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1)
운명,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지금도 일정하게 나타나는 요정의 창, 나는 눈썹을 까딱 추켜올리며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필요 없다, 이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원하는 대로 나왔다.
인정해야 했다. 이 남자는 타고난 연기자였다.
아니, 연기인지 진심인지 몰라도 연기라고 생각하는 쪽이 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 생각하자.
“아, 미안해요. 달린.”
“뭐?”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던 발데르가 돌연 사과했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 그대로 얼굴에 내비쳤다.
“난 상식이 조금 부족해서……. 생각해보니, 친구가 그랬던 것 같아요. 청혼 전에 이 말부터 해야 했는데.”
발데르가 빙긋 미소했다.
“사랑합니다.”
쿵. 내려 앉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내려앉은 소리다.
이건 내 진심이 아니다.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렇다고 마구 뛰기 시작한 심장을 가라앉히기는 어려워 보였다.
……쉽게 가려고 이 남자를 이용하려 했던 내 잘못인가.
이건 자업자득이야? 나는 숫제 원망까지 할 것 같아 혀만 꾹꾹 깨물었다.
자칫하다간 내 원래 말투가 흘러나올 것 같아. 아니, 욕이 나올지도 몰라.
‘이럴 거면 극본이란 걸 왜 정했겠냐고!’
사실 지금 온몸이 화끈해져서 등을 덮은 퍼로 된 숄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덕분에 발데르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손을 매몰차게 걷어낼 수 있었다.
“싫은데요?”
내 얼굴로 즐겁다는 듯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와, 짧게 예행 연습을 할 땐 분명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헉, 제가 어떻게 발데르 당신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죠……?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 염려는 무슨.
아주 시원하게 잘만 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안쪽에서 미리 협의한 건 청혼이 아니라 그저 고백이었다.
내게 연인이 되어달라는 고백! 나는 이를 거절할 예정이었다.
눈이 마주친 발데르의 눈이 간드러지게 휘었다.
안쪽에서 그윽하게 가라앉은 눈이 마치 나를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연기였는가.
나는 처음으로 공녀 언니에게 궁금해졌다.
……혹시 언니, 황태자와 연인 연기를 하면서 나랑 비슷한 생각하신 적 있으신가요?
공녀 언니가 돌아오면 꼭 물어볼 거다, 이리 결심하며 부채를 입술로 가져다 댔다.
“흐응, 발데르. 당신 얼굴은 마음에 들지만…… 이런 청혼은 너무 별론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았다.
구경하기 바쁜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잠시 날 피해 눈을 돌리면서도 다시 내게로 시선을 향했다.
발데르가 한걸음 다가왔다.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만으로 발데르의 걸음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것처럼 보였다.
다시 다가오는 발데르의 모습, 기이한 빛이 도는 눈동자로 형언할 수 없이 깊은 감정이 일렁거렸다.
내가 무어라 다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만.”
누군가 나와 발데르 사이로 끼어들었다.
커다란 등을 본 순간 내가 느낀 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안도감?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늘 내게 만은 한없이 유순하게 풀어지던 목소리가 지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사람들은 새로운 주인공의 등장에 더욱 눈을 빛내기 바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저분께서도 악녀 ‘달린 에스테’의 소문 속 주인공 중 하나인, 북부 대공님이니까.
나는 휴고를 보며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등장 타이밍 죽이시네.’
사실 우리가 약속한 휴고의 등장은 지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게 뭐람. 이미 저 멀리 앞서나간 저 대마법사님의 애드리브 덕분에 모든 것이 어그러진 상황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건데.’
사람들에게 로맨스와 막장 스릴을 주기 위해 기획했던 이 상황이, 이제는 나에게도 스릴러가 되었다니. 이 얼마나 환장하는 막장 상황인지!
어쨌거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뒷모습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이곳이 공개 청혼장이 된 것인지 모를 일이군.”
눈이 마주치자 휴고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태연하게 그 손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고양이처럼 사뿐히.
“내 전 약혼자께서 아주 성가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내게 찌를 듯이 고정된 시선들을 모르는 척 입술에 부채를 가져다 댔다.
한편 속으로는 신기해하고 있었다. 휴고가 이처럼 멀쩡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음, 아니다. 북부 대공으로서 제 역할은 잘하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연기는 아니겠지?
‘처음 이 극본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휴고를 깽판치는 역할로 넣어도 될까 고민했었는데…….’
내 앞에서 숫기 없고 숙맥 같던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일까.
한 사람의 남성, 북부 대공으로서 서 있는 모습이 낯설긴 했다.
……내가 그의 울먹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래.
나를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흐음, 오늘 이 자리에 달린과 함께 온 건 난데?”
발데르가 부드러운 얼굴에서 미소를 차차 지워냈다. 이젠 저게 진짜인지 연기인지 슬슬 구분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정중하게 받아칠 것만 같던 휴고의 자세가 느슨하게 풀리더니 삐딱해졌다.
“그런가? 난 내 전 약혼자에게 집적거리지 말라고 온 건데?”
……휴고가, 삐딱?
나는 마치 누구에게나 공손해진 래빗을 보기라도 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을뻔했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우리 북부 대공님, 눈물이 많아서 그렇지, 삐딱, 탈선이랑은 어울리지 않았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서야 저 모습은 삐딱이 아니라 날 것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판단했다.
그래, 휴고……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땅에서 군림하는 사람이었지?
발데르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련이 철철 남은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네.”
“상관없어. 내 전 약혼자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놀아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나는 발데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비꼬는 목소리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휴고의 대사 선택에 더 놀랐다.
저기요, 휴고? 대공님? 선생님까지 정해진 대사를 집어치우면 어떡해요……?
‘……내 퀘스트 이대로 망하는 건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나를 살아남게 해준 임기응변 감각이 내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저기요, 휴고. 당신 이렇게까지 불쌍한 사람이 되진 않기로 했잖아요.’
가지고 놀다니. 아니, 역할 상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입을 가리며 애써 굳어질 뻔한 입술을 가렸다.
“재밌어라.”
역할에 충실하게 눈을 휘면서도 속으로는 대체 이 다음 상황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몰라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차라리 목숨 걸고 싸우게 해주세요…….
그냥 스킬 쓰고 몬스터랑 전투하게 해주세요…….
세상에, 나랑 래빗을 세뇌 시키려 들던 나쁜 신관 놈들이나 대공님을 위해서라는 개소릴하며 나를 죽이려 들던 북부의 나쁜 놈들이랑 싸우는 게 더 편하다고 느끼는 때가 오다니!
나는 숨을 삼켰다.
이 긴장은 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 남자들의 생각과 감정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이건 이 남자들의 무력과 직위와 권한을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막말로 휴고가 검 빼 들고 발데르가 지팡이라도 빼 들었다간 이 퀘스트도 망하고 이 자리도 폭망하는 거다!
파멸 엔딩에 가까운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동안 내 손이 들렸다. 휴고가 말간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줄곧 차갑던 시선이 나를 보는 순간 녹아내린다. 익숙한 시선에 긴장이 풀렸다.
동시에 휴고의 눈동자에 내가 알던 애정이 깃드는 동시에 눈 밑이 여름볕 같이 붉은색이 발그레 고였다.
“……내가 실례했나요?”
……이미 극본은 파괴해두고 이렇게 불쌍한 척하는 건 반칙이죠.
“보고 싶었어요. 달린. 나를 여기 불러주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휴고는 멋대로 군 건 처음뿐이라는 듯 약속한 대사를 읊었다.
다만, 내 손을 잡아 입술을 살짝 누르는 약속되지 않은 행동을 함께 했지만.
휴고의 말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달린 에스테가 이 자리에 북부 대공을 직접 불렀다는 것.
“당신이 나를 부르자마자 얼른 달려왔어요. 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불러주길 말이에요.”
휴고가 예쁘게 웃자,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 홀로 북부에서 보던 이 얼굴은…… 가히 파괴적이었으니까.
휴고를 본 뭇 여성들의 감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가 되어도 좋으니 언제든 날 불러달라 내가 말했었지요.”
“그랬나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모르는 척 감흥 없는 얼굴로 입꼬리만 삐죽 올렸다.
속으로는 예정한 궤도로 돌아온 휴고에게 칭찬이라도 마구 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