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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3화 (223/281)

◈22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2)

“어리석네요, 대공님.”

나는 장난이라도 치듯 그에게서 내 손을 가져와 톡 그의 턱을 두드렸다.

휴고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내 손을 살짝 잡더니 고개를 기울여 맑게 웃었다.

“당신 앞에서는 얼마든지 더 어리석어질 수 있죠.”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살짝 숙여 내게 말했다.

속삭일 것처럼 고개를 숙였지만 목소리만은 낮추지 않은 채로.

“북부가 필요하면, 지금도 말해요.”

“…….”

……요정님 살려주세요.

나는 급기야 다시는 아쉬울 때 찾지 않기로 결심한 요정놈마저 찾고야 말았다.

조금 전 발데르의 힘에 억지로 사라져서인지 이쯤 되면 슬쩍 약을 올릴법한 요정의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왜, 이 눈에도 진심이 어려 있는가.

처음부터 내 필요에 의해 이 남자들을 이용하려 했던 벌을 받는 걸까?

‘흡, 도와…… 도와준다며 이 사람들아!’

구경꾼들의 반응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진 않지만, 시선이 더욱 따가워진 걸로 봐서는, 지금 우릴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다간 3D안경을 쓰고 4D체험 중인 관객의 환영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 아주 맛집이네 맛집.’

막장 맛집 말이다.

문제는, 이 막장이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거다.

“……달린, 내 사정으로 당신과 어쩔 수 없이 파혼하게 되었지만, 북부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다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운 발데르 탓이었다. 그래, 발데르가 아니라 발데르 놈이라 부르자.

“앞으로도 내 반려는 당신뿐이라 생각해요.”

쟤가 냅다 청혼부터 던지니까 이쪽도 예정에도 없던 청혼을 던지잖아!

발데르와 계단을 나설 때만 해도 분명 첫 단추가 아주 훌륭하다고 기뻐했건만.

그때의 나는 어리석었던 거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던 바보였던 거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괜찮지만…… 저 남자가 첫 번째인 건 안 돼요, 달린. 부탁이에요.”

이로 모자라 휴고는 착실하게 정해진 대사까지 잘도 섞어 주었다.

발데르가 수작을 보이는 동안 결혼식에서 ‘잠깐 이 결혼 반대야!’ 하고 나서는 민폐 전남친처럼 첫 번째 난입을 맡은 게 바로 휴고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 계획엔 발데르를 향한 질투를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진심을 가득 담아 살벌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는데.’

나는 휴고의 손을 잡아당겼다.

“설마, 살기라도 내뿜을 건 아니시죠?”

“……아니에요.”

휴고가 얼른 기를 갈무리하며 온순하게 대답했다.

그럼 뭐하나, 예민한 사람들은 이미 휴고에서 막 터져 나가려 하던 폭발적인 기운을 느꼈을 터였다.

‘……오늘이 지나면 나 연애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하겠지?’

응, 못할 것 같은데. 이미 여기까지 만으로 내 사교계 평판은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각오하고 퀘스트에 임한 거긴 한데. 펼쳐진 상황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시간은 정말 잘 흘렀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이미 상황이 내가 예정했던 지점은커녕 아예 멀리 떠나버렸기에 얼마나 이어질지,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른다는 점.

지금쯤 공녀 언니가 얼른 볼일을 보고 돌아오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무엇보다 문제는…… 지금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휴고의 모습이었다.

“흐음? 대공님 설마 지금 제게서 대답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안 될까요?”

아마 시무룩해하는 휴고의 모습을 보고서 많은 사람이 숨을 삼켰을 거다.

북부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대공으로서 휴고의 소문만 들었던 사람은 이런 모습을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나조차도 처음 이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전 결혼 생각이 없어요. 발데르에게 대답하는 것을 대공님께서도 보셨을 텐데.”

“…….”

“아니면 혹시 대공님께서 말씀하시면 다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오, 나도 모르게 조금 삐딱하게 말이 나갔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약속한 건 분명 연인이 되어달라는 고백까지였을 텐데.

왜 다들 눈이 돌아가서는 청혼을 해서는 이 모든 상황을 말아먹은 것인가.

이럴 거면 도와달라고 할 때 흔쾌히 알겠다고 하질 말던가!

억울한 심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나. 자업자득이었다.

“알았어요, 달링. 더는 결혼하자고 보채지 않을 테니 이제 나랑 놀아주면 안 되나?”

“함부로 손 뻗지 마라.”

나는 다시금 발데르를 막아서는 휴고의 등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서 아주 훌륭하게 관심을 이끄는 것은 물론이요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되었다.

문제는 휴고가 맡은 역할이었다.

그의 역할은 첫 번째로 난입하는 역할.

그렇다면 뭐다? 두 번째 난입을 맡은 사람도 있었으며.

내가 속으로 끙 숨을 참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을 때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등 뒤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극본에는 마지막 등장인물이 있으니.

“개판이군.”

날카롭고 까칠한 목소리가 어째 구원의 목소리이자, 또 다른 서막을 알리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라이칸이 나타나기 무섭게 모든 이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휴고와 발데르도 예외는 아닌지라 각자의 개성에 맞게 예의를 차렸다.

어떡하죠, 라이칸 황자님?

댁이 등장하기도 전에 저 두 사람이 훌륭하게 어그로를 끌다 못해 상황을 찜 쪄 먹어버렸는데요.

라이칸만 알아볼 수 있을 그런 시선을 보냈더니, 라이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이 사람은 기본 표정이 늘 까칠하고 서늘한, 지금 딱 이런 표정이라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지금 만큼은 미세한 변화가 아주 잘 보였다.

“이래서야 영애, 그대가 즐길 수야 있겠나?”

약속된 대사였다.

오, 이 남자만은 홀로 극본대로 진행해 주려 하는 건가? 반가운 마음에 절로 나긋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잘한다, 라이칸. 당신만은 내 동아줄이 되어줄 거지? 믿는다……!

“흐응, 어쩐 일이세요. 2황자 전하?”

나는 툭 가벼이 그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라이칸의 어깨가 굳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대사대로 하냐마냐가 문제가 아니었지?

내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걱정했던 점이 한가지 있었다.

과연 휴고와 라이칸이 제대로 연기가 가능할까였다.

라이칸은 휴고에 대해 걱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대사를 말할 수 있느냐였는데.

정작 함께 걱정했던 휴고는 아주 훌륭하다 못해 진심까지 가득 담아서 연기를 잘만 해주었지만.

‘붉어졌네.’

이미 잔뜩 귀가 붉어진 라이칸은 앞으로 계획대로 대사가 가능할까 싶은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초대는 했지만 설마 오시리라곤 생각 안 했는데.”

그런데 이상하지.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불쑥 짓궂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래서 나는 라이칸이 다음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내가 먼저 예정된 대사를 꺼내버렸다.

“역시 황자님도 제가 좋으신가 봐요?”

펑, 실제로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만약 소리가 날 수 있으면 분명 이런 소리가 났을 것 같았다. 라이칸의 목이 새빨개졌으니까. 그나마 뒤에서 보았을 땐 옷깃과 머리에 가려져서 다행일까?

하지만 내 눈엔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이 남자 알수록 참 은근히 놀리고 싶어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니까.’

라이칸의 역할은 중요했다.

앞서 두 사람이 깽판을 놓은 상황에 참전하는 동시에 슬슬 수습하고 정리하는 역할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라이칸이 낯뜨거운 말은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이런 역할을 부탁했던 건데.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라이칸의 푸른 빛을 담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저기요, 황자님? 지금 아직 저기서 기싸움 하는 대공님이랑 대마법사님 보이죠?

당신까지 정신줄 놓으면 안 돼!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라이칸에게 크나큰 걸 바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 두 사람이 예정보다 지나치게 잘하다 못해 애드리브까지 자연스럽게 멋대로 마구 넣어버렸다면.

라이칸은 흔들리는 두 눈 그대로, 연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은 얼굴로.

“……내 청혼은 황, 황실을 통해서 하면 되겠나?”

하고 폭탄을 터트려버렸다.

……망했다. 수습은커녕 당신이 같이 폭탄을 터트리면 어떡해요?

분명 여기서 이 제국과 황실의 권위를 일깨워주며 대공도 대마법사도 그만하라고 해줘야 할 남자가!

물론 본인도 소문의 주인공으로서 내가 치대면 거기엔 순순히 받아주면서도 상황은 수습해야 할 남자가!

이 말도 안 되는 애드리브에 참전해버렸다.

나는 믿었던 너마저……. 하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라이칸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야 그저 감흥 없는 눈으로 보일 표정이었을 거였다.

‘나 혼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정말 다행인 건 이 긴 시간 동안 내가 무사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훌륭하게 이끌었을뿐더러 이 자리에 주인공이 되었다는 거지만.

문제는 퇴로가 차단됐다. 이 무대에서 내려갈 길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속으로 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나를 향하는 이 시선들. 나를 향해 보내는 호기심 속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누굴 선택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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