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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3화 (183/281)

◈183화. 3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2)

* * *

대마법사 발데르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아, 하아, 작게 숨을 내쉬는 영애를 바라보았다.

달린 에스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머릿속에 존재조차 하지 않던 이름이었다.

어찌나 연약해 보이는지, 지금 보이는 저 어깨가 파르르 떨다 못해 툭 건드리면 부서질 듯만 했다. 아니, 실제로 그의 마력 한 번이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를 육체였다.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그의 마법을 견디지 못하겠지만 저 영애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어딘가 기이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 있었다.

‘영혼 때문인가.’

발데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몇 분 전, 저를 앞에 두고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달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녀는 입을 뻐끔거렸다.

발데르는 질려가는 낯을 유심히 보았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낯이다. 흐드러진 작약을 떠올리게 하는 가녀린 인상, 색이 여린 입술.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 위로 자그마한 콧대. 커다란 눈에는 경악과 동시에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발데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라 생각했다.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유독 잊지 못할 얼굴이다.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함과 모든 참담함을 껴안은 것처럼. 툭 건들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절망한 적은 없는데요……?’

그러나 그녀를 건드리자, 그녀는 우습게도 마치 그런 일이 없는 양 행동했다.

타인에게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일까?

대체 저 달린 에스테를 둘러싼 기이한 힘의 주인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가엾게 보이게 만드는 걸까.

발데르는 잠시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을 뒤흔드는 존재는 무엇일까?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사실 처음엔 자신의 심장의 증상과 비슷한 증세를 가진 듯해, 약간의 흥미를 품었지만.

처연한 얼굴을 본 순간부터 발데르는 자신이 가진 지적 호기심을 포함한 집요하리만치 집착적인 감각이 눈을 뜬 것을 느꼈다.

오래 전 자신을 이해해주던 유일한 친우가 죽은 뒤로 그는 세상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은둔자였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부터 관심을 두고 알아가면 될 테니.’

* * *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사람은 직장을 다니든 학원을 다니든 무엇을 하든 간에 한 번쯤 거쳐온 과정과 결과에 회의감을 느끼지 않는가?

‘이걸 번아웃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딱 그 꼴이다.’

발데르와 이야기를 끝내고 깨달았는데 내가 좀 지쳐있던 것 같다.

아니, 누군가에게 설레는 것도 사실 체력을 소모하는 거였어?

아니면 내 몸이 너무 쓰레기라 이런 거에도 막 체력 소모를 느끼고 건강 수치가 떨어지는 거야?

[요정이 알려요! 빙의자 님의 현재 건강 수치는…….]

“아, 됐어. 됐어. 필요 없어.”

나는 홱홱 손을 내저었다.

‘앞으로 목숨에 지장이 없는 선이 아니면 알려 주지 마. 그래, 한…… 20 정도? 그때에나 알려줘.’

건강 수치 20부터는 정말로 움직이는 족족 신호가 온다.

아프거나, 지치거나, 식은땀이 나거나, 열이 나거나…….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선이 아니라면 들을 생각이 없다.

왜냐? 이제 이 요정의 창과는 좀 멀어질 생각이니까.

‘뜻대로 되긴 쉽진 않겠지만.’

줄곧 생각했다. 내가 이놈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요정의 창에게 기대어 연명하고 있다. 즉 이놈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거다.

이걸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은연중에 자꾸 더 기대고 있었단 말이지? 위험해. 위험해.

[요정은 약간의 서운함을 느껴요! ˚‧º·(˚ ˃̣̣̥⌓˂̣̣̥ )‧º·˚ ]

서운해하거나 말거나.

나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뭐. 그렇게 해주는 걸로 안다?

요정은 대답이 없었지만, 안되는 것에 한해서는 자기 주장이 확실한 놈이었으니, 대충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몰 그로케 혼잣말울 중올거리고 있나?”

“아, 황녀님.”

나는 벌떡 일어나 래빗에게로 다가갔다.

이 황녀님이 조그만 몸으로 접시를 들고 있었으니까.

“어휴 세상에! 이런 건 저 시키세요. 황녀님이 왜 이걸 직접 들고 그러세요!”

“원래 손님 대좁은 주인이 하눈 거다. 모루나?”

“제가 무슨 손님이에요, 그보다 아무도 세 살 아기님한테 그런 걸 바라진 않거든요?”

래빗이 미간을 좁히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기 노릇도 쉽지 않다나.

어째 그 얼굴에서 꽤 고단함이 느껴져서 짠했다.

“그… 폐하 뵙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황제, 하아, 부친을 보눈 것도 그로치만, 한 놈이 더 문제다 문제.”

“으음, 황태자 전하 말씀이시군요…….”

요즘 따라 더욱더 딸 바보에 동생 바보가 되었다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좀 심해 보이긴 하더라. 추수제 기간을 확 늘린 거야 둘째치고, 이번에 래빗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로 연회장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더라.

더군다나 래빗의 이름으로 장식한다고 온 연회장에 토끼 장식이 가득했다나.

‘나는 참여하지 않았던 연회날인데, 구경한 리제의 말로는 엄청났다지…….’

육아물을 옆에서 보면 정말 주접도 이런 주접이 없구나.

얼마 전엔 뭐더라. 래빗이 말을 타고 싶어하니까 마사부터 지으려고 했던가?

문제는 그 마굿간이 무슨 대형 경기장만 하게 설계하려 들어서 래빗이 화를 내며 뜯어말렸단다.

“뭐, 다룬 곤 조타 이거다. 하아…… 민폐눈 끼치지 말아야지. 민폐눈!”

“아하하하…….”

“다, 백성의 고횰이란 말이다!”

“아하하하……. 그, 그렇죠.”

우리 황녀님은 전직 황제시다 보니 이런 것에 매우 예민하셨다.

래빗은 한창 열을 올리고 난 후에야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소 롤린, 너눈 헤벤 공작가에 갔다고?”

“네, 맞아요.”

나는 헤벤 공작 가에 다녀온 일을 짤막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래빗도 요정의 창에 대해서 신의 계시로 일부나마 알고 있는 만큼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사실 발데르에게도 거의 들켰겠다, 뭐 어떻겠냐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흐음, 지난본엔 갑자기 북부룰 가라고 시키더니…… 그 계시란 것도 참, 쉽진 않구냐.”

“그러게요……. 차라리 쉬웠다면 몸이라도 편했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소, 헤벤 공녀의 파트너룰 찾아줘야 하눈 고냐? 이젠 중매쟁이 노룻까지 하눈구나.”

“하하하. 그러게요……?”

그랬다. 내가 그 공녀 언니에게 약속한 애인 후보를 찾아줘야 한다.

조건은 잘생길 것, 그리고 공녀 언니보다는 신분이 낮으며 여차하면 쿨하게 헤어질 수 있을 것.

이외에 연기도 잘하고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부가적인 문제다.

“내 유모에 이오소, 대공의 약혼쟈. 다움은 공녀의 중매쟁이도냐? 대체 다움은 또 모가 될지 기대되면서도 염려되눈데.”

글쎄요, 그 다음은…… 대마법사의 연인?

나는 어색하게 웃는 채로 심장을 꾹꾹 눌렀다.

“그래소 남자룰 찾눈 곤 잘 하고 있눈 곤가?”

“그게 말이에요……. 음,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요.”

나는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리제에게 부탁해서 사람을 알아봐달라고는 했는데,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일단 외모에서 통과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외모에서 통과하면 그 다음 조건이 맞지 않고, 그래서 외모를 조금 낮춰봤지만 그럼에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만큼 헤벤 공작가가 참으로 대단한 곳이기에 욕심내지 않고 얌전히 물러날 야망 없는 젊은이 찾기가 어렵달까?

“그렇다고 야망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자니, 가짜 연인을 할 만큼 배포가 크질 않고요. 이거 완전 딜레마에요. 으윽…….”

“흐움, 그렇균.”

래빗은 내 말을 듣고 곰곰이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롤린, 그고 말이다……. 그 조건이 그 모냐, 면상이 반반하묜서도.”

“면상이 뭐예요, 황녀님. 얼굴! 얼굴!”

“아 그래, 와꾸가…… 크훔, 아니, 잘생긴 놈이묜서도 볼일이 끝나묜 시원하게 헤어지묜 되는 고지?”

“네, 맞아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황녀님 지금 표정이…… 으음. 생양파 씹은 표정이신데?”

아닌 게 아니라 래빗은 내게 말하면서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굉장히 오묘했다.

“아니, 내가 지굼 아주 적졸한 사람울 떠올렸고든? 그런데…….”

“네? 누구요? 누구?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얼른 이 세 번째 이야기를 해치우고 싶었던 마음인지라 몸이 앞서 나갔다. 내가 박력 있게 탁자를 팍팍 내려치자, 래빗이 드물게도 움찔했다.

“아니, 그…… 너도 알고 있눈 인간인데…….”

“네? 저도 알고 있는 사람이요?”

래빗과 나 사이에 공통된 인맥이라니. 이상한데?

‘그럼 황족밖에 없잖아?’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최대한 경악을 참아내려 했지만 결국 당혹스러움이 툭 튀어나가고 말았다.

“아니, 황녀님 설마 라이칸 황자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사탄도 울고 갈 계책에 나는 입만 쩍 벌렸다. 너무 잔인하잖아요!

“아니? 아니? 아니다! 오, 뎬쟝! 무순 소릴 하눈 고냐!”

“욕하지 마세요! 안 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끄응… 그곤 네가 몬저!”

아니, 잠깐만 그보다 라이칸이 아니라고? 그럼…….

“엑, 그럼 설마 노아 황자님요? 세상에나 그분은 사춘기도 안 지났어요!”

“아니다! 첫째! 첫째! 황태자놈울 말한 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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