세계의 오류와.
“대마법사님, 저는 한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를 위해서는 대마법사님의 협조가 필요해요.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제가 아는 것도 말씀 드릴게요.”
“…….”
발데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 끝에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요?”
나는 씩 미소했다.
“간단해요. 전 당신이 연애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잠시 멈칫한 남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랑, 당신이랑요?”
“네?”
아!
그제야 오해의 여지가 있었음을 깨닫고 얼른 정정하려 했다.
저 남자가 나보다 먼저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멈칫했음은 물론이었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랑 연애하겠다고?’
실수로 누군가에게 약속 시간을 잘못 알려주고 상대가 잘못된 시간에 정말로 나가버린 걸 알게 됐을 때 기분이 이러할까.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아뇨! 저랑 연애하는 것 말고요.”
“……말고요?”
그러자 대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반쯤 졸린 표정으로 돌아온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면 어떤 의미인데요? 그보다…… 다른 의미가 될 수가 있나…?”
……있죠. 댁이 다른 여성이랑 구구절절하고 찐한 연애를 해줬으면 한다, 뭐 이런 의미였거든요.
‘아마도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언니가 나보다 백만 배는 나을 인물일 거예요.’
그런데 이런 말을 뱉기엔, 아무리 봐도 상식에서 벗어난 소리 아닌가.
그도 그럴 게 이제 막 두 번 본 사람한테 대뜸 님이 연애 좀 해주면 좋겠다. 근데 그 상대는 내가 정해주는 여성이랑 했으면 좋겠고.
……그 여성은 아직 나도 모른다?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겠네.’
나는 머릿속에 떠올린 내용들을 꾹꾹 눌렀다.
“아니…… 실언했어요. 그, 음.”
“어느 쪽이 실언인데요?”
“……여러 가지로 으음, 죄송해요. 일단 우리 나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제게 닥친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계속 횡설수설하게 되네요.”
나는 깔끔하게 상황 탓을 하기로 했다.
그래, 평범한 영애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다.
마탑에 놀러 왔다가 길을 잃어서 웬 묘지에 도착하질 않나. 이 묘지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한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받질 않나.
좋아, 잠깐 정신 착란이 왔다고 핑계를 대도 그럴싸한 상황이다.
내가 몇 번 사과하며 말을 얼버무리자, 대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수긍한 기색이었다.
“저, 이제 그만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 묘비를 흘끗 보았다.
착잡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남주와 여주였는데.’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 끌려와서 들은 소리가 ‘로판 고인물’이지 않은가?
고인물이니까 클리셰 잘 끼워맞춰서 원작을 되찾아달라면서 말이다.
그래,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로판을 좋아했고, 세 번째 소설은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꽤 깊이 남아있을 만큼 좋아하던 소설이고 주인공들이었다.
그런데 성덕이 되기는커녕 좋아하는 주인공들이 죽었다니.
복잡한 기분이었다.
‘요정 이놈이 아무리 생존 운운해도 좀 무뎌져 있었나…….’
아무리 큰 자극이라도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아마도 반복되는 위기에 무뎌져 있던 것 아닐까?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매번 시련을 잘만 견뎌내고 이겨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맞닥뜨리니, 어째 저 묘지가 어쩌면 내 결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팍팍 느껴졌다.
‘……그래서 이 세 번째 소설은 대체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 거야.’
한숨이 살짝 나왔지만, 잠시뿐이었다. 괜찮아.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무사히 이끌었던 거처럼.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 시련이 다가오면 이겨내야지 뭐 어떡해.
‘……일단은 여기서 나가면, 이번엔 ‘악녀’후보들을 찾아볼까?’
현재 요정은 아무런 말이 없다.
보통 메인 퀘스트가 시작될 때쯤에 서브 퀘스트가 나타나곤 했는데, 이런 것조차 없는 걸 보니.
‘일단 여주인공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한 게 아닐까?’
내가 그 자릴 대신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퀘스트가 나타났을 테니 말이다.
[요정은 나날이 발전하는 빙의자님 눈치에 감탄해요! (❁´▽`❁)*✲゚*]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답변에 머리가 차게 식었지만.
언제봐도 참 얄밉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나는 요정놈에게 한마디 더 하는 대신 흘끗 시선을 옮겼다.
나를 안내하는 대마법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마법으로 금방이라도 이동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마법사는 건전한 방법으로 나를 출구로 이끌었다.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얌전히 오르면서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저기, 대마법사님.”
대마법사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나는 이를 대답으로 여기고 말을 이었다.
“인사가 너무 늦었지만…… 저희 가족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대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계단 아래에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덕분에 아버지가 큰 위기를 넘겼다고 들었어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드립니다.”
“…….”
“그리고, 저, 제가 돌아오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던 걸로 아는데…….”
“네. 전 당신에게 흥미가 있으니까요.”
대마법사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건데, 졸린 듯 멍한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데도 가까이 오기 전까지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워지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된다고 해야 하나.
‘은근히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 때문인가?’
갑자기 내 발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일단 옷자락을 붙잡았다.
“……대마법사님?”
“내게 원하는 것이 있죠?”
“네?”
“나와 연애해달라고 했나? 없어도 만들어봐요.”
“……네?”
“나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이 많아요. 일단 당신 집안에 대한 것도 궁금한 것이 있지만…… 일단 이건 조금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까부터 영혼 운운하긴 했지. 마법 결계를 어떻게 통과했느냐고도 물었고.
“나는 당신에게 실험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