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3화 (203/281)

◈20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2)

‘발데르가? 전혀 집착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요정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물론 로판의 남주들 덕목 중 하나가 ‘집착’ 속성이란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늘 부드러운 태도를 견지하며 눈을 반쯤 뜨고 다녀서 나른하거나 지루해 보이는 저 발데르의 모습은 좀처럼 집착이라는 단어와 어우러지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저 남자가 내게 감정을 드러냈을 때는 숨이 살짝 막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강제로 느끼는 심장 박동이나 설렘 때문이었지, 그걸 집착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긴급! 요정은 ‘빙의자’님을 위해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하기로 했어요! 요정의 애정입니다! (╯︵╰,)]

[세 번째 이야기 캐릭터의 ‘집착지수’를 볼 수 있습니다!]

집착 지수?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50/100]

[주의! 집착지수가 100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º·(˚ ˃̣̣̥⌓˂̣̣̥ )‧º·˚]

요정의 창은 경고라도 하듯 후다다닥 나타났다가 마찬가지로 후다닥 사라졌다.

마치 발데르에게 들키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집착지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요정이 지령에 개입합니다. ‘서브 남주’가 강제로 세 번째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뭐?

생각에 잠기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잠깐, 잠깐 뭐가 어떻다고?

[‘나만의 로판 기능’과 연계되어 인물 ‘라이칸’과 인물 ‘휴고’가 서브 남주로 참여합니다.]

[세 번째 지령 수행 중에 이상을 감지하여, 새로운 지령이 주어집니다!]

[세 번째 지령 ‘위기’ 새로운 달성 조건!]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3) 위기- 서브 남주 등장

달성 조건: ‘서브 남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애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봅시다.

※남자주인공의 집착지수를 낮추고 서브 남자주인공과의 애정도를 똑같이 맞춰주세요.]

[악녀의 덕목은 이성을 애태우는 것에도 있지 않을까요?

한 사람에게 만족하지 말아요, 이를 위해 준비한 서브남!

남성들에게 똑같은 애정을 나눠주세요!]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럴수록 발데르가 지난번처럼 나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허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이게 대체…….

[요정은 ‘빙의자’님을 죽게 둘 수 없어요!゜・.(iДi)。:゚]

무슨 개소리야? 나더러 서브 남주를 택하라더니…… 네 멋대로 선택해놓고서!

이렇게 멋대로 개입할 거면 그냥 네가 빙의자도 하고 주인공도 할 것이지, 대체 날 더러 뭘 하라는 거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굳이 일을 꼬지 않기 위해 서브 남자주인공을 택하지 않으려 했기에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요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해요. 집착지수의 상승도가 지나치게 빨라요! ‘남자주인공’의 집착지수가 100이 되면 빙의자님은 사망… 지지직! 한다… 지직! 전합니다!]

“달린?”

눈앞으로 손이 등장하며, 이전처럼 요정의 창이 억지로 사라졌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르른 창이 그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남자주인공’의 집착지수 60/100]

“방금 무언가 살짝 기분 나쁜 것이 느껴져서 개입했어요. 괜찮은가요?”

“…….”

[‘남자주인공’의 집착지수 70/100]

나는 숨을 살짝 삼켰다.

황홀할 정도로 예쁜 얼굴 앞에서 여전히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네. 이번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혼란스러웠다. 많은 것이 찝찝하긴 했지만 일단 홀로 남았을 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황자님을 만날게요.”

발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허공을 보는 것 같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렇게 발데르가 허공에서 스르륵 사라지고, 이어서 파올로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 네 연애는?’ 하고 속삭이고는 나가버렸다.

홀로 남게 되자, 살짝 참았던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방금 대체 뭐였던 거야?’

요정 그놈이 제멋대로 선택해놓고선 지령마저 멋대로 바꾸는 파렴치한 행위에 화가 났었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은 화마저 잊게 만들었다.

요정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치 없이 평소처럼 푸르른 창을 띄울 뿐이었다.

[훌륭한 재능 활용! 역시 악녀는 여러 남성의 이성을 홀릴 줄 알아야하는 법. 악명 수치가 오릅니다! 45/100]

[많은 사람들의 입에 당신이 ‘악녀’로서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멋진 재능!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55 /100]

……이 와중에 악명도는 착실히 올랐다니.

내가 한 거라곤 약 먹고 죽을 뻔했다가 이제 막 눈을 떠 주치의가 죽은 걸 알게 되었다.

이게 끝이었다. 어쨌든 퀘스트 해결에 가장 중요한 악명도가 올랐다니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억울해졌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끝나고 내 평판 괜찮은 걸까?’

일단 필요하니까 올리긴 하는데…….

걱정은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서 어떡하겠어.

그저 갑작스럽게 등장한 서브남주와 집착지수란 게 걱정될 뿐이었다.

‘일단 곧 만날 라이칸부터 생각하자.’

난 천천히 숨을 가라앉혔다.

사실 라이칸을 본다고 하니, 라이칸이 어떤 반응일까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에 미쳤다.

아마도 나를 보자마자 발끈하거나 화를 내지 않을까? 그 사람은 어째 걱정되는 마음도 화를 내면서 표현하는 것 같았으니까.

실제 예로 북부 영지에서 만났을 때 내가 다친 모습을 보며 소리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분명 그 날카로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화를 내곤 했었지.

어째 수줍을 때도 고백을 할 때도 묘하게 목소리부터 높아지던 사람이었다.

웃옷 위에 숄을 걸치고 응접실로 가자, 곧 문을 열고 라이칸이 들어섰다. 나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2황자님을 뵙습니다.”

“영애!”

나를 본 순간 라이칸이 놀라 얼른 다가왔다.

“일어나지 마라. 아직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 아닌가?”

“네?”

“어째서 응접실로 나를 부른 거지? 침실로 부르지 않고서!”

“그, 침실이요?”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그대의 침실로 안내해라!”

“……네?”

어디로요?

“그, 어, 어디요?”

“침실! 그대의 침실로 가야겠어!”

나는 눈만 끔뻑였다. 어, 음. 아무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니, 인식을 못 한 건가?

“그으, 라이칸 황자님, 지금 무슨 말 하신 건지 알고 계신 거죠? 제, 침실로 가달라는 건 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어도 엄, 그렇고 그렇게 들리는데요. 혹시 저를 유혹하시는 건……지……?”

마지막 말은 장난이나 조금 쳐보려고 내뱉은 건데, 말을 흘리자마자 난 곧 후회했다.

이 남자가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은 탓에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너무 가까운 탓에…… 실시간으로 그의 얼굴이며 몸 전체가 붉어지는 절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라……. 역시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몰랐던 모양이네.’

그러자 이 사람에게 잡혀 있는 손이 신경 쓰였다.

왜냐, 손톱 밑까지 이렇게 시뻘게지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아니, 지난번에도 한 번 보았지만 주인공은 역시나 이 남자였다.

휴고도 한 붉어짐 하는데, 이 남자는 평소에는 상상도 못하는 반전에 가까운 모습이어서일까 더욱 시선을 이끄는 느낌이었다.

“아, 나, 나는 그저…… 그.”

나는 라이칸이 이제 실언을 했다고 사과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공연히 수줍음과 부끄러움에 못 이겨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발끈하거나.

어느 쪽이든 내게 익숙한 모습이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 병증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면 래빗도 많이 걱정했을 테니 황자님이 가서 래빗을 안심 좀 시켜달라,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그러나 고개를 든 순간 모든 생각이 일시에 정지했다. 그러더니 백지가 된 듯 싹 사라졌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황자님?”

라이칸이 울고 있었다. 그것도 완전히 빨개진 그 얼굴 그대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말 후두둑 떨어졌다.

라이칸이 얼른 자신의 눈을 부여잡았지만, 손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라이칸, 이라 하지 않았나.”

내 손을 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떨고 있었다.

“나는, 나는 정말로……. 그대를 잃는 줄 알고…….”

“어…….”

“그대가 정말로 죽는 줄로만 알았어……. 얼굴이 정말 죽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변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는 것만, 같았다.”

“…….”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여태까지 휴고 덕분이랄지, 남자의 눈물에는 익숙해졌다고 느꼈지만…….

나는 인정했다.

세상에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그저 까칠하고 사납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모든 걸 차갑게 관조하던 얼굴이, 내 앞에서 붉게 흐드러진 채 서럽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내가 정말로 죽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서럽고 슬프게 울어줄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었구나.

왜일까. 난 늘 생존을 최우선의 목표로 살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있었지만 그 감각은 마치 남의 죽음을 보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죽으면 그래도 부모님, 파올로, 리제,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인 래빗이 울어주겠지.

막연히 그런 생각 정도는 했지만…….

‘이 남자가 이렇게 서럽게 울 줄은 몰랐네.’

물론 이 남자의 눈물 자체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섧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있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울지 마세요. 음, 그, 안 죽었잖아요?”

“영애는 지금! 그걸, 마, 말이라고!”

“어, 말이라고 한 거긴 한데요……. 아니 울지 마시라는 게 핵심…….”

“그대는 늘 그런 식이다! 늘, 이런 식이지.”

라이칸이 내 손을 붙잡은 그대로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런 말대꾸조차 이제 듣지 못할 줄 알고, 놀랐다.”

“…….”

이 사람 생각보다 내가 쫑알쫑알 대꾸하는 것을 좋아했구나. 아니, 이런 실없는 생각으로 진지한 감정들은 몰아버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오묘한 기분의 원인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 인정한다.

내 취향인 데다 나를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말해준 남자다. 하지만 절대로 망가지지는 않을 것 같은 남자였는데 그런 그가 이렇게 무너져서는 나를 붙잡지 않는가.

문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설사 끌린다고 한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점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완료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강제로 된 거라지만 라이칸이 서브 남주가 되었으니, 아주 약간이나마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이쯤 되어선 여기서 여지를 주는 게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길 아닌가? 물론 악녀가 되어야 하는 내 입장에선 정답이 아닐까 싶지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어떡해.

[이마저 이용하셔야 훌륭한 악녀가 된답니다, 빙의자님.]

시끄러워.

네가 나를 아무리 가지고 놀려 들더라도.

내 마음은 내 거야.

나는 이를 꾹 물었다.

“고백할 것이 있어요, 라이칸 황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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