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요한은 천천히 김설화와 눈을 마주쳤다. 발작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입에 거품을 물었는지 입 주변이 하얀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도 아니면 그냥 재갈을 풀려고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생긴 자국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요한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신체든 정신이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하나 썩은 동태눈을 하고서도 그녀는 자신을 응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놀라운 정신력이다. 놀라운 수준을 넘어 독하디독하다.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피폐해져 일반적인 대화도 쉽지 않았을 거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40시간을 버텼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자신을 찢어 죽이는 상상. 두개골을 깨부수고 사지를 절단하는 복수를 꿈꾸며 버텨내지 않았을까.
“···대체 너 정체가 뭐야.”
그 와중에도 김설화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요한은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갖다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여기서 절대 못 나가. 썩어 시체가 되어서 육신이 문드러지고 쥐들이 네 썩은 살을 파먹겠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안식뿐이다. 협조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현재 서생연의 인원수. 간부들의 이름. 이곳에 온 서생연의 수.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지. 무장상태는 어떤지. 그들과의 연락 방법. 그 외에 생각해둔 작전. 기타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
한 마디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죽으라는 의미였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도 요한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회귀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번 생에 당했던 일도 아닌데 지금의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너무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요한은 기껍게 복수를 택했다. 백 번 회귀해서 백 번 만나도 백 번을 복수할 터다.
요한의 무감정한 시선에 그녀가 입을 어버버 벌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려줘.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뭐든지 다 말할게.”
요한은 굽혔던 무릎을 폈다. 아직도 아니다.
“자, 잠깐-”
그녀의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그녀는 또다시 어둠 속에 갇혔다.
* * *
문이 열렸다. 어둠을 가르고 길쭉한 마름모 모양의 빛이 들어오는 듯하더니, 이내 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밀실 안으로 들어온 스위퍼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포 라이터의 발화 소리와 함께 작은 촛불이 밀실 안을 밝혔다.
“휴, 지독하군.”
스위퍼가 넝마가 된 김설화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지독하리만큼 매정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대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건 인간으로서 거부감이 들 정도였으니. 차라리 고문하는 게 신사적이라 생각 들 만큼 끔찍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냄새 때문에 몇 분도 견디기 어려웠다. 스위퍼가 코를 막으며 재갈과 두건을 벗겼다. 흰자위가 드러난 얼굴이 보였다.
몇 초가 지나자 점차 동공에 초점이 맞아간다. 초췌한 안면에 수치심과 괴로움이 가득하다.
“···죽여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요한은 정말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김설화를 방치했다. 음식도, 물도, 심지어 화장실조차 갈 수 없이 초 단위, 분 단위로 사람을 무너뜨렸다.
스위퍼는 깨달았다. 그가 선택한 행동의 기준은 선악이 아니었다. 그는 삶의 영역에 철저하게 아군과 적으로 선을 긋고 적에게는 스스로 악인이 되는 걸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리더에게 공포감을 느꼈다.
‘이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극단적인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우유부단하거나 호구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위험을 자초하는 것도 나쁘지만, 매정함도 지나치면 악이 된다.
분명 그 비인간적인 면모가 언젠가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을 찌를 거다. 차라리 혁이와 반반씩 섞여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한동안은 혁이의 기를 좀 세워 줘야겠군.’
녀석의 역할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녀석에 대한 대장의 애정은 누가 봐도 확연했다. 눈앞의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동료를 구하겠답시고 위험한 곳을 습격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말은 복수와 위협 제거였지만, 스위퍼는 그게 혁을 구하기 위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대장의 안전장치이자 브레이크가 되어 주어야 했다. 이대로 서생연과의 싸움이 계속되고 이런 모습을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그의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위퍼는 그녀에게 가져온 물을 떠먹여 주었다. 꿀떡꿀떡 물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대장 형씨는 아가씨를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정말로 죽일 생각이지. 아마 이대로 한 마디도 못 해보고 죽을지도 몰라.”
스위퍼가 천천히 덧붙였다.
“하지만 난 달라.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이따 대장이 올 거야. 그때가 마지막 기회야. 대장 형씨가 들어오자마자 모든 걸 말해. 한 치의 거짓도 섞지 마. 조금만 수상하다 생각하면 차라리 듣는 걸 포기하려 할 테니까. 대장 형씨한테 순순히 협조하면 모든 걸 끝낸 뒤 대장 몰래 아가씰 풀어준다고 약속하지. 그러니 솔직하게 얘기해.”
“아, 알겠어.”
김설화는 신들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이만하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스위퍼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이 밀실의 문을 열고 김설화의 얼굴에 씐 두건과 입에 물린 재갈을 벗겼다. 김설화가 연달아 메마른 기침 소리를 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예순여덟 명이야.”
눈앞의 사내가 도망이라도 칠세라 화다닥 말을 내뱉었다. 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요한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물을 삼키게 했다.
꿀떡꿀떡 물을 넘기던 김설화가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거렸다. 몇 초간 기침을 연잇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먹을 것 좀······.”
“간부들의 이름.”
음성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김설화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모든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그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
묻지도 않은 것들까지. 거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요한은 뇌리에 박아넣듯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현재 서생연의 수는 예순여덟 명. 그리고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캠프가 두 개.
요한이 회귀 전 만났던 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지만, 아포칼립스 이후 고작 7, 8개월이 지난 걸 감안하면 역시나 놀라운 성장세였다.
납득은 됐다. 폭력적인 방법만큼 세를 불려 나가기에 좋은 방법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백종수 때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주기적으로 주둔지를 바꿔왔다. 아마 그게 좀비 웨이브를 피하고 그들이 살아남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겠지.
다만, 그녀가 내뱉은 간부들의 이름 중에선 처음 듣는 간부들의 이름이나 별명도 많았다.
요한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과거 요한과 만나기 전에 죽은 자들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바뀐 과거 때문에 새롭게 합류한 이들일 수도 있었다.
정미의 방송을 듣고 부천으로 나온 선발대는 김설화를 포함해 열 명.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도 추가로 간부 한 명이 더 있다고도 덧붙였다.
따로 이름이나 별명 없이 수색 2조장이라고 불리는 자.
아마도 합류했어야 할 백종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자인 듯싶었다.
선발대 중 조심해야 하는 건 그놈 정도리라. 외관 묘사를 들어도 요한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간부라면 간부인 이유가 있을 터다.
“선발대와의 연락은 어떻게 취하기로 했지?”
“내 짐에 무전기가 있어. 수색조에 사흘에 한 번은 해야 돼. 최대 나흘까지 연락이 없으면 이곳을 습격하기로 돼 있어.”
“오늘이 사흘째니 내일은 움직이겠군.”
납치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김설화가 기함했다. 체감상 일주일은 더 된 것 같았는데. 요한의 질문이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김설화는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개백정과의 연락은?”
“수색조에 군용 무전기가 있어.”
“군용 무전기로도 이 정도 거리가 통신 되진 않을 텐데.”
“자세히는 몰라.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있어.”
중계기 안테나라도 설치했나.
통신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안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개백정을 이쪽으로 오게 하는 방법이 있나?”
“상황이 어렵다고 하면 추가로 사람을 보내겠지만 본인이 직접 올지는··· 확신할 수 없어.”
요한은 그를 잘 알았다. 신중하지만 태생적으로 전투를 두려워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적당한 핑계만 찾는다면 그를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건 가능할 거다. 그리고 그게 그녀를 살려두는 이유였다.
“선발대를 처리하면 다시 오지. 네 역할은 개백정을 끌어들이는 것까지다. 스위퍼, 들어와.”
요한이 말을 마치고 밖에서 달그락거리던 스위퍼를 불러들였다. 그는 이단 트레이를 끌며 들어왔다. 트레이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수갑, 그리고 한 그릇의 죽이 있었다.
그녀의 한쪽 손에 수갑을 채운 후 철제 라디에이터에 고정한 뒤 손 닿는 거리에 대야와 죽그릇을 두었다.
허겁지겁 물을 향해 달려들려는 그녀를 붙잡아 세우고선 직접 몸을 수색해 여덟 개의 무기를 회수했다. 은밀한 곳에 손길이 닿을 때마다 김설화가 움찔댔으나 요한의 손길은 어디까지나 무미건조했다.
“다시 보지.”
요한은 한 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빠져나왔다. 벌려 있던 자물쇠가 단단한 아가리를 다물었다. 몸에 밴 냄새만큼이나 찝찝한 복수극이었다.
요한은 그 길로 수색조와 용병단을 한데 모았다. 내일이 나흘째. 기습한다면 적기였다.
“적의 수는 총 아홉 명입니다. 장소는 와이카 카센터. 전원 완전무장에 상당히 잘 훈련된 자들입니다.”
“그쪽엔 예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철구가 툭 내뱉듯 말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근에 그쪽에 자리 잡았을 겁니다.”
“그나저나 꼴랑 아홉 명?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데.”
“최대한 희생자가 적은 일방적인 싸움이면 좋겠습니다.”
노인에게 잔뜩 겁을 준 것 치고는 확실히 적은 숫자였다. 물론 요한이 준 대가에는 서생연 본대와의 싸움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굳이 부연하지는 않았다.
시시하다는 표정을 짓는 노인을 뒤로, 스위퍼가 질문했다.
“그럼, 곧바로 움직여?”
“지체할 필요는 없지. 내일 해 뜨기 전에 이동해서 주변을 포위하고, 시야가 보일 만큼만 동이 트면 바로 기습한다.”
요한은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 * *
서생연의 선발대가 주둔한 곳은 가족재단에서 약 15분 거리 떨어진, 주변이 탁 트인 도로 위의 카센터였다.
아직 그들은 습격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상황. 카센터의 옥상에는 경계병이 한 명만 서 있었다. 요한은 최대한 은폐하고 접근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일행을 이끌었다. 요한이 무전기에 대고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옹 상병, 시작해.”
-옛슴다.
시작 신호를 받은 옹 상병이 확대경에 시선을 맞췄다. 평소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사격하는 게 아닌 만큼, 난이도는 상당히 어려웠다.
하나 빗나가면 안 된다. 경계병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모든 작전의 시작점이었으니까. 한 방에 끝내야 했다.
확대경의 조준점이 천천히 경계병의 머리를 향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마저 막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살짝 내뱉은 뒤 호흡마저 멈췄다. 천천히 검지가 당겨지고, 소음기가 장착된 저격 소총이 격발됐다.
-다운.
“경계병 처리 완료, 진입하세요.”
요한의 신호로 스물다섯 명의 용병들이 쏜살같이 두 개의 카센터 건물을 둘러쌌다.
“스위퍼, 혁이는 나랑 같이 진입한다. 나머지는 밖에서 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