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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4화 (184/281)

◈18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3)

나는 그제야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황자는 한 사람 더 있었지?

세상에, 평소 황태자를 황자 이전에 여동생 바보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더니 그만…….

‘아예 후보에서 아웃시키고 있었네.’

머쓱한 마음이 들어 목 뒤를 문질렀다.

“아니, 크흠,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황태자 전하라고요.”

“말하려고 해따! 근데 롤린, 너가 몬조 나섰지 않우냐!”

음, 그랬지. 급발진은 제가 했습죠……. 나는 얌전히 사죄했다.

“그, 저도 깜짝 놀랐단 말이에요. 순간 라이칸 황자님 말씀하시는 줄 알고요.”

“흐웅? 왜, 둘째 오라비묜 안 되도냐?”

“네? 그거야, 당연히.”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무어라 하려는데, 래빗의 눈이 어딘가 묘했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난 그대로 멈춰섰다.

“왜? 내 둘째 오뺘놈울 그로케 생각해줄 필요눈 없지 않우냐. 사실 그놈이 너룰…… 우웁! 웁! 무순 짓이야!”

“아하하하하.”

“놔라! 왜 갑자기 입울 막아?”

나는 래빗의 앙증맞은 입을 막고는 하하하, 연신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하지만 황녀님. 그 얘기는 더는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래빗은 귀엽게 찡그리고 볼을 부풀리면서도 더는 화를 내진 않았다. 대신 내 손을 떼놓고 나를 빤히 보더니 예쁜 눈동자를 살짝 다른 곳으로 굴렸다.

나는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래빗의 맞은 편에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화제를 얼른 돌렸다.

“저, 황녀님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라니요? 헤벤 공녀님 상대로 추천해주실 인물이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말 나온 김에 제대로 물어보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황태자라니.

나는 아직도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자기 여동생 주변에 나타난 귀족 영애가 좀 의심스럽다고 대뜸 아무도 없는 숲에 데려가 슥삭하려던 인간이잖아?’

심지어 여동생 일만 제외하면 이성적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계략가 스타일이다.

아무리 봐도 불같은 헤벤 공녀 언니 옆에 두기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 공녀 언니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거의 세계관 보스끼리 붙여두는 꼴 아닌가.’

내가 공녀 언니를 오래 보진 않았지만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궁합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게다가 헤벤 가 공녀의 연인으로 황태자라니, 이거 시원하게 헤어질 수나 있는 관계냐고.

“아무리 봐도 황태자 전하는 그 어디도 맞는 구석이 없는데요……?”

“왜 옵냐. 하나 있지 않누냐. 얼굴. 얼굴.”

“아, 그건 인정.”

그건 반박할 수 없지. 근데 잘생기기만 한 사람을 찾는 건 아닌데?

“안돼요, 황녀님. 차라리 얼굴이 좀 안되더라도 나머지 조건에 차는 사람을 찾으면 찾았지, 황태자 전하께서 어울릴 자린 아니라고요. 아니, 그보다 대체 황태자 전하를 추천하신 이유가 뭔가요?”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낸 연유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내가 알기로 황태자에겐 아직 연인도 약혼자도 없는 상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장성한 제국의 차기 후계자가 상대가 없는 상태라니 새삼스럽게 이상하긴 했다.

‘……혹시 심각한 하자라도 있나?’

의심이 솔솔 피어오를 무렵, 래빗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그놈이 왜 안 되눈 고냐?”

“그거야, 일단은 공녀님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를 찾으니까요……?”

“왜 낮아야 하지?”

그건 혹시 남자 쪽에 문제가 있을 시, 신분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야 헤벤 공녀 측에서 일방적으로 이 관계를 주도하거나 끊기 쉽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래빗이 말했다.

“여차하묜 시원하게 헤어죠야 하니까 낮아야 한다눈 고지?”

“네, 뭐. 그렇죠?”

“생각해바라 롤린, 만약에 황태쟈 놈이 이 일울 허락했다고 치쟈. 미리 헤어지기로 합의한 일이묜 그놈 성격에 아주 철저히 끝낼 고 같지 않우냐?”

“어…… 그렇긴 한데요…….”

그건 그렇지. 황태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가장 집요한 인간이었다.

나와의 관계에서 래빗이 나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직도 은연중에 고집스럽게 심술 부리는 것만 봐도…….

“그롬 다룬 조곤은? 헤어질 때도 문제없이 헤어질 사람울 구하눈 고라고 했나?”

“네. 맞아요. 헤벤 가문의 재산을 욕심내지 않고 헤어져야죠. 헤어질 땐 섭섭지 않은 보상금을 제공하고서?”

“롤린, 이곳도 생각해바라.”

래빗이 조그만 검지를 쏘옥 치켜들었다. 딴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놈이 헤벤의 재산울 욕심내겠냐?”

“……아니죠?”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아니, 근데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그 뭐냐, 정치적으로 헤벤 공작가가 탐날 수도 있고.”

“황위 경쟁울 하눈 것도 아닌데 왜 필요하게쏘? 그놈운 이미 차기 황졔 확종이야. 외가도 아쥬아쥬 돈이 많아소 돈이 부죡하지도 않지!”

“……그것도 그렇네요?”

잠깐만. 내가 혹할 때가 아니잖아?

“아니, 잠깐만요! 황녀님. 황녀님. 근본적으로 가자고요. 그런 황태자 전하가 헤벤 공녀님과 이해관계가 일치나 하겠냐구요? 서로 필요하지도 않은데.”

“아니, 피료해.”

“네?”

“그놈에게도 옆에 있어 줄 뇨자가 피료하다고.”

황태자에게?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래빗을 응시했다. 설마 이 황녀님, 오빠의 관심이 귀찮아서 애인을 만들어주고 싶다거나…….

“왜 그론 의심스러운 눈울 하눈 건지 모르겠지만, 불굥하도다.”

“으음, 황태자 전하가 귀찮으셔서 쫓아내려고 애인 만들어주려고 하시나 싶어서요.”

“모, 그런 생각을 해본 족은 있지만…… 그곤 아니다.”

생각을 하긴 해보셨구나.

래빗의 사정인즉 이러했다.

황태자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이웃 나라 공주가 생겼다는 모양이다. 이번 추수제를 통해서 제국에 사절단을 보낸 나라인데, 그 공주님이 아주 홀딱 반해서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나?

‘나 참. 그 공주 언니 나처럼 얼빠시구나. 황태자 성격 제대로 알면 까무러칠 텐데…….’

문제는 그 공주님이 왕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자, 왕국이 제국과는 아주 주요한 물건을 거래하는 곳이라 거절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상황이란다.

그냥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황태자는 혼인으로 그 왕국에 발이 묶이는 게 매우 싫다는 모양. 결국 서로가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거절하는 수밖엔 없는데…….

허어, 그쪽도 배우가 필요하시다?

심지어 헤벤 공녀 언니처럼 깔끔하게 헤어질 사람이 필요한 모양.

어쩜 자로 잰 것처럼 일이 이렇게 뚝딱 맞아 떨어지는지.

요정의 개입을 의심했지만, 이놈들은 내 일이나 원작에 관련한 일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첫 번째 이야기에 이제 와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확실히 사정만 들어서는…….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데 말이죠…….”

“구래, 그로탄 말이다! 나눈 없눈 소린 하지 않눈다.”

래빗이 엣헴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우리 아기 황녀님은 알기는 알까? 억지로 어른스러운 척 팔짱을 낄 때 더 귀여워 보인다는 걸.

“서로가 서로룰 필요로 하눈 상황이니 일단 소개나 시켜 보면 어떠하누냐? 급하다묘?”

“음……. 소개만 시키는 거라면야.”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 둘이 안 맞으면 파투내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황태자를 소개할 때 공녀 언니의 사정을 다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일단 시도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럼 시도나 해볼까요?”

좋아. 래빗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는 완연히 아이다운 예쁜 웃음이었다.

“이 몸이 도움이 되었꾸나!”

나를 도와주려고 이렇게 애를 썼다는 점이 새삼 감동이었다.

그렇게 한창 대화에 열을 냈던 래빗이 돌연 내 뒤쪽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동그란 눈을 바늘처럼 가늘게 좁혔다.

“그론데 달린, 내가 열심히 기다룟는데 말이지…… 뒤에 저 놈운 언제 소개시켜 줄 고지?”

“……네?”

래빗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표정만은 진지했다.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어어…… 어떻게 아셨어요?”

“오또케 알기눈, 눈에 보이눈데 어떠케 모룰 수가 있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야말루 묻고 싶운데, 하녀가 컵울 두 개만 챙겨조찌.”

“…….”

“분명 네가 들어오눈 것을 보고도 말이야.”

래빗이 자신이 들고 온 커다란 접시를 고갯짓했다. 그곳에는 식어가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우숩지도 않지. 황실에 사람이 몰래 둘어오눈데 이로케 아무도 모룰 수가 있나?”

나는 끙 소리와 함께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으음, 황녀님 사실 그게요…….”

사실 조금 전 래빗이 라이칸의 이야기를 꺼낼 때 내가 괜히 래빗의 입을 가로막은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내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서 있었으니까.

“뭐야, 저곤? 가묜울 쓰고 있어?”

등 뒤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간지러운 웃음소리였다.

곧 살랑, 내 뺨으로 보드라운 천이 스쳤다. 고개를 드니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리는 로브 자락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가면을 쓴 사람은 발데르였다.

내 옆에서 일상을 관찰하는 대신 필요한 자리에선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는데…….

어깨로 커다란 손이 살짝 얹혔다.

“이런. 들킬 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죠?”

가면 아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주황빛 눈은 언제나처럼 졸음에 잠겨 있었지만 단정하고 부드러웠다.

“……허어. 달린.”

래빗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 남자인 고야?”

“……네? 아, 음 저, 그게.”

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곤 대마법사 아닌가?”

“으음, 맞아요.”

발데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입으로 가느다란 감탄이 흘러나왔다.

“흐음? 혼동을 주는 마법을 걸었는데 정체를 바로 알아보시다니, 황녀님은 마법이 잘 통하는 체질이 아니시군요. 흥미로운걸요?”

“원래 눈속임 따위눈 진쨔 검사의 눈울 속이지 못하눈 법이댜.”

황녀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아무리 봐도 황녀님 나이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요?

“그래소, 둘운 무순 사이인 고지?”

그 말에 나와 발데르가 서로를 마주했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영애. 내가 명확하게 인지를 못 한 것 같은데, 여기선 애인 행세를 하면 되나요?”

내 눈이 커졌다.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이 살며시 올라왔다. 겹친 손끝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지고는 떨어진다.

“……아니면, 당신에게 푹 빠진 남자 행세를 하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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