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91화 (191/281)

◈19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0)

나는 도무지 몇 번째 삼키는지 모를 침을 또 한 번 꼴딱꼴딱 삼켰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했다.

“눈동자도 색이 아주 예쁘고 깊으시네요.”

“영애의 눈이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

“…….”

“녹색을 좋아합니다.”

“……그래요? 음, 저는 잘생긴 거 좋아하는데.”

그러자 발데르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그건 난데?”

엄마야! 엄마야!

나는 이젠 심장이 거세게 뛰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아 허겁지겁 입술과 가슴을 꾹 눌러야 했다. 야, 요정아 나와. 나와보라고. 나 이 메인 퀘스트 못 해먹겠다!

그러나 지령은 지령, 나는 이제는 북소리처럼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꾹꾹 누르며 열심히 이 남자에게 애정을 어필(?), 그래, 어필을 빙자한 칭찬을 날렸다.

한데 어째서인지, 몇 번을 이어가도 지령에 성공했다는 요정의 창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지? 왜 안 뜨는 건데?

그때였다.

[저런, 빙의자님은 진심으로 임하지 않으셨어요! (◞‸◟;) ]

[요정의 팁! 지령 달성 조건은 빙의자님의 진심에 반응합니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단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내가 뭐,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요정의 창은 순도 100% 진심에만 반응합니다! 빙의자님은 현재 주인공이시니까요!]

[남자주인공과 그를 향한 설렘에 좀 더 집중하길 권고해봅니다.]

해맑은 창에 미간을 찡그린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러나요? 또 무언가 영애를 방해하나요?”

“네, 네?”

발데르가 맑게 속삭였다.

“없애줄까?”

뚝 짧아진 말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분 나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빙의자님, 지금은 주인공이시니 마음에 걸리는 것을 잠시 지우세요. 집중해주세요!]

……내가? 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고? 그게 뭔데?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들린 걸지 모르겠지만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키득키득.

그 순간 무언가 와장창 몰입이 깨지는 기분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나 또한 뚜렷한 이유 없이 그저 무언가 내 머릿속을 매만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발데르의 손을 확 잡아챘다. 발데르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네. 부탁해요.”

또박또박 말했다.

“없애줘요. 할 수 있어, 당신?”

네가 말을 까면 나도 깐다, 이런 건 아니었지만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이 웃음소리를 쫓아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어 절로 말이 급히 흘러나왔다. 내가 들어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발데르는 더 이상 놀라는 일 없이 그저 아주 평범한 대사를 들었다는 듯 끄덕였다.

발데르의 손에서 그의 눈동자를 닮은 예쁜 주황빛이 흘러나왔다. 석양을 닮은 색에 감탄하며 멍하니 쳐다볼 때였다.

파지지지직!

몇 번 보았던 붉은 번개가 허공에 일었다.

[빙- 지지직- 은- 지지지직! ……공 지지직!]

처음으로 요정의 창에 떠오른 메시지가 흐려지더니 점차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완전히 사라지고 허공을 바라보게 된 내 기분이란…….

후련했다.

‘하, 하하하……. 아, 역시 너도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기분이었다.

“이제 됐어?”

왜인지 더는 심장이 뛰지 않았음에도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이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응, 됐어.”

나는 답답한 가면을 벗은 것처럼 상쾌함을 느끼며 발데르의 눈을 똑바로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대로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대마법사님. 지금 당신이 진심으로 마음에 든 것 같아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두 번째 지령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달성 조건: ‘남자주인공’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고백해봅시다!]

발데르의 힘으로 사라진 지 수초 만에 요정의 창이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나타났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달성 조건: ‘남자주인공’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고백해봅시다!]

그저 한 문구에 집중하며 깨달았다.

아하, 이거 이제 좀 알겠다……. 이렇게 풀어가는 거였구만?

다시금 비정상적인 심장 박동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듯한 설렘을 담고 뛰는 심장.

조금 전 발데르에게 외쳤을 때 느낀 상쾌함은 어디에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감각만은 내 안에 새겨진 것처럼 남아있었다. 그래, 관건은 진심이라 이거지.

나는 씩 웃었다.

더는 이 심장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세 번째 지령조건 ‘위기’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공개 조건: ‘남자주인공’ 외에 다른 남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세요.]

그렇기에 이어서 떠오른 세 번째 지령 조건도 제법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도움이 되었나요?”

“네, 아주 많이요.”

난 문득 아직도 발데르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손을 놓아주려 했다.

그러나 손을 놓자 아프지 않은 힘이 되돌아와 내 손을 그대로 붙잡았다. 이번엔 도리어 그의 손에 잡힌 형국이었다.

“큰일 났어요, 영애.”

“……네?”

발데르가 내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설렘과 심장 고동이 돌아온 탓일까, 아랫배에 살짝 힘이 들어가고 등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슬슬 당신이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

“…….”

“……라는 위험한 생각이 드네요.”

싱긋, 부드럽게 웃는 남자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 * *

도대체 이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진정으로 이룩하려는 목표가 뭘까?

‘첫 번째 이야기, 육아물에서는 래빗을 원래대로 아기 황녀로 만드는 게 목표였지. 두 번째, 계약결혼물에서는 휴고를 클리셰적인 북부 대공으로 만들고 원작에는 없던 폭주를 막는 거였고.’

보다시피 원작에서 틀어진 것들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여긴 이미 주인공들이 죽어버린 세계다.

요정들은 단순히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으로 만족하는가?

거기서 끝일까?

‘아우, 왜 이런 놈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로판을 많이 읽은 게 죄는 아니잖아!’

나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요정은 원작이 원작 그대로 보존되기를 원한다.

그럼 세 번째 이야기도 내가 아는 책 속 그 내용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마침 이 세 번째 원작은 드물게도 거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부터가 이상해.’

세 번째 이야기, 악녀 빙의물.

여기의 주인공 언니는 공작가의 금지옥엽이지만 안하무인하고 온갖 갑질을 일삼았던 악녀의 몸에 빙의한다. 제국에 헤벤 공녀 언니 말고도 공작가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거기 딸이다.

하지만 나를 보라. 일단 배경부터가 탈락이다. 백작 가문이지만 사실상 별 특징 없는 가문. 과거엔 재산이라도 많았지, 딸의 불치병을 치료한답시고 많던 재산도 반 이상 날려버리게 된 가문이다.

이처럼 주인공 스펙부터가 너무나 차이가 나는데, 내가 유일하게 세 번째 원작과 같은 부분이 있다면 단 하나다.

빙의자라는 점.

사실 이 조건이 제일 중요했던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가는데, 문이 달칵 열렸다.

“아가씨!”

“아, 베키. 어서 와.”

트레이를 끌고 온 베키가 내게 차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천을 풀어 내게 내밀었다.

“약 드셔야죠.”

“윽…….”

이 약 되게 오랜만에 먹는 기분인데. 확실히 기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북부로 떠났을 때 베키도 부모님도 내 지병에 먹는 약들을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하지만 베키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모님껜 죄송하게도…….

‘전혀 안 먹었지?’

변명하자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가는 길엔 만난 지 얼마 안 된 주인공 휴고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지, 북부에 도착한 뒤로는 사건이 팡팡 터지지. 솔직하게 말해서 약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다행스럽게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땐 집안이 어수선한 상황이었던지라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아서 좋았지만.

게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식구들이 각기 다들 할 일이 많았다. 병석에서 막 일어난 부친은 회복하느라 바빴고 모친과 파울로는 부친을 대신해서 집안과 상회의 업무를 처리하고 부친의 회복을 돕느라 바빴다.

거기다 그 다음엔 바로 추수제가 있었지.

결국 가족들과 베키가 내 약을 다시 꼬박꼬박 챙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단 소리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렇지만 이 약들은 영 반갑지 않았다.

‘윽, 진짜 안 먹고 싶은데…….’

천 위로 놓인 익숙한 약들, 다시 봐도 적응되지 않는 색이었다. 특히나 저 빨간 약은…… 언제 봐도 뭔가 께름칙하고 불길하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뒤를 보았다. 최근 늘 내 뒤를 지키던 발데르는 오늘 오전 아주 잠깐 마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시 외출 중이었다.

‘……발데르라도 있었으면 이 약 먹은 척할 테니까 치워달라고 할 수 있었는데.’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약을 들어 올렸다.

나를 아끼는 가족이나 베키의 눈물 바람을 보는 것보다야, 그저 쓴맛 한번 참고 삼키는 게 나았으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별일 없었으니. 이제 와 무슨 일이 있겠어?

막 약을 먹고 나자, 베키가 기다렸다는 듯 달콤한 사탕을 내밀었다.

난 우물우물 사탕을 먹으며 쿠키를 들어 올렸다.

“아가씨, 사탕 다 드시고 드셔요.”

“베키, 난 내가 모시는 래빗 황녀님처럼 아기가 아니야. 취향을 존중해줘.”

“끄응……. 네. 아, 황녀님 말인데 정말 귀여우세요……. 또 방문하시진 않으실까요?”

우리 래빗이 귀엽긴 엄청 귀엽지. 베키랑 이야기 나누는 동안 불길했던 빨간 약의 잔상은 머리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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