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9)
* * *
“놈은 수도 북쪽 외곽에 있어.”
말을 타고 가는 동안 리제의 말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보통 말을 타는 동안에 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진 않겠지만 리제가 무슨 수를 쓴 것 같았다.
리제는 말을 달리며 정확한 위치를 말했다. 지도가 띄워져 있으니 어딘지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지. 리제, 사람이 없는 공간이면 어느 정도 크기면 돼?”
“달린,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네? 라이칸, 어째서요?”
리제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나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라이칸이 말했다.
“북부 외곽지역이라면 괴물이 떼로 나온 지역이었다.”
하필 가장 처음이 된 탓에 피해가 막심했고, 그 후로는 아예 제국민을 대피시켜 현재는 비어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모아두는 편이 지키기 수월하니까.
“그럼 잘됐네요. 리제, 들었지? 사람이 없는 곳이래.”
이건 행운이 따른 걸까.
아니면 이 또한 요정이 도와주기라도 한 것일까.
기묘한 긴장 속에서 도착한 구역은 라이칸의 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괴물이 휩쓸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마치 폐허처럼 보이기도 했다.
“……놈의 기운이 느껴져.”
몇 걸음 걸어보던 리제가 말했다.
순간 어떻게 그걸 아느냐는 말이 혀끝까지 나와 맴돌았다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를 묻기에는 리제의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수많은 일이 있던 것처럼.
실제로 리제의 회차를 본 사람으로서 쉬이 물을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근처에 있어?”
“아니, 그건 아니야. 여기서 좀 떨어진 곳 같은데…….”
리제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준비하기는 딱일 것 같네.”
리제는 이 정도 거리면 미리 준비해두고 놈을 유인하는 쪽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끄덕이며 리제의 준비를 돕고자 했다.
리제가 필요로 하는 강력한 마력을 가진 사람, 그게 나였으니까.
순간 리제가 내게 무언갈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를 보는 순간 조금 놀랐다.
“여기에 정순한 마력을 넣어줄 수 있니?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그도 그럴 것이 리제가 내민 건, 내가 리제에게 부탁받아서 폐신전에서 가져온 마석이었으니까.
얼마 되지 않은 일인 데다가 퀘스트이기도 했으니 잊을 리가 없었다.
범상치 않은 마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게 왜 지금 여기서 나오는 거지?
가져올 때만 해도 리제가 어딘가에 쓰겠지 하고서 넘긴 것이긴 했다.
‘하지만, 대체 시공간을 아주 잠시 멈추는 마석 같은 걸 어디에 쓰려는 건데?’
나는 리제를 빤히 보았다.
리제는 아마, 내가 이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여기서 이게 뭔지 안다고 하면?
대체 어디에 쓸 거냐고 묻는다면.
“……리제, 마력을 불어넣는 건 어렵지 않아. 최대한 많이 넣어 볼게.”
“그래, 고마….”
“근데,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
나는 마석을 받지 않은 채 말했다.
“혹시 이거, 나한테 맡겨줄 수 있어?”
리제가 움찔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리제의 얼굴은 고요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다소 부자연스러운 고요함이었다.
“리제, 이제 날 믿는 거지?”
“맞아, 믿어.”
“응. 네가 정말 날 믿는다면 이걸 줄 수 있어?”
나는 리제의 손을 내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이게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내가 할게.”
“……그건 안돼.”
잠시 침묵 끝에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그 반듯한 시선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된다는 기개마저 엿보였다.
“그럼 이건 어디 사용하는 건데?”
“달린.”
리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분명 단호한 말투인데 목소리는 어쩐지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 믿는다면 묻지 마. 아니, 묻지 않고 진행해줄 수 있어?”
결연한 눈을 보고 있자니, 날 위해서 원수의 나라마저 용서하겠다는 래빗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나는 끝내 답을 재촉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 이리 줘.”
리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지 않은 신호처럼 느껴진 건 왜일까.
‘발데르, 당신이 준 마력을 이 순간에 쓰게 되네요. 제발 내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길.’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마석을 가만히 만졌다.
어깨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면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라이칸이 있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리제는 꽤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
“달린, 혹시…… 걱정되는 것이라도 있나?”
분명 리제와 내 대화를 들었음에도 모른 척 사려 깊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나는 작게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머리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감이……. 감이 영 좋지 않네요.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나를 살려준 감이었다.
이번에도 감을 믿고 리제를 다그쳐야 하는가?
“어떤 갈림길은, 어느 길로 가든 후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길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 덜 후회할 것 같은 쪽을 고르지.”
라이칸의 나지막하고도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마력을 일으켰다.
내 몸에서 일어난 주홍빛 기운이 마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리제가 하려는 일이 내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야. 그렇다고 세상에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아니었다면, 지금쯤 요정이 나에게 온갖 경고를 날렸을 것이다.
“그대는 어떻지? 내가 감히 그대의 선택에 조언을 해도 괜찮다면…… 마음 가는 쪽으로 행하는 것은 어떤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라이칸이 마석을 쥐지 않은 내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내 여동생을 구원해주었겠지. 이제는 그대 없이 살 수 없는 내 삶 또한 말이야.”
입술의 촉감이 닿은 손바닥과 함께 심장마저도 간질거렸다. 동시에 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애정을 느꼈다.
당신은 정말, 정신 차려보면 고인 물처럼 어느새 나를 가득 채웠구나.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그래, 언제는 모든 걸 계획하고서 움직였나.
계획이란 건 아무리 촘촘하게 짜더라도 결국은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리제의 일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구멍은, 혹시 모를 위험한 일은…….
‘내가 막으면 돼.’
리제가 돌아올 무렵 나는 리제에게 마석을 다시 내밀었다.
“따뜻하네.”
“응. 내가 계속 쥐고 있어서 그런가 봐. 마력은 내가 넣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넣어봤어.”
그 탓인지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기도 했다.
마석을 살펴보던 리제가 놀란 얼굴을 했다.
“달린? 대체 너, 이런 거대한 마력은 어디서…….”
리제가 이렇게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지 돌가루가 튀는 사이로 하늘로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이 보였다.
폭발을 일으킨 존재가 누구냐, 하는 말은 필요 없었다.
“달린! 그놈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허어, 세계의 오류를 어떡하면 이쪽으로 유인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건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라이칸이 내 앞을 막아서고 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잠시 긴장했다.
‘지도가…….’
그도 그럴 것이 폭발과 동시에 지도에 가득 검은 점들이 우리가 있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으니까.
나는 손을 움직이며 스킬을 쓸 준비를 했다.
‘스킬엔 시간제한이 있어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해.’
한쪽 발을 뒤로 밀며 우선은 손을 흔들어 지팡이부터 잡았다.
곧이어 연기가 풀풀 흩날리는 방향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새카만 피부와 흩날리는 머리카락, 능글맞은 얼굴까지.
시몬, 아니 시몬의 탈을 쓴 세계의 오류였다.
세계의 오류를 본 순간 리제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흐응, 뭐야. 반가운 기운이 느껴져서 인사했더니…… 인원이 더 많았네?”
리제를 보며 부드럽게 풀려있던 눈이 나와 마주한 순간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우리, 참 달갑지 않은 인연이야. 안 그래?”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렇지. 한쪽이 죽어 마땅한 관계인데, 아 물론 죽어 마땅한 쪽은 너야.”
“…….”
“이렇게 친히 나와 주셔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계의 오류가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연기가 걷히고 난 뒤 세계의 오류는 옆으로 피한 채였지만, 옷이 그을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는지 찢어진 채였다.
나는 생긋 웃었다.
“내 환영 인사야.”
나는 지팡이를 살살 흔들었다.
“그간 내 친구를 많이 괴롭혔다지? 망할 새끼야.”
세계의 오류가 당황스러운 듯, 그러나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 애정을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지.”
나는 몰래 리제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리제가 입을 달싹였다. 시간.
시간을 끌어달라는 거구나.
“그래, 뭐. 이쯤 됐으니 하나만 묻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냐?”
나는 지난번에도 이놈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 있었다.
세계의 오류는 나를 빤히 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환한 미소라기보다는 광기가 어렸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미소였다.
“이 세상이 깡그리 사라지면 좋겠다?”
“사라진 세상엔 너 또한 존재하지 못할 텐데?”
“아니지, 아니지. 넌 답을 알고 있잖아? 요정의 사도.”
그놈의 사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시치미 떼지? 이상하네. 이 세상이 멸망하면 다른 세상으로 가면 되잖아?”
그 순간 나는 기이한 소리를 들었다.
마치 순간이지만 세상이 흔들린 듯 떨림과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울부짖음.
요정의 소리였다. 요정이 분노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물론 다음 세상에는 혼자 가지 않을 거야. 리제와 함께 갈 거거든.”
“……미친 새끼.”
세계의 오류의 눈이 그윽하게 휘어졌다.
나는 놈이 마치 자신과 같은 존재를 보듯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너 또한 네 몸이 아니지 않느냐’는 시선.
우습지도 않았다.
너는 빼앗았고, 나는 받은 거니까. 완전히 다르거든? 이 미친 새끼야.
“말이 통하질 않으니, 요정이 나를 불러들였나 보네.”
문답무용. 더 이상의 질문도 답도 필요 없었다.
“너 같은 놈 대신 청소하라고 말이야.”
[스킬 ‘소환(lv.-)’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7)’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빙의(lv.-)’ 최대 레벨을 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