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3)
내 말에 라이칸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우리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이쪽은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지만.’
라이칸의 깊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항상 까칠하고 날카로우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미동도 없던 남자가, 이제 내 작은 숨소리 하나하나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왜 이런 것들이 싫지 않을까.
‘와, 미션을 수행하다가 몸도 마음도 악녀화 되기라도 한 건지.’
[꺄르르, 요정이 웃어요. 아주 잘 하고 계세요! 빙의자님 (´∇`*)ノ]
닥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라이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라이칸 황자님은 저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으세요?”
“저, 영애. 지금 우리…….”
“한 번쯤은, 아니 꽤 많이 있으실 거예요. 아닌가요?”
내 단호한 질문에 라이칸은 어쩐 일인지 답변하기는커녕 시선을 피하며 쩔쩔매기 바빴다.
내 손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여, 영애. 미안하지만 너무 가까워서 들리지가 않는다!”
“네?”
“그대의, 이, 입술만 보인단 말이다.”
아. 나는 그제야 하려던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줄곧 제 입술만 보셨던 거예요?”
“아니다……!”
라이칸이 내 손을 놓고 황급히 떨어졌다.
나를 바라보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자신의 입과 턱을 손으로 가린 채로.
“누, 눈도 보았고, 코도 보았고, 입도 본 것이지…….”
“짧은 시간에 샅샅이 보셨군요?”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아니,”
“아니에요?”
“…….”
라이칸이 말이 없어졌다.
조금 탄 듯한 그을린 피부에 꽃처럼 붉게 물드는 모습은 솔직히 장관이긴 했다.
장난은 여기서 그만해야 할 것 같지만.
나는 요정의 창이 없음에도 의식적으로 허공을 한번 바라보았다.
“저, 그럼 하던 이야기 계속 해도 돼요? 조금 전엔 제 말을 못 들으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드려 보자면요. 혹시 저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
“……이상하다? 어떤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대가 이상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라이칸이 여전히 한 손으로 자신의 턱과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 저렇게 붉어진 와중에 할 말은 다 하시네?
“그럼 제가 항상 이상했다는 거예요?”
“그럼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건가? 영애가 첫 만남에 했던 행동을 생각해보게. 그때 영애는 내게…….”
“겁나 잘생겼다고 했죠?”
“…….”
“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넘어져서 덮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다시 사과드릴게요.”
“……더, 덮.”
“덮치는 거요?”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왜 분노하세요…….”
나는 괜히 움찔해서는 뒤로 물러났다. 어휴 깜짝이야.
라이칸도 목소리가 높아지다 말고 스스로도 놀랐던 건지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
“하, 정말이지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군.”
“……침실로 안 가시길 잘하셨죠?”
“그 말이 하고 싶은가?”
“죄송해요.”
나는 얼른 항복 자세를 취했다.
사실 분위기가 더 요상해질까 싶어 좀 지나치게 장난을 친 감이 있었다.
“음, 라이칸 황자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어요. 제가 말하는 건……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에요.”
“근본이라니?”
“생각해보세요. 제가 갑자기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황녀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라이칸이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역시나 육아물의 오빠답게 여동생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진지해지는 모습이었다.
“……영애는, 모든 게 계획한 일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음, 따지고 보면 계획된 게 맞긴 하지. 내 계획이 아니라 이 정체도 알 수 없는 관리자, 요정이란 놈의 계획이라 그렇지.
“그거야말로 납득할 수 없는 거짓말이군.”
“왜요?”
라이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는 늘 내 여동생에게 진심을 다 했으니까. 가족조차도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하려던 말이 뭐였더라? 잠시 잊고 말았다.
날 향해 말하는 라이칸의 얼굴이 정말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가득한 저 얼굴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아니,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 맞는데……. 시작은 말이지.’
그래, 시작은 그랬다.
갈수록 래빗에게 진심이 되어 결국 원작을 유지하는 방법을 거부하고 그 아이가 자유롭게 사는 쪽을 택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을 뿐.
하지만 시작이 불순했다는 점은 인정했고, 이를 고백하면서 라이칸이 나를 탓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너무 착해 보이는데요?”
“그런가? 선함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만. 영애는 내 여동생이 좋아서 잘해준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죠.”
이 남자, 은근하게 핵심을 짚네. 괜히 머쓱하고 얼굴이 화끈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저 남자가 고맙다는 표정과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을 함께 지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시작이야 어찌 됐든…… 저는 래빗 황녀님을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해요.”
“그래, 시작이야 어찌 됐든 결국 결론은 영애는 내 여동생을 좋아하고 내 여동생인 유엘은 가족보다도 영애를 아끼고 사랑하지.”
라이칸이 작게 중얼거렸다.
“부러울 정도로 말이지…….”
순간 어느 쪽이 부러운 거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육아물 오빠에게 이 질문을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당연히 래빗을 더 좋아하겠지.
‘래빗이 가족보다 날 좋아하는 게 특이한 케이스지.’
라이칸 입장에서 아무리 날 좋아해도 아끼고 사랑하는 여동생만 하겠나.
“그래요. 그럼에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황녀님을 도와드리고자 했어요.”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라이칸이 누구의 지시를 받았냐, 배후가 누구냐, 수상한 자냐, 이렇게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황태자처럼 편집증적인 면모까진 아니어도 꽤 험악한 질문이 나올 거라 예견했지.
하지만 라이칸은 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고개를 들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혹시, 그대가 갑자기 북부로 가게 된 것도 그 ‘누군가’의 지시와 관련이 있는 건가?”
“네?”
어쩐지 푸른빛 도는 눈동자에서 보일 리 없는 고요한 불길이 보인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살짝 삼켰다.
“이상한 점을 따지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가장 이상한 것 중에 하나를 꼽자면 그토록 아끼던 내 여동생을 두고 갑자기 떠나버린 것.”
“…….”
라이칸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내 발끝을 덮었다.
왜일까 닿지도 않았건만 손끝이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대를 위해 몬스터를 잡으러 간 나를 두고, 훌쩍 떠나버렸지.”
라이칸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황녀의 유모씩이나 되는 자리를 가지고서도 훌쩍 떠나버린 것이 이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대가 북부로 가게 된 근본적인 사정에 그대의 사촌이 엮여있음은 알고 있다. 그 사정 자체에 이상한 점은 없었어. 대공이 갑작스러운 청혼을 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
“그럼에도 늘 석연치 않았지. 아니, 돌아왔을 때 그대가 황성에 없음을 깨닫고 난 많이 실망했었다. ……실망할 주제가 아니면서도.”
[당신을 위해 준비된 ‘서브남’입니다. 애정을 나눠주세요.]
라이칸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내 시선이 절로 그의 그림자에 고였다.
“그대의 석연치 않은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면, 그럼 지금도 같은 이유로 움직이는 건가?”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네.”
그의 그림자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슨 이유인지 물을 차례겠지만…… 나는 다른 것을 묻고 싶군.”
고개를 들면, 어느새 붉은 기운이 모두 기화되어 날아가고 지극히 냉정한 얼굴이 한 걸음 앞두고 서 있었다.
“만약 그대가 지금도 다른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 지시지? 그대가 갑자기 헤벤 공녀와 가까워진 것? 내 형님과 헤벤 공녀를 엮는데 일조한 것? 아니면…… 그, 세상에 초연한 대마법사를 옆에 두는 것?”
[빙의자님, ‘서브남’에게 애정을 나눠주세요! ⊂((・▽・))⊃]
요정의 창이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놈에게 현혹되는 대신 명료한 시선으로 라이칸을 향했다.
“모두요.”
이 남자는 내게 어떤 이유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배후는 누구인지 왜 묻지 않는 걸까. 그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갈피가 잡혔다.
“그래서 황자님이 한동안 제 옆에 있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그러자 라이칸의 깊고 푸른 눈이 크게 진동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뭐?”
“저는 라이칸 황자님을 존경하고 좋아해요. 그렇기에 제게 진심을 다해 주신 황자님을 기만하고 싶지 않아요.”
감정을 가지고 장난질 당하는 건 나로 충분하다.
내 마음은 내 것이다. 분명 그러하지만 나는 생존 앞에서 이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서브남에게 애정을 나누라고?’
하지만 라이칸마저 이런 거짓 놀음에 끼우고 싶진 않았다.
‘그딴 결정, 내가 거절해. 닥치라고 해.’
“저는 라이칸 황자님의 마음에 진심으로 답을 드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 대답은 내가 원할 때 주기로 하지 않았나.”
“네. 근데 이대로는 죄송할 짓만 저지를 것 같아서요.”
난 잠시 창문을 응시했다.
저 밖 어딘가에 있을 대마법사님을 생각했다. 사실 그 사람이라고 이 거대한 운명에 주인공으로 간택되고 싶었을까.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멍해진 것 같았다.
“황자님 사실 저도… 사랑이란 게 뭔지 참 한 번쯤은 꼭 느끼고 싶었는데…… 어려운가 봐요.”
그 순간 뺨에 무언가 닿았다.
시선을 돌리자 무엇 때문인지 매우 당혹스럽고 놀란듯한 라이칸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러지?
마치 내가 쓰러졌을 때 보이던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 그대가…… 그, 순간 우는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