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5)
왜 내가 만난 주인공들은 이다지도 슬픈 인생들일까.
비틀어진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느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다.
리제, 네가 무한한 회귀를 하면서도 연어가 고향을 찾듯이 애타게 찾던 네 친구는 너로 인해 동반 회귀를 겪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대.
나는 네 친구가 너를 구하기 위해 데려온 사람이야.
너는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다섯 번째 인물이 추가됩니다!
기능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의 영향으로 제한되던 정보가 모두 공개됩니다!
-다섯 번째 인물 ‘리델라제’
-인물의 역할: 주인공 달린의 진정한 친구
-칭호: 거대 상단의 비밀 주인(노말), 황금을 보는 눈(유니크), 노력이 극의에 다다른 자(유니크), 무한 회귀자(레전드리) 오염의 대항마(레전드리), 결(結)을 가진 자(-)
-달린을 향한 호감도: 100(+α) /100 ※단, 호감도가 불신도로 변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듯 지금까지 곳곳이 흐려져 있던 정보창들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정말 어디 아픈 거야? 집에 데려다줘?”
아마도 너는 1회차보다는 더 퉁명스럽고 피로하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체념과 증오 가득한 회귀자가 되었지만, 친구를 향한 애정 하나만은 변함없이 여전하겠지?
나는 그런 네가 참 안쓰럽다.
“아니, 아프지 않아.”
나는 웃었다.
‘달린’은 이제야 보게 된 사람이지만 싫지 않았다.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된 진실을 알았음에도 너도 ‘달린’도 미워하기엔 참으로 안쓰러운 사람이었고, 응원하고 싶어졌으니까.
[나만의 로판 기능이 최종 퀘스트와 연계됩니다!]
[최종 퀘스트 ‘용사님! 이 세상을 구해주세요!’
마침내 최종장에 다다른 당신! 실로 대단합니다.
육아물, 계약결혼, 빙의물 그리고 회귀물.
모든 역경과 위기를 버티고 극복한 당신은 이제 어엿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영웅이 된 당신은 동료가 된 이들을 데리고서 ‘세계의 오류’를 물리쳐주세요.
실패하면 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이 엉망이 되고 멸망합니다.
내용: 세계의 오류 제거
실패 시: 사망, 세계 삭제
보상: -]
모든 메인 퀘스트를 끝낸 끝에 또 한 번의 퀘스트가 나타났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최종장.
내가 생각해도 그 단어에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요정은 ‘나만의 로판 기능’을 적극 활용해 달라고 조언해요!]
나는 요정의 창을 무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달린’은 리제를 구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고, 리제를 구하려면 세계의 오류를 저지해야 했고.
세계의 오류를 저지하려면 우선은 세계의 오류가 이미 건드린 이야기들을 수습해야 했던 거군.
내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일이 헛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어서 기쁘고 약간 뿌듯하기는 한데, 모든 원흉이 요정 저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요정이 썩 좋아지지는 않았다.
‘달린의 소원은 요정의 니즈와 잘 맞아 떨어졌어.’
요정 또한 제 세계에서 깽판치는 ‘세계의 오류’가 못마땅하던 상황에 ‘달린’이 적절한 소원을 빌어서 그녀를 이용했다는 생각이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리제.”
나는 성큼 걸음을 옮겨 리제를 꽉 껴안았다.
리제는 흠칫 떨면서도 나를 떨쳐내지는 않았다.
“행복해져.”
“……뭐야, 갑자기.”
나는 리제를 놓아준 뒤, 손을 꽉 잡았다.
“이번 회차가 마지막이 될 거야. 아니,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줄게.”
“…….”
리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려면 이번엔 꼭 그놈을 제거해야 해.”
내 말이 이어질수록 리제의 표정은 차차 풀어졌다.
“이미 털어놓아서 알고 있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범상치 않아. 그리고 오염에 대항하는 힘도 가지고 있어.”
“……알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걸 봤으니까.”
리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태 이런 회차는 전혀 없었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그 회차들의 ‘달린’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너도 오랫동안 찾아왔지? 그놈, ‘세계의 오류’를 처단하는 방법.”
“……넌 그걸 그렇게 부르는구나.”
“응. 리제, 넌 방법을 찾았니?”
이렇게 묻는 동시에 나는 리제가 이미 찾았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나만의 로판 기능 속 리제의 프로필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맞아, 나는 방법을 찾았어.”
리제는 순순히 인정했다.
피로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내게서 떨어트리지 않은 채로.
“그리고 그건 네 덕분이야.”
“내 덕분?”
“그래. 네가 그 마석을 가져다준 덕분이니까.”
리제가 아픈 듯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폐신전에 들어갈 수 없어.”
무수한 회귀 끝에 리제는 오염에 물든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도, 그놈을 처단할 방법도 알게 되었지만, 그 방법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폐신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폐신전은 언제나 ‘세계의 오류’가 지키고 있었으며 웬만한 사람은 얼씬도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결국 리제는 그놈을 죽이려는 의미 없는 시도만 계속하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 마석의 존재를 알려준 건 시몬, 그놈이었어. 스스로 말했지. 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서 그랬을 거야.”
지독한 희망고문이었다.
그놈이 원하는 건 이러다 리제가 지쳐 영원히 절망에 빠지는 것이었을 테지만.
예상치 못하게 내가 나타나 버린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네.”
나는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내 입술로 시원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이제야말로 그 새끼 목을 따버리는 거.”
* * *
리제와 달린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
같은 시간 조금 떨어진 곳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휴고와 래빗이었다.
정확히는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휴고에게 래빗이 나타나 다가온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황녀님.”
휴고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의에 걸맞은 인사였지만 영혼이 먼 곳에 가버리기라도 한 듯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래빗은 속으로 혀를 찼다.
‘멀리서 봐도 청승 떠는 것이 딱 보여서 왔건만.’
래빗은 눈을 뜬 라이칸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온 참이었다.
지금쯤 라이칸의 침실에선 삼황자가 아직도 엉엉 울고 있을 것이다.
“넌 왜 요기서 청숭 떨고 있누냐.”
래빗의 직설적인 한마디에 휴고는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희미하게 미소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황녀님의 언사에는 항상 놀랍니다.”
“네놈이 착한 척하지만 사실운 착하지 않눈 것과 같운 이야기지.”
래빗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휴고의 옆에 섰다.
휴고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선 자세였지만 통통한 다리와 조그만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려봐야 햄스터가 케이지에 폭 뻗은 듯 앙증맞아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너눈 내가 진짜 이 나이가 아니란 것 쭘은 알고 이찌 않누냐?”
정작 본인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휴고는 이를 지적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진실 또한 마리다.”
래빗이 던진 말에 할 말을 잃었, 아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 휴고는 여러 가지를 느끼고 있기는 했다.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황녀라고 느꼈으며, 달린과 엮인 인연이니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광증처럼 큰 비밀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는 사라진 나라의, 그 나라의 혈통만 쓸 수 있는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진실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래빗은 휴고에게 마음이 쓰이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사실 이런 기분은 꽤 오래전부터 미묘하게 느끼기는 했다.
‘그냥 누가 생각나서 그런거려니 했더니.’
……설마하니, 휴고가 자신의 조카 손주가 남긴 핏줄이었을 줄은 어찌 알았으랴.
로아타 황제의 조국은 제국과의 전쟁 끝에 멸망했다.
그리고 조국의 황족은 모조리 죽었지만…… 휴고의 말을 듣고서 알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북부 대공과 결혼했음을.
절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후손을 마주했을 때 기분이란 어땠던가.
그러니 래빗은 휴고를 그냥 둘 수 없었다.
“힘내라.”
끝내 차였지만 홀로 끝내지 못한 짝사랑에 끙끙 앓는 모습이 결코 그에게 좋은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세상에 여자눈 만지만 그애와 같운 사람운 없지. 상투적인 위로눈 하지 않우마.”
위로는 아니라지만 실상은 다정하고도 서툰 위로에, 휴고는 작게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휴고는 기꺼이 그녀가 밝히지 않는 진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조상인 듯한 영웅에게 친애의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너랑 나눈 그, 모냐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관계니까 나한테만운 털어놓아도 좋다. 특별히 청숭도 받아주게따.”
“좋군요. 제 가족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었으니…… 나쁘지 않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은, 몇 백년이 지나 다시 만난 먼 핏줄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