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9)
“다녀오셨어요?”
나는 창문으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발데르가 날아서 훌쩍 들어오다 말고 멈칫했다.
왜인지 저 주황빛 눈으로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오묘한 표정이었다.
“음?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 그래도 이 남자에게 사랑 고백이니 뭐니, 뭐가 됐든 애정을 고백해야 하는 처지라 긴장돼 죽겠는데, 저런 표정을 하니 괜스레 더욱 긴장됐다.
이놈의 심장은 오늘도 눈치 없이 쿵쿵 뛰었다.
발데르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조금 놀란지라.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어서요.”
“어떤 말요? 아, 다녀오셨어요? 이 말 말인가요?”
“네.”
희한하네. 듣기 어려운 말은 아니지 않나? 존댓말은 아니어도 친구 사이에서도 다녀왔냐는 말이야 할 수 있는 거고.
대마법사쯤 되면 아랫사람에게 이런 말도 들어볼 수 있지 않나?
호기심이 차올랐지만 묻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이니, 저 사람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던 거겠지.
“으음, 무슨 영문인지 여쭙진 않을게요.”
“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그저 전 가족이 없었거든요.”
……안 물으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던 차에 속으로 쩔쩔매는 기분을 느꼈다.
“……가족이, 엄,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죠?”
저쪽에서 산뜻하게 넘겨버리니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지, 본인이 괜찮다고 한다면야……. 나는 뺨을 긁적였다.
이대로 넘기고 원래 하려던 목표에 집중할까. 그래, 집중이나 하자…….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후, 숨을 내쉬었다. 래빗이 보았다면 왜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얼굴이냐고 타박할 표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저, 주제 넘는 질문일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세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요. 엄……. 잠깐이지만 대마법사님 표정이 씁쓸하셨던 것 같아서요. 음, 역시 주제 넘는 얘기였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말입니까?”
발데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본인은 못 느낀 건가?’
조금 전 ‘가족이 없다’는 말을 할 때 발데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통사람과 비교하면 큰 변화가 있진 않았지만 저 사람은 표정이 늘 한결같은 사람이기에 더욱 잘 드러나는 변화였달까.
저 깊은 눈으로 스쳐 지나간 건 분명 씁쓸함이었다.
‘심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지.’
언제 죽을지도 모를 공포를 나보다도 오래, 그것도 한없이 오래 품고 지냈을지도 모를 남자였다. 나도 고작 몇 달 동안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바싹바싹 마르게 하는지 깊이 느꼈건만. 하물며 저 남자는 어땠을까.
거기다 가족마저 없었다니. 심지어 친했던 친구, 세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도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저 남자에게 또 다른 친한 지인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없었다면…….
“외로우셨겠네요.”
“…….”
발데르는 대꾸 없이 나를 응시했다.
잠깐 말을 잘못했나 싶었지만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보이며 웃어 보였다.
“전 그랬거든요,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뇨, 대마법사님은 의연해 보여요.”
그렇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오직 하나의 표정만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지.
저 눈매는 반쯤 감긴 탓에 날카롭단 생각도 못 할 만큼 유순하고 나른해 보이기나 하고. 지켜보다 보면 초상화랑 다르게 내 취향의 외양이 맞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데, 항시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소나무도 추위를 타는데, 대마법사님이라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머릿속으로는 지금까지 보았던 주인공들이 스쳐 지나갔다.
래빗과 휴고.
“저는 짧게 살았지만 그런 게 보이더라고요, 의연한 사람들은 날 때부터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의연한 사람은 깎이고 깎여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있거든요. 고통이 너무 익숙해서.”
가끔 현재 내 삶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시한폭탄처럼 언제 생존이 끝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삶 아닌가? 익숙해져서 어떻냐 싶지마는.
래빗의 걸걸한 모습이 사실 알고 보니 어떻게든 전생을 잊지 않으려던 한 황제의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처럼.
폭주가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지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다가 이젠 그 노력이 너무 당연해져서 스스로가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조차 못 하던 북부 대공님 휴고처럼.
“그냥, 제가 그런 사람을 봐서인가, 대마법사님도 이런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요.”
나는 뺨을 긁적였다. 막상 말하고 보니 머쓱한 기분이었다.
“혹시 제가 멋대로 지레짐작해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
의도치 않게 평가 아닌 평가의 말을 하게 됐으니, 나는 슬쩍 내 사정도 흘렸다.
“아무래도 대마법사님과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인가, 편하게 이야기가 나오네요. 전 비슷한 상황에서 외롭다고 느끼긴 했거든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흘리고는 곧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이거 이거, 의도치 않게 분위기를 잘 잡은 것 같은데…….
여기서 좀 괜찮은 말을 던지면 로맨틱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을까?
그럼 애정을 고백하기도 더 쉬울 거고, 애정을 고백하면? 두 번째 지령도 아주 쉽게 통과하는 거 아니겠어.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나는 메인 퀘스트 세 번에 슬슬 요정 이놈의 패턴을 파악한 게 아닐까? 오 지금 꽤 뿌듯했어.
나는 속으로 예스, 예스,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대마법사님, 이 분위기에 조금 뜬금없으시겠지만……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요.”
“고백?”
지금까지 침묵하던 발데르가 반응을 보였다.
어라, 나는 다음 말을 꺼내려다 말고 멈칫했다.
발데르가 반응을 보인 걸로 모자라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놀라라. 이 사람은 불쑥불쑥 들이미는 걸 엄청 좋아하네.
문제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게, 특히나 내 심장에 아주 좋지 않았다.
“드디어 고백하기로 한 겁니까?”
“네? 무슨 고백……이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나를 애인으로 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고백이 먼저일 거라곤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게 하려는 건가요?”
“어엄…… 그, 어, 그게, 일단 제가 요청드린 건 어디까지나 협력이고…… 진짜는 아닌.”
“그럼 아니라는 건가요?”
“아뇨, 아뇨. 또 그렇게 말하면 맞기는 한데, 그게 음.”
요정 놈이 시켜서 당신에게 일단 어떻게든 애정을 고백할 생각이고 타이밍을 노리고 있습니다. 를 정중하고도 합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숨을 삼켰다.
이 와중에도 우심방과 좌심방은 제 차례라는 듯이 마구 날뛰었다. 심장 고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저 남자에게 들킬까 봐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래요, 맞아요. 지금 대마법사님께 나름의 애정을 고백해보려고요.”
나는 당돌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0.3초 만에 후회했지만.
아니, 왜 더 가까워진 거야……?!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하필 조각상처럼 섬세하게 잘생기고 부드러운 내 취향의 얼굴이 앞에 있으니 하려던 말도 쏙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애정. 애정이라……. 그것도 처음 듣는 말이네요.”
“……그, 그러세요?”
“영애, 그전에 말이죠.”
발데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지? 손을 얹으라는 건가? 신사가 춤을 신청할 때랑 비슷한 손 모양에 눈치를 보며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발데르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어라?
“대마법사에게 자꾸 처음을 쥐여 주는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영애는 모르나 봅니다.”
“……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난. 영애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극할수록.”
“…….”
“영애의 안쪽이 더욱 궁금해져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이 당신을 한계로 몰아붙였는지.”
어우 깜짝이야. 순간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음란마귀가 씔 뻔했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잘생긴 남자가 눈앞에서 속삭이는데 심지어 심장도 고장나서 이 남자를 향해 뛰는 상황 아닌가?
“이러다 결국엔 영애의 운명에 손을 대고 싶어졌을 때. 멈출 수 없으면 어떡하죠?”
“……손을 떼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맘대로 되지 않더라고. 지금 당신 앞에 어느새 몸을 기울이는 것처럼요.”
“…….”
……이 남자 혹시 선수인가? 알고 보면 소싯적에 연애 좀 해봤다거나? 아니, 당신은 원작 출신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사람을 잘 꼬시죠?
“책임져 주면 안 되나요?”
꿀이 뚝뚝 흐르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에서는 ‘책임은 무슨 책임이야?’ 외치는데 좌심방은 ‘아, 저 얼굴 완전 최고다, 오예, 오예, 이렇게 된 거 약혼 한 번 더 하자!’라는 이성 잃은 주접을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지금이 바로 절호의 타이밍 아닌가? 요정이 내려준 지령, 애정을 고백하기엔 말이다.
“으음, 음…… 대마법사님?”
“네.”
“머리카락이…… 아주 부드러워 보이시네요.”
“만져볼래요?”
“네? 아뇨! 엄, 그, 그래. 어깨도 넓으시고요?”
“안아봐도 좋아요.”
“…….”
엄마야. 이 사람 미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