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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9화 (189/281)

◈18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8)

아니,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손에 넣긴 뭘 넣습니까. 공녀언니의 말이 끝나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황태자가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아아, 어쩐지 아버지께서 소환해도 보기 힘든 대마법사께서 여기 있는 이유가 있었군요?”

“모처럼 뜻이 맞네요, 달링. 저도 참 신기하던 참이었거든요.”

아니, 두 분 왜 갑자기 이럴 때만 의견이 딱딱 맞으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대마법사가 수고를 들여가며 날 이동시킬 이유가 없긴 하지요. 합리적입니다.”

“흐응, 역시 사랑은 모든 불합리를 합리로 만들어버리는 묘약이죠.”

달링이란 소리는 무슨 철천지원수 부르듯이 부르면서, 쿵짝은 잘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야기가 그리로.”

“어머, 영애, 난 농담이 아니에요.”

“네?”

“영애가 그날 내게 말한 되고 싶은 사람이란, 악독한 사람인 동시에 결국 악명을 쌓는 일 아닌가요? 부도덕, 금단, 이것만큼 악명과 가까운 것이 또 뭐가 있죠? 아니면 범죄라도 저지르시려고? 난 나쁘지 않다고 봐요.”

“…….”

“영애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뭐 어때요? 셋을 동시에 교제한 게 아니라 해도 사람들이 이렇게 여기면, 영애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니, 이상한 말인데 뭔가 묘하게 빨려 들어가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서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영애는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게 영 거슬리는 모양이에요.”

공녀 언니가 내 손을 살짝 잡고는 빙긋 웃었다. 뭐야, 이 언니. 왜 날 꼬시세요. 웃는 모습이 정말 그림에서 뿅 튀어나온 것처럼 예뻤다.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야죠?”

다만, 미소가 악업을 작당한 악당이나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마처럼 유혹적이었을 뿐.

“괜찮아요,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른 법이니까요.”

공녀 언니가 툭툭 자신의 입을 두드렸다.

“내가 굳이 시작을 뺨부터 한 건, 으음, 악독한 여자일수록 공격을 많이 받는 건 알죠?”

“네? 엄…….”

“욕하기 쉽잖아요? 공격하기도 좋고.”

그건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욕해도 되는 존재에게 더욱 잔인해지기도 하니까.

“아, 물론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한 추문이나, 오해나 왜곡된 말에 시달리거나. 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도를 넘는 사람이 꼭 있잖아요?”

“어, 네, 그렇죠……?”

“그런 인간들은 손수 먹여줘야 할 때가 있어요. 내가 너 하나는 응징할 수 있다는, 독기를 보여줄 때요.”

공녀 언니가 자신의 손을 우아하게 휙휙 흔들었다.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때로 입을 멈추지 않는 더러운 자들의 입을 닥치게 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다며.

“아, 물론 내 뒤에 있을 가문이 합쳐져 만든 권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영애, 이건 당신의 독기를 보여주는 행동이에요. 호락호락하게 져주진 않는다, 하는 모습을 심어주자고 제안한 거긴 해요. 당신은 너무 순하게 생겼어요.”

엄……. 그건 악녀보다는 싸움닭에 가깝지 않나 싶었지만 나는 얌전히 끄덕였다.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리가 없진 않았으니까.

누가 날 오해하고 오해에서 비롯된 소문을 가지고 날 조롱했다고 칠 때, 도를 넘은 비방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을 수도 있는 거고.

‘근데 난 좀 다르단 말이야.’

스킬 발동 전에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약해서 문제다. 누굴 때리다가 주먹 뼈든 손목이든 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스킬 발동을 해도 문제다. 상대의 턱 뼈가 나갈지도 모르니까.

힘조절, 그게 뭐죠.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이 죄다 암살자, 몬스터, 폭주한 주인공님 등의 힘 조절이 필요 없는 상대였다 보니…….

“하지만 영애에게 더욱 잘 맞는 방향을 찾았으니, 이쪽으로 한번 잘해보자고요.”

뭘 잘해보자는 거죠? 나는 불안 가득한 시선으로 공녀 언니를 보았지만 어쩐지 이 언니의 눈은 버려진 길고양이를 보듯 짠해졌다가도 무언가 야망으로 가득한 진득한 시선을 보냈다.

“제가 희대의 팜므파탈을 가르친 여자가 되는 건가요……. 오, 나쁘지 않아.”

“네? 팜므, 뭐요? 잠깐, 잠깐만요 공녀님!”

언니? 언니? 왜 혼자 다른 세계로 가신 얼굴을 하세요! 아니, 근데 공녀 언니의 말이 대체 무슨 말이야, 남성 셋을…… 아니, 그러니까 셋을…….

[놀랍습니다! 빙의자님이 자신의 재능을 깨달았어요! 악명 수치가 오릅니다! 15/ 100]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빙의자님의 소문이 퍼지는 중입니다. 가능성 있는 재능! 좀 더 자신의 악명을 널리 떨쳐봅시다! 20/100]

……뭐? 뭔데? 무슨 소문인데? 잠시 불안해졌지만, 일단 악명이 올랐다고 하니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래, 일단은 악명부터 올리고 이 퀘스트를 끝내 버리자.’

눈 딱 감고 악녀가 되면 되는 거 아니야. 알게 모르게 공녀 언니의 의견에 설득당한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지, 내가 뭐 라이칸이나 휴고랑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전에 두 사람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낑낑대며 괴로워하는 사이, 황태자는 어느새 발데르를 잡고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공녀 언니가 재밌다는 듯 여기 합세했다.

“호오, 그래서 정말로 교제하지 않는 겁니까? 정말로?”

“……제가 대답할 이유가 있습니까?”

“흐응, 대마법사님께선 불필요한 질문은 아예 무시하시면 하셨지 이렇게 답을 하는 분은 아니신 걸로 아는데…….”

“역시 에스테 영애를 아끼나 보군요?”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훑었다. 대체 뭘 했길래 이 남자를 이렇게 구슬렸냐, 하는 시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결요? 실험 대상이 되면 됩니다.

“영애, 그럼 이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공녀 언니와 황태자의 질문 세례에 반은 대충 답하거나 반은 흘려듣던 발데르가 돌연 내게 물었다. 그의 손끝엔 아직 발데르가 형태를 유지 중인 사람 모양 환상이 있었다.

얼굴은 다시 마네킹처럼 돌아간 지 오래였다.

“으음, 이제 그건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음, 이렇게는 어떻습니까?”

얼굴 쪽이 처음 보는 인상의 중년 남성 얼굴로 변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괜찮겠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렇게는요?”

발데르가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내자, 얼굴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라라, 이 얼굴은…….

“어머나, 달링이로군요?”

공녀 언니가 먼저 말했다. 비꼼과 웃음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랬다, 황태자의 얼굴이었다.

발데르는 별 생각 없어 보이는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건 어때? 하는 표정인데…….

“오…… 이 얼굴은 좀 괜찮을지도.”

나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왔다. 합, 얼른 입을 막았지만 이미 새어나간 뒤였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가 눈만 웃지 않는 채로 흐음? 하고 나를 응시 중이었다.

“아뇨, 아뇨, 아는 사람이니까 조오금 낫다고 할 지…….”

“아하, 영애. 평소에 나를 한 대쯤 시원하게 때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뭐, 새삼스러운 말씀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걸 참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 나도 공걈한댜, 롤린. 나도 저거 때릴 수 있울 고 가타!”

“……유엘?”

“저놈운, 특히 저 웃눈 얼굴운, 매룰 유발하눈 게 이쏘.”

그죠? 그죠? 역시 날 이해해주는 건 우리 아기 황녀님밖에 없다니까.

발데르가 띄워준 황태자의 얼굴은 매번 나를 은근하게 골탕 먹인 뒤의 황태자 표정과 똑같아서 정말이지, 한 대쯤은…… 가능하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얄미운 짓을 정도껏 해야 말이지.

“어머나, 저도 끼워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하, 공녀, 연인이 내 얼굴을 때리는 신선한 경험을 시켜주려는 겁니까?”

“어떤 경험이든 쌓아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공녀 언니는 진심으로 했던 말은 아니었는지, 이내 싱긋 한번 웃고는 황태자 얼굴을 한 환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간에 영애, 이제 방향이 잡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해요.”

“다음 단계요……?”

그런 것도 있었어? 아니, 있을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방금 어마어마한 소릴 계속 들었던 터라 뭐가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영애, 이번 주에 시간 되시나요?”

“네? 네. 됩니다. 공녀님.”

공녀 언니가 날짜를 세어 보더니 홀로 고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주에 황태자 전하와 난 수도 내 호수 공원에 갈 예정이에요. 날이 좋아 아마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겠죠?”

“네, 비가 오진 않는다면…….”

“영애도 참여하도록 해요.”

공녀 언니의 시선이 내 옆을 향했다.

“저기 계신 대마법사님을 파트너로서 함께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더블 데이트를 하자, 이거였는데…….

“소문에 불을 지펴야 하지 않겠어요?”

황태자에 공녀까지 있는 조합이면, 소문이 얼마나 잘 퍼지겠냐면서.

* * *

저택을 방문한 모든 손님이 돌아가고, 나는 응접실에 홀로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홀로는 아니었다. 황태자와 래빗을 이동 마법으로 데려다준 발데르가 곧 내 방에 다시 나타났으니까.

그를 본 순간 공녀 언니의 거절 못할 제안이 다시 떠올랐으나, 일단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으으으…….’

나는 나타난 발데르 얼굴을 보며 숨을 꿀꺽 삼켰다.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두 번째 지령 달성 조건

2) 남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기

달성 조건: ‘남자주인공’에게 애정을 고백해봅시다!]

두 번째 지령을 달성할 때가 온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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