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46화 (146/176)

<146화>

요한을 바라보면 지혜가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성스럽기까지 한 웃음이 마음의 빚처럼 가슴 한구석에 얹혔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한테는 항상 너무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지혜의 인사는 그녀가 떠난 뒤에도 잔상처럼 맴돌았다.

지혜마저 떠나보낸 요한은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뒷정리한 후 숙소로 되돌아왔다.

전투를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요한은 수면을 취하는 대신 숙소 앞에 설치해 둔 선베드형 릴렉스체어 위에 기대어 앉았다.

그의 어깨에는 중요 서류들만 정리해서 기록해 놓은 둥글게 말아 넣은 서류뭉치가 어깨 단추에 넣어져 있었다.

원정 전에 이곳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이곳을 떠날 거고, 신도의 밤바다가 뇌리에 박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쓸데없는 감성을 유발했다.

그저 잠시 살다 돌아가는 장소일 뿐임에도 그랬다. 아니, 사실 제법 공을 쓴 쉘터였다. 회귀하자마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것을 준비했던 곳, 주민들이 정착하고 나서도 마치 제 고향처럼 가꾸고 일구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의 살아남는 과정일 뿐이었기에.

“안 자?”

옆 숙소에서부터 세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맥주 두 캔이 들려 있었다.

‘익숙한 상황인데.’

밤바다. 적당히 취한 둘. 그리고 그녀가 품은 의미심장한 모습까지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옆자리에 앉아 맥주를 건넸지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 마셔라. 주정뱅이. 그리고 취한 척 육탄 공세 할 생각이라면 정중히 사양이다.”

“치. 안 취했거든.”

바람이 찼다. 외투를 두껍게 걸쳤음에도 옷 사이사이에 차가운 섬 바람이 샜다. 세리가 옆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요한은 그녀의 눈에서 굴곡진 감정의 흐름을 읽어냈다.

그녀가 원하는 바는 항상 명확했다.

그리고 요한은 마침내,

“세리야.”

“응?”

“이제 마음 정리해라.”

선을 그었다.

“…….”

“언제까지나 이렇게 애매하게 받아주면 피차 힘들 테니까. 인제 그만해. 나는 내 가치관을 바꿀 생각이 없고, 간 보듯이 너를 괴롭힐 생각도 없어.”

잠시의 침묵 이후 세리가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내가 오빠한테 뭘 바랐다고 내 마음을 멋대로 정리하래.”

“…….”

“지혜 일 때문이야?”

무작정 그녀를 밀어내기에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하룻밤의 기억.

실수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성인이었고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심리상태였다. 그저 충동은 달콤했고 성적 긴장감이 주는 쾌락이 뜨거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병신처럼 보이겠지만, 포기 안 해. 하지만 강요도 안 할 거야.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네가 날 좋아하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만, 내 마음마저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젖은 듯 질척했다. 요한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저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단호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오히려 지금처럼 모호한 태도를 계속 유지했으면 더 힘들었을 거야.”

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갔다. 요한이 그녀가 남기고 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는 미지근했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출항 준비를 위해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노아는 군함 앞에 서서 감회가 새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구시렁거렸다.

“군함을 또 타게 될 줄이야.”

“운명이겠거니 생각해.”

요한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갑판 위로 올라섰다.

요한이 함선 내부를 쭉 훑으며 걸어갔다.

CCC(:Command Control Center, 지휘통제실)에 도착한 요한이 대기 중인 인원에게 무전 했다.

“MCR(:Machine Control Room 기관통제실), 기관실 준비는?”

-보기실 디젤룸 이하 기관상태 이상 없음.

“조타실은?”

-네. 문제없습니다.

“갑판은?”

-주갑판 이상 없음.

-헬기장도 이상 무.

준비는 깔끔했고 완벽했다.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꼼꼼하게 확인한 보람이 있었다. 요한이 짤막하게 무전을 쳤다.

“엔진 예열 끝나면 무전 쳐. 현문 폐쇄 준비하고.”

-예.

이제 남은 것은 출항 신호뿐이었다.

요한이 갑판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님.

그리고 마침내 타이밍 좋게도 기다리던 무전이 도착했다.

요한은 군함 출항을 대기시키고 어선을 끌고 재호를 태우기 위해 인천항으로 출항했다.

멀리서부터 재호의 모습이 보였다. 요한을 발견한 재호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늦지 않았네요….”

“죽은 줄 알았다.”

“죽는 줄 알았어요.”

“성과는 있었니.”

재호가 고개를 저었다. 묘한 웃음이 섞인 표정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지만 말하지 않는 듯한.

어선이 군함으로 향하는 동안 의미심장한 침묵이 흘렀고, 요한은 묻지 않았다.

군함에 도착하자마자 재호가 배낭에서 서적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그중 몇 권의 서적들을 집어낸 재호가 빠르게 서적들을 분류해냈다.

“일단, 항해술과 관련된 책들이고요. 이거는 항해 중간에 연료 급유가 가능한 세계 각지의 물류센터와 항만의 위치 정보가 적혀 있는 정보서예요.”

분류를 마친 그가 고개를 들어 요한을 바라봤다.

“목적지는 정하셨어요?”

“대충은. 딱 정해 놓은 건 아니야. 항해사가 있어야 목적지를 잡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한 말에 재호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뉴질랜드로 가시죠.”

“이유는?”

“GPS, 안 잡히죠?”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럴 거예요. 일 년이면 GPS 기능이 정지되기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그러면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하와이는 가고 싶어도 너무 위험부담이 커요. 망망대해에서는 자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거든요. 연안을 따라 항해해야 해요. 목적지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방향을 잃을 위험이 크니까, 목적지까지 경유지를 잘게 쪼개는 거죠.”

재호가 큼지막한 지도를 꺼내 점선처럼 점을 찍기 시작했다.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여기서 뉴질랜드까지 한 번에 갈 순 없지만 여기서 제주도까지의 거리를 200번 간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서해안을 따라 쭉 내려가서 제주도까지 찍고, 중국 쪽 해안을 따라 바로 남쪽으로 대만 찍고, 연안을 따라 필리핀 군도를 섬 쪽을 바라보면서 쭉 이동하고, 파푸아뉴기니까지. 그리고 파푸아뉴기니부터는 뉴질랜드까지 일직선으로 항해하는 거죠. 거리는 조금 더 길어지지만, 이게 안전해요. 여차하면 육지로 정박할 수도 있고요.”

가만히 설명을 듣던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꼭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안전하고, 물자를 구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오케이였으니까. 요한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그의 의견이 마뜩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예.”

“출항 15분 전, 각자 위치로.”

마침내 요한의 무전이 떨어지고, 일행이 탄 배가 출항했다. 캠프 요한의 생존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2018. 12.

백령함.

어느 바다 위.

항해는 17일 동안 계속되었다.

막힘없이 질주하던 백령함은 필리핀 군도의 어느 섬에 정박한 채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분명 평화로웠으나 백령함은 방향을 잃고 필리핀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채였다.

필리핀 군도를 항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난도 높은 항해술을 요구했다.

지도에 표시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섬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그 섬들은 끊임없이 혼란을 야기했다.

어느 순간, 백령함의 항해사들은 함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고민하던 재호는 요한에게 일시적으로 항해 중단을 요청했다.

요한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백령함의 항해가 두 번째로 임시 중단됐다.

수색조는 섬을 뒤지며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나간 상태였다.

몇몇 생존자들은 경계를 서고, 몇몇 생존자들은 배 갑판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요한은 배 안을 거닐며 혹시 문제가 발생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했다. 갑판 위 간이 탁자에서는 쉬는 시간을 받은 생존자들이 보드게임을 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1번. 암살자.”

“에, 저는 마술사를 죽일 거고요. 초소를 짓겠습니다.”

익숙한 대화에 요한이 흘깃 시선을 보냈다. 바다 위에서의 시간은 무료했고, 대부분 사람은 유희 거리를 챙겨오지 않았다. 그저 수병 관물대에서 발견한 보드게임 몇 개가 유일한 유희 거리였다.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게임은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즐겨 하는 게임이었다.

그조차도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 반복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쉬는 시간에 웃고 즐기는 걸 금지하지는 않았다.

제 임무와 역할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이 배의 선원 중 제 몫을 하지 않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요한의 걸음이 조타실을 향했다. 조타실에서는 재호, 그리고 재호의 조수 한 명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다.

“차라리 헬기를 장기간 띄워 보는 것은 어때요?”

“아니, 그건 너무 낭비지. 헬기 연료는 만일을 위해서 아껴둬야 한다고.”

앞으로의 항해에 대한 고민이 깊은 듯 보였다.

재호가 조타를 잡은 후, 대만까지는 상당히 매끄럽게 항해가 진행됐었다. 대만에서 추가로 물자를 보급하고 급유해서 가득 채울 때까지만 해도 이 항해가 급물살을 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필리핀 군도에 들어서자마자 항해사들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방향은 맞아. 차라리 남동쪽으로 900km 정도를 더 가서 파푸아뉴기니 쪽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러다가 완전히 태평양 쪽으로 빠져버리면요?”

“해협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아. 남쪽으로 훨씬 치우쳐서 가야지. 항로표지가 있을 때랑 없을 때가 너무 차이가 크네. 으.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노 젓는 기분인데.”

요한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발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일어섰다. 요한은 앉아서 일을 보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뭐가 잘 안 되나 봐.”

“아, 대장님. 함선 위치 파악이 너무 어려워서요….”

“천천히 해. 급할 것 없으니까.”

열정은 박수를 받을 만했으나, 그들은 백여 명의 목숨과도 같은 조타를 잡고 있는 항해사였다.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면 곤란했다.

요한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타실을 나왔다.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함 내 쓸데없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 누군가가 더 일하고 덜 일하지 않도록 조정하고 혹시 모를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철저한 점검 정도가 그의 역할이었다.

그 외의 부분은 전부 각자의 판단과 행동에 맡겼다.

노아 일행은 수색을 나갔고, 혁이와 몇몇 조원들은 함선의 소금기를 닦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요한을 발견하고서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연안에서는 스위퍼와 수색조 막내들이 투망으로 낚시하고 있었고, 후미갑판에서는 지혜와 서준이 물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요한은 함선과 함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선 함장실로 되돌아와 항해일지를 썼다. 출항한 그 날부터 요한은 매일매일 일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했던 것, 일본 오키나와와 미야코를 거쳐 대만까지 도착했던 10일 차. 지룽시 항만에서 한 번 더 중간급유를 하고 물자를 보급했던 것.

그리고 필리핀 군도로 진입했던 15일 차와 처음으로 겪었던 폭풍우와 해상경로를 벗어난 사건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항해일지를 채워갔다.

그게 요한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요한은 항해일지의 마지막 줄에 일기처럼 한 줄을 적어넣었다.

‘우리는 다소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을 살아가는 각오였다.

* * *

2019. 1.

뉴질랜드. 오클랜드.

에메랄드빛 바닷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종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바닷물 아래에 물고기 떼가 떼 지어 들어갔다. 그 위로 헬기가 지나가며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자, 물고기들이 포식자라도 만난 듯 와르르 흩어졌다.

헬기에는 네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공중에서 부유하는 헬기 문을 열고 요한이 고개를 내밀었다.

낯선 이국의 땅이 탁 트인 시야를 찌르듯이 들어왔다. 설렘, 긴장, 그리고 결연한 각오가 깃든 표정.

헬기 문을 통해서 해안가를 바라보던 요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루카, 조금 더 안쪽으로.”

요한의 말에 루카가 짧게 대답하고서는 헬기의 방향을 틀었다. 헬기가 항만 안쪽으로 좀 더 이동했다. 요한은 쌍안경을 통해 창으로 반대쪽을 확인하고 있던 스위퍼에게 물었다.

“반대쪽은?”

“위협요소라 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아. 서양 좀비 형씨들이 가득하네.”

“수는?”

“세 볼까?”

육안으로 세기 어려운 수라는 의미였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옆쪽에 있는 섬에 항만이 있으니 그쪽에 자리를 잡자.”

루카가 헬기를 내릴 만한 곳을 물색했다. 오클랜드에서 동쪽 해안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그중 관광지로 사용되었을 법한 섬 하나를 정해서 헬기를 내렸다.

요한이 헬기의 문을 열고 헬기 밖으로 한 발 내디뎠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밟는 뉴질랜드의 대지. 마치 암스트롱에 빙의한 듯한 첫발을 내디딘 다음, 두 발로 꼿꼿이 섰다. 그때, 바다 건너 멀리서부터 총성이 들렸다.

항해 중 들렀던 태평양 섬들에도 여전히 많은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 그중 일부는 다짜고짜 캠프를 공격한 탓에 섬 하나의 주민들을 통째로 몰살시키는 사달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도 여전히 생존자들이 남아서 생존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독하고, 강했다. 마치 종의 기원을 증명하듯.

상황과 장소는 달랐지만, 요한의 가치관은 같았다. 함께할 의지가 있으면 함께하고, 위협이 되는 자는 죽인다.

살아있는 자든, 죽은 자든, 앞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짓밟고 갈 뿐이다.

앞으로 8개월.

8개월 안에 모든 위협요소를 제거하고 새 시대에서 탄생할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준비를 끝낼 것이다.

약속했던 대로.

“여기가 우리의 최종 정착지인가.”

“마음에 드는걸. 나 오션 뷰 집에서 사는 게 버킷리스트였거든.”

하진과 노아가 한 마디씩 내뱉었다. 요한은 씩 웃고서는 휙휙 몸을 풀었다.

“일단, 좀비들부터 전부 다 쓸어버리자.”

“라져. 지금부터 뉴질랜드 접수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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