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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6화 (236/281)

◈236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

“……넌 뭐냐니. 나 너무 충격받았어.”

웃는 입꼬리가 떨렸다. 일부러 만들어낸 떨림이었다.

사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충격이 아니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리제는 눈을 떴을 때, 나를 안심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이 아이를 진짜 친구로 받아들였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였다.

너랑 함께 있으면 나도 평범하게 웃고 평화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숨만 쉬어도 병약해지는 이 몸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퀘스트도 잠시 잊을 수 있었는데.

“……내가 달린 에스테가 아니면 누군데?”

나는 전생의 내 이름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발데르를 보내고서 안 사실이다.

이 또한 요정의 안배이지 않을까 싶었다. 달린의 삶에 집중해서 최대한 빠르게 이 퀘스트를 해결하게 만드는 것.

그럼에도 나는 나였다. 내가 달린 에스테임을 받아들인 나.

“……서글픈 기분이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리제, 넌 네 이름 ‘리델라제’를 밝혔지만. 난 리제가 좋으니까 이렇게 부를게.

난 너를 친구로 생각했어.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넌 내게 항상 다정했으니까.”

나는 손을 겹쳐 쥐고 머뭇거렸다.

리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정체를 드러낸 리제에게는 미세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네가 한 이야기도 너무 충격적이야.”

나는 처음 내 얘기를 꺼냈을 때, 래빗이 보인 반응을 기억한다.

래빗은 나를 안타까워했다. 신의 계시를 받아 어떻게든 그 계시를 성공시켜야만 하는 사람.

래빗은 물었다. 거기에 네 삶은 있는 거냐고.

그러게.

나는 이 순간 리제에게 묻고 싶었다.

네가 억지로 지나온 회귀들 중에 네 삶은 있었을까?

“……그동안 힘든 일을 홀로 견딘 거야?”

“…….”

그 순간 리제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금방 사라졌지만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너도 나와 같았겠지?

나는 억지로 이 세계에 끌려왔고, 눈을 떴을 때 이 몸이었어.

네가 아마도 네 의지로 무한 회귀를 시작하지 않은 것처럼 나 또한 내 의지가 아닌 시작이었어. 그렇게 달린으로 살게 된 거야.

“……네가, 진짜 달린이라고? 거짓말하지마. 그 애는? 그 애는 어디로 간 건데?”

그 애는……, 죽은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미안해. 진실을 전해 주지 못해서.

“내가 달린이야, 리제.”

이 세상에, 내가 아닌 달린은 더는 없어.

“하지만…… 네게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눈을 뜬 뒤 나는 이상한 일들만 벌이거나, 또 겪었으니까.”

리제의 얼굴 위로 긍정이 스쳤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거의 죽음 가까이 이르렀다가 눈을 떴을 때, 신의 계시를 받았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래빗에게, 휴고에게 말했던 선까지였다.

“신이 내린 계시를 받아서 그것들을 해결해야만 했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니면 죽으니까.”

리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불신이 스쳤다.

“……신이, 존재한다고? 웃기지 마.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어. 존재했다면!”

자신이 무한 회귀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무능한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확실히…… 나는 신에 가까운 존재를 만나긴 했지.’

요정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존재를 말이다.

그들은 전능하지 않았다. 나라는 도구를 이용해 자기 세계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게……. 나도 늘 생각해. 신이 얼마나 무능하면, 겨우 나같이 연약한 사람을 데리고 이런저런 계시를 내리는 걸까. 왜, 나는 항상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건가.”

“…….”

“……그런데 리제 너도 나랑 비슷한, 아니. 더욱 힘든 일을 겪고 있었구나.”

좀 더 빠르게 알았다면 좋았을걸. 내가 무심했다. 나는 반성했다.

사실 지나간 시간 중에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리제의 이상함을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메인 퀘스트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에만 미쳐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시간들을 반성한다.

지금까지 이 몸에서 단 한 번도 달린의 흔적을 느낀 적 없다. 그리고 눈을 뜨면서 본능적으로 느꼈지만, 이 몸의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러한 진실을 내 친구 리제에게 알릴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 순간이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주어진 ‘특별 보상’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메시지였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의 보상? 그게 뭔데?

메인 퀘스트를 깨고 나면 여러 보상을 주긴 했다. 첫 번째에도 두 번째에도.

……그러고 보니 세 번째의 보상이 적힌 요정의 창을 본 적이 있던가?

발데르를 보낸 후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요정이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시 한번 창이 떠올랐다.

[보상이 공개됩니다. 요정은 이걸 꼭 이용해야 한다고 외쳐요!]

이와 동시에 눈 앞으로 새하얀 빛이 터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다락방? 낡은 방이었다. 천천히 돌아보던 나는 익숙한 문양을 발견했다.

저건…… 트리샤 후작가의 문양인데?

곧 이불 위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놀랍게도 리제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본 모습.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회귀했어? 왜? 왜? 정말…… 그 남자가 말한 대로인가?

리제가 마구 중얼거렸다.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3회차 시간입니다]

요정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마치,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휴고와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던 때와 비슷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가상의 공간이고, 지금 이건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 같지만.

-가, 가야 해!

벌떡 일어난 리제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익숙한 에스테 백작가, 그리고 익숙한 방이었다.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리제를 반겨주었다.

-리제!

-……달린.

리제는 ‘달린’의 앞에서 무너져 엉엉 울었다. ‘달린’은 아무것도 모른 채 리제를 달래 주었다.

그 후 리제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삶은 반복되었다.

공간이 바뀌며 나는 내 방에 서 있었다. 내 옆에는 놀랍게도 ‘달린’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웃는 얼굴도 신난 얼굴도 나와 똑같았다. 물론 같은 몸이기에 얼굴이 같은 건 당연하지만, 비단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달린!

리제가 나타나면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얼굴. 기분, 미묘한 버릇들. 신기할 정도로 세세한 것들이 나와 닮아있었다.

-리제! 어서 와, 오늘도 좋은 오후야.

병약하고 죽어가는 시한부. 그럼에도 ‘달린’은 긍정적이었다. 몇 번이고 회귀하는 리제를 반갑게 맞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흘끗 위쪽을 바라보았다. 시야 끝에 대롱 매달려 있는 창.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13회차 시간입니다.]

‘달린’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리제를 반갑게 맞이했다. 때로는 상태가 좋지 않아 누워서 맞이하는 회차도 있었다. 그럼에도 미소는 변함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아픈 것이 분명한데, 연약한 것이 분명한데. ‘달린’은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나오게 하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에 비해, 리제는 차차 눈이 죽어갔다.

15회차, 18회차, 33회차…….

회차가 지나갈 수록 정신이 죽어가는 리제가 보였다. 리제의 얼굴에는 감정이 사라지고 분노와 증오가 스몄다.

-……왜, 왜야? 왜, 나야?

-리제?

-왜, 나일까? 왜, 날까? 달린? 응? 왜 내가 그 남자의 마음에 들어서……. 왜? 대체 왜!

-리제!

정신이 망가져 가던 리제는 ‘달린’을 붙잡고 원망을 쏟기도 했다.

그러면 ‘달린’은 영문도 모르고 함께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리제를 위로했다.

그럼 리제의 얼굴에는 과거보다 더한 괴로움이 떠올랐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네게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돌아와도, 항상 그대로인 건 너뿐이야. 달린. 너랑 파올로뿐이야…….

-응. 리제. 나는 늘 여기 있을게. 친구잖아.

‘달린’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구를 정성껏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달린’은 리제의 모든 회차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늘 리제의 끝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리제는 수없이 많은 ‘달린’의 묘지를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반복되고 또 반복을 지나.

-……너만은 잃고 싶지 않아. 제발.

리제가 ‘달린’의 침대에 엎드린 모습이 보였다.

이번 회차는 이상하게도 ‘달린’의 숨이 굉장히 가빠 보였다. 리제가 찾아올 때부터 ‘달린’의 상태가 매우 나빴다.

-제발, 제발. 그만 죽어줘. 너무, 너무 힘들어. 왜, 이번엔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제발……. 죽지 마.

애석하게도 ‘달린’은 말할 힘조차 없어 보였다. 간절한 눈으로 리제를 볼 뿐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지만 언어가 되지 못했다. ‘달린’의 관자놀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번 회차의 ‘달린’의 죽음이었다.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회차는 빙의자님이 나타나기 직전의 마지막 회차입니다.]

눈 앞의 리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울부짖는 모습인데, 이상했다. 엉엉 우는 것보다도 더욱 서럽고 서러워 보였다.

저 두 사람의 모습이 차차 멀어졌다.

나는 눈을 감은 ‘달린’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울부짖는 리제의 모습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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