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0)
……뭐?
이 순간에 보여선 안 될 메시지를 본 것 같다.
나는 이 순간 떠오른 요정의 창을 외면하려 했지만, 요정은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글씨를 진하게 해서 다시 떠올랐다.
으윽, 봤어, 봤어. 봤다고!
‘왜 하필 지금 이 때에?’
나는 표정에 티를 내지 않으며 발데르의 안색을 살폈다.
수없이 많은 시선이 몰린 작금의 자리. 사소한 하나의 실수가 퀘스트를 망칠지도 모른다.
지금 이 퀘스트는 절호의 기회였다. 언제까지 길어질지 모를 이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단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기회.
찰나의 시간이지만 발데르와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겉보기에 발데르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변화가 없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집착 지수다. 그것도 평범한 숫자도 아니고 한계치에 이른 100.
과연 요정이 아무것도 아닌 수치를 내게 보여줬을까?
발데르는 약속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나는 이 남자를 믿을 수 있나?
현재, 깜빡이는 눈꺼풀조차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상황.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고, 내 결심은 빠르게 이어졌다.
내 표정에 무엇이 떠올랐던 걸까. 나를 보던 발데르의 표정 위로 그린듯한 보드라운 미소가 떠올랐다.
“보여줄게요. 달링.”
솜사탕처럼 달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보이지는 않는 시선.
그는 내가 한순간 주춤했다가 그를 믿기로 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눈치가 빠른 대마법사였으니까.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겠네.”
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아마 바로 옆에 있던 나만이 들었을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지기 무섭게,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달칵.
그 순간 이 연회장의 모든 불이 꺼졌다.
“헉, 뭐, 뭐야.”
“고장인가?”
“시종! 시종 어딨나! 당장 불을 켜!”
술렁거림 속에서 나는 홀로 차분했다.
이 모든 게 우리의 극본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까지 차분했던 건 아니었다.
‘……미리 약속한 것 중엔 불을 끄는 것까지는 없었는데?’
설마하니, 정말 집착 수치가 영향을 미친 건가 싶어 약간의 불안이 싹을 틔울 때였다.
누군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뿌리치려다 말고 익숙한 손의 감촉인 걸 알고 그대로 멈칫했다.
그 손이 나를 붙잡은 그대로 다가왔다.
낮은 숨결이 섞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나라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발데르?”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래전에 죽은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사내란 결국 짐승에 불과해…… 승리하고 쟁취하는 것에 커다란 쾌감을 느끼며.”
“…….”
“그보다도 큰 쾌감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진실된 눈으로 나를 보는 것에서 오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 때문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오직 유일하게 빛을 품은 것은 그의 말간 눈동자뿐이었다.
나는 깜깜해진 세상에서 태초의 빛을 찾은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우리가 붙잡은 손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에 집중하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당신을 보던 어느 날에 그런 기분을 느낀 적 있어요.”
그에게 붙잡힌 손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그대로 그쳤다.
“왜 당신이 무심코 나를 보는 순간, 내 세상에 새로 태양이 뜬 기분이 들었을까.”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발데르의 등 뒤, 아니 그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창문에서 노랗게 터져 나오는 빛을 보았다.
마치 새로 태양이 뜨는 것처럼 예쁘고 밝은 황금빛이었다.
“해? 해가 뜬 건가?”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틈에서 발데르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좋아.”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 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100/100]
경고하듯이 떠오른 푸르른 창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파지직, 피어오른 주황빛 빛이 창을 지워버린다.
치지직-. 희미해지는 푸른 창 너머로 나는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대마법사를 마주했다.
숨이 절로 꿀꺽 넘어간다.
“당신이 가진 마음이 설사 진심이 아닐지라도.”
“…….”
“갖고 싶다고 느꼈으니.”
어느새 새로운 태양은 마치 해가 지기라도 하듯 서서히 작아졌다.
석양이 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그 누구도 불을 찾지 않았으며 넋을 놓고 인위적으로 펼쳐진 창문 너머 풍경을 보기 바빴다.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가 펼치는 마법은 이토록 웅장했고.
이 모든 것이 그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아.”
나를 향한 눈동자가 ‘네 두려움을 알아, 하지만 이것만은 들어줘.’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느꼈을 내 손을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잡을 수 없다면, 당신이 나를 가져줘. 응?”
그 순간 모든 기적이 끝을 맺었고, 모든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았던 꿈결 같은 풍경에 여전히 푹 빠져든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 마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혼을 빼놓아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속으로 숨이 절로 넘어간다.
발데르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전 마치 다른 사람인 듯 낯선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퍽 순종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조금 전 계단 앞에서 나를 에스코트할 때처럼.
“방금 뭐였소?”
“마법, 마법 아니겠어?”
“마법이라면…….”
환상 같았던 풍경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 상황을 깨닫고 다시금 시선이 몰렸다.
발데르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올라간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어때, 재밌었어?”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듣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파도처럼 몰려드는 시선을 느꼈다.
이상하지. 분명 이것 또한 극본의 일부였다.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 나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기로 했고 발데르에게 마법을 부탁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마법을.
발데르는 약조대로 해주었고, 그 다음은…….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인데.’
부채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무언가 하나가 어긋난 기분이 들지만 지금은 상황에 집중하자.
“……나쁘지 않네요.”
“아직 존댓말을 붙일 만큼 부족했던 걸로 들리는데, 맞을까요?”
“글쎄요?”
내가 일부러 짓궂게 웃는 척 슬쩍 뒤로 물러나려 하자, 그보다 먼저 발데르가 살포시 내 손을 붙잡았다.
“이건 어떨까요.”
곧 손등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좋아합니다, 달린 에스테 영애.”
그래, 여기까지는 우리가 합의한 선이었다. 정해진 극본이었단 얘기다.
그런데.
“나와 결혼해주세요.”
……그 다음은 금시초문이었다!
뭐? 뭐라고요?
이 인간이 줄곧 애드리브를 치더라니, 여기까지 와서 애드립이야? 이건 애드립도 아니었다. 개드립이지!
나는 간신히 당황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찡그리는 것에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만 이러했지, 주변에 지켜보던 이들은 달랐을 것이다.
‘결혼 얘기는 협의 사항에 없었잖아! 없었잖아! 이 인간아!’
속으로 욕을 해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발데르가 청혼을 입에 담는 그 순간 주변이 거세게 술렁거렸으니까.
“지, 지금 들었나?”
“대마법사님이……!”
“꺄아! 낭만적이야!”
환상적인 마법을 본 뒤라서일까, 이곳의 고상한 귀족들은 조금 전보다 격식을 벗은 채 날것에 가까운 관심과 환호를 드러냈다.
이게 만약 티비 프로그램이거나 드라마였다면? 시청률이 배로 뛰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주인공이 나라는 엿 같은 사실이지.
“나로는 부족할까요?”
나는 속으로 너 나중에 두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달린. 아직 시간은 남았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솔직히 분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어그로를 생각하지 못하겠다. 이 남자의 어그로 방식이 워낙 환상적인 수준이었던지라 화조차 나지 않았다.
“난 결혼 생각 없는데?”
내 삐딱한 대답에 누군가 숨을 삼켰다.
……하극상! 누군가 소리쳤다.
그래요, 다들 멋대로 소리쳐라. 시청자가 되라고. 젠장.
“괜찮아요, 내가 많아요. 달링.”
“언제부터 결혼이 한쪽 의사만으로 가능했지?”
“뭐가 필요해요? 세상? 왕좌? 가장 귀한 보물?”
……대마법사님. 거 발언이 너무 아슬아슬한 거 아니오?
드라마는 자극적일수록 시선을 끄는 법이라 했던가.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뾰족하게 돌아갔다. 아마도 황실에 지극히 충성하는 자들의 시선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선을 여전히 떼지 못하는 건 이 상황이 재밌어서겠지. 내 일만 아니었다면 나도 아까 래빗 옆에서 팝콘이나 먹고 있었을 일이었다.
내 일만 아니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해요?”
“그런 건 없는데?”
“아, 아니면…… 운명을 바꿔줄까요?”
그 순간 그와 내 시선이 교차했다.
이건 그저 연기가 아니었다. 아니, 이 대사만큼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