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75화 (275/281)

◈275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0)

[만렙 업적 달성! 스킬 지속시간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당신의 마력과 생명을 바쳐 스킬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단, 생명력이 모두 쇠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눈앞으로 푸르른 요정의 창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한번 훑어봤을 뿐 시선은 오직 세계의 오류를 향한 채였다.

“이 미친 새끼, 아주 집착 스토커가 따로 없잖아?”

“흐음, 그건 네 언어인가?”

“어, 너 같은 놈을 말하는 거지.”

세계의 오류가 낮게 웃었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리제지만, 너 또한 싫어하진 않아.”

“웃기지마, 분노를 눈깔에 덕지덕지 붙인 채로 말하면 잘도 믿겠다.”

“아니, 진심이야. 그런 말 못들어봤어?”

웃음소리가 순간 바로 앞에서 들렸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콰아아앙!

연기가 흩어진 자리에 내가 쥔 검과 어느새 다가온 라이칸의 검, 그리고 세계의 오류가 든 무기가 대치하고 있었다.

“사랑과 증오는 단 한 끗 차이란 말.”

세계의 오류가 다시 한번 입을 찢어 웃었다.

저 눈은 분노와 증오로 번들거렸다. 마치 제 일을 방해하는 내가 성가시다고 공언하는 듯.

나는 씩 웃었다.

“아니, 그딴 건 모르겠고, 한 가지만은 알겠다. 네가 빡쳤다니 내가 아주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내 몸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나는 튕겨나간 내 몸을 수습하면서 함께 공중에 떠오른 라이칸을 동시에 잡아주려 했지만, 이미 그는 자리에 착지한 뒤였다.

라이칸의 호칭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호칭이…… 전설의 기사였나?’

[요정은 놀라워해요, 정확하다고 말해요! ✧⁺ᇮ(・ ᗜ ・ )ᇮ⁺✧]

물론 그런 잡생각을 이어갈 시간은 없었다.

저 멀리 벽에 박혀버린 세계의 오류가 일어나면서 흐흐흐,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짜증나는군, 아니지. 짜증나. 아니……. 짜증나!”

미친 사람처럼 버럭 소리 지르는 것과 동시에 세계의 오류 쪽에서 심상치 않은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오염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자리엔 민간인은 전혀 없었고 함께 있는 사람 모두 ‘나만의 로판’ 기능 덕에 오염에 영향받지 않는 인물뿐이었다.

‘……장소가 아주 좋았어.’

하지만 상황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저놈에게서 연기가 나오기 무섭게, 나타난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오오어어어!

크아아아악!

기이안 음성을 내며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괴물들이었다.

이 수도 곳곳에 나타났던 괴물.

‘아직도 남았단 말이야?’

분명 지도에서 새까맣게 나타났던 것을 보았는데. 대체 이 미친놈은 괴물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둔 건지, 여기에 나타난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어떡한다, 이곳에 지원을 불러? 하지만 오염이 자욱한 곳에서 버틸 수 있는 인물은 래빗과 휴고 밖에 없는데…….

그들은 현재 수도를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있다.

눈을 떼지 못한 채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달린.”

“라이칸?”

“저 괴물들은 내가 맡겠다.”

라이칸이 검을 툭툭 털며, 나를 향했다.

“그대가 편히 저자를 맡을 수 있도록.”

“…….”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신이 역할이 이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너무 많아요.”

“감이지만 그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았나?”

“…….”

아니, 나는 이 자리에 최대한 래빗과 휴고, 라이칸이, 혹은 최소한 휴고와 라이칸 두 사람이라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수도를 급습한 괴물이 예상외로 너무나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전력은 나뉘고 말았다.

“하하하하, 당황한 얼굴이네, 요정의 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세계의 오류가 핏줄기를 주르륵 흘리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붉게 흘러내리던 핏줄기가 어느 순간 검은빛을 띠었다.

이뿐 아니라 피가 스스로 멈추기까지 했다.

“나는 멸망을 위해 무수히 많은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여 이 자리에 있다. 너는 과연 내 모든 계획을 저지할 만큼 강하고 철저한가?”

아니, 그런 건 없어. 요정 이 XX는 얼렁뚱땅 나를 데려와 여기저기 수습하라 던지기 바빴지.

“라이칸, 이것만 약조해줘요.”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은 뜻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뜻은 요정 같은 신적인 존재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란 걸.

모든 경험을 통해 배웠다.

“다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죽지 않겠다고.”

검을 고쳐 잡았다.

감이지만 리제가 사라진 곳에서 묘한 것이 느껴졌다. 리제가 준비를 마무리하는 것이 머지않다는 점 또한.

그러니 오래 버티지 않아도 돼.

“당신이 영원히 눈을 감을 뻔한 아픔은 한 번으로 족해요. 그러니 약조해줄래요?”

“……나야말로 똑같이 말해주고 싶군.”

라이칸의 손이 내 손을 찾아 꾹 쥐었다.

우리는 나란히 앞을 응시한 채, 그렇게 서로를 보지 않으며 말했다.

“늘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지. 그대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지만 이제 나 또한 말하고 싶다. 이제 달린, 네가 없는 세상은 견딜 수 없다고.”

“…….”

나는 라이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작게 웃었다.

“……이제 사랑한다고 말할 차례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그 말은 아껴둘게요. 원래 피날레에서 키스와 함께 하는 말이니까.”

라이칸이 작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래, 그때는 내가 먼저, 그대의 입을 맞출 수 있게 해주겠나?”

“난 박력 있는 남자도 좋더라.”

동시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렸다.

나는 속으로 입술을 꾹 깨물며, 빌었다.

제발, 라이칸에게 아무런 일이 없기를.

그러나 이런 소원이 사치로 여겨질 만큼 그가 향하는 방향엔 괴물이 새까맣게 득실거렸다.

나도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허어, 내 상대는 너야? 레이디를 사지로 내몰다니 애인이 매너가 좋지 못하군.”

“레이디는 개뿔이. 내 애인은 배려가 넘치는 거야. 제일 맛난 부위를 내게 준 거니까.”

내 검에 주황빛 마력이 맺히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쾅 터졌다.

이번엔 저쪽에서도 대비했는지,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차피 나 또한 타격을 위해 시도한 건 아니었다.

필요한 건 아주 약간의 시간.

[인간!]

눈앞에 붉은 마력이 맺히며 익숙한 형상이 떠올랐다.

내가 소환한 조그마한 신, ‘둑스’였다.

오랜만에 보는 조그마한 여우가 귀를 쫑긋했다.

‘둑스, 내 말 들리지? 가서 라이칸을 도와줘!’

[켕, 저 놈들은 내 도시를 망친 것과 같은 오염의 존재들이구나. 그냥 있을 순 없지.]

둑스가 재주를 넘더니 이내 뛰어갔다. 뛰어가는 모습은 더는 작은 여우가 아니라 거대해진 형상이었다.

몸에서 기력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직은 버틸 만 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빙의자 님을 보조합니다!]

그래, 요정 너도 이젠 물러설 곳이 없다 이거지?

오나, 너도 최선을 다해라.

‘……아무래도 최선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눈앞에서 잘생겼지만 이질적인 눈을 한 존재가 히죽 웃었다.

“이야, 그냥 요정의 사도인 줄 알았더니……. 너, 생각보다 요정이랑 거의 합쳐진 상태잖아?”

“넌 개 짖는 소리만 할 줄 아나 보네.”

“너, 새로운 요정 후보야?”

저놈이 무슨 소릴 하든 개소리 취급할 생각이었지만, 아주 잠깐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칼을 맞댄 순간, 내 찰나의 떨림을 알아차린 듯이 뱀 같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궁금하지 않아? 어째서 이 평화롭던 세상에 나같은 놈이 나타났는지.”

[요정은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해요! ⎝༼¸◕ˇ‸ˇ◕˛ ༽⎠]

“사실, 나도 그 요정이란 존재가 소환한 영혼이거든.”

“뭐?”

“이봐, 너 같이 불려온 존재가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

저놈이 무슨 의도든 간에 내 힘을 빼놓으려 했던 거라면 그 의도는 실패했다.

내 검에선 힘이 빠지지도 마력이 흔들리지도 않았으니까.

‘라이칸과 리제가 없을 때 이런 얘기를 해서 차라리 다행이지.’

내가 진짜 달린인 줄 아는 이들이었다.

나는 묵묵하게 놈의 빈틈을 노리며 시간을 가늠했다.

“요정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신이 아니야. 선량하지도 않지.”

“오, 너랑은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하네.”

콰아앙! 다시 한번 무기가 부딪쳤다. 나는 힘이 빠지는 걸 애써 숨기며 웃었다.

“나도 요정 새끼가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아.”

“…….”

“단지 네가 더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눈앞으로 래빗, 아니 로아타 황제의 환영이 스쳤다.

환영으로 비친 그녀가 내게 시원하게 웃는 것만 같았다. 마치 동의한다는 듯.

그와 동시에 내 검로가 바뀌었다. 내게 빙의한 힘, 로아타 황제가 움직이는 것이다.

“너 때문에 운명이 바뀐 자들은, 너를 평생 원망하겠지.”

래빗과 휴고, 그리고 영원히 갇혀버린 발데르.

“그리고 너는 죄 없는 자를 무수히 죽이고 죽이려 했지.”

무수한 회귀를 거친 리제와 죽음에 이를 뻔한 라이칸까지.

“넌 죽어도 싸. 아니,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야 마땅한 놈이지.”

내 검이 빨갛게 익어갔다. 처음엔 기이한 형상에 놀랐지만 곧 알아차렸다.

이게 바로 로아타 황제의 진정한 힘, 지금까지는 결코 이끌어내지 못했던 힘이라는 걸.

아울러 대마법사의 마력이 이 거대한 힘을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런 공격이면 저놈에게도 필시 먹힌다.’

확신했다. 감 또한 내가 옳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리제가 계획을 완성하기 전에 저놈을 없애거나 꼼짝 못 할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거대한 힘이 담긴 검이 놈의 목을 파고들 때였다.

놈의 입술이 히죽 웃었다.

“시간은 다 끌었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